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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배양수 교수 ‘베트남 소설가 응웬후이티엡을 추모하며’

소설 ‘퇴역장군’으로 도이머이 시대 대표작가...작품마다 큰 반향 ‘대가’

‘도이머이’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베트남 소설가 응웬후이티엡(Nguyen Huy Thiep)이 3월 20일 향년 71세에 운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단편 ‘퇴역장군’으로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민족의 영웅, 장군을 그려 베트남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베트남 문학사서 가장 많은 평론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로 추앙받은 그를 여러 번 인터뷰 등을 통해 남다른 친분을 가져왔던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가 추모사를 전해왔다. [편집자주]

 

 

2021년 3월 20일에 베트남 소설가 응웬후이티엡이 오랜 지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베트남이 개혁개발정책인 ‘도이머이’를 주창한 직후에 발표된 ‘퇴역장군’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당시 베트남 사회를 요동치게 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50년 4월 29일생으로, 1970년 하노이사범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서북지역의 썬라성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10년 동안 역사를 가르쳤다.

 

그 후 하노이로 돌아와 출판사 편집국에 근무한 적도 있고,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하노이 근교의 밧짱 마을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등단한 이후에는 하노이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의 도이머이가 선언된 후인, 1987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많은 단편집을 내놓았고, 그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는 2001년 구정 전에 그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후 여러 번 인터뷰했다. 한번은 하이퐁과 타이빙성을 그와 같이 여행한 적도 있다.

 

그의 집 마당에서는 아주 높은 불상이 있다. 그는 ‘퇴역장군’으로, 일부 장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결국 가택수색과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잠시 붓을 놓고, 그 불상을 제작했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조각했다. 글 쓰는 것 외에도 조각에도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내가 만난 그는 말수는 적었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베트남에서 원고료로만 먹고사는 작가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나에게 한국 영화감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 중 몇 편은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 베트남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소설 ‘퇴역장군’으로로 혜성으로 등장

 

베트남이 도이머이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한 1980년대 말 어느 날, 베트남의 한 장군이 예편하여 하노이 근교에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나이 70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니, 그보다 여섯 살 위인 부인은 치매에 걸려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아들은 물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며느리는 산부인과 의사다. 열두 살과 열세 살인 두 손녀가 있다. 아들이 결혼할 당시에 그는 가족과 소식이 끊기었기 때문에 며느리와 손녀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장군이었기에 집안에서 언제나 명예와 자부심의 상징이었고 마을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기나긴 전쟁을 치른 뒤에 ‘자기 세대가 맡은 큰일을 다 마치고’ 귀향한 것이다.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는데, 일생을 바쳐 큰 공을 세운 장군은 노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늦은 사회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어느날 며느리가 소파수술로 얻은 태반을 끓여 먹여 개를 기르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평화를 찾은 고향에서 본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는 깊은 분노와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역한 후 6주 만에 치매에 걸린 부인은 사망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옛 부대의 기념일에 초청을 받고 짐을 꾸려 부대를 찾아간다. 얼마 후에 가족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 베트남 문학사서 가장 많은 평론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

 

위 줄거리는 1987년 6월 20일 자 주간<문예>지에 발표된 응웬후이티엡이라는 작가의 단편소설 <퇴역장군>의 내용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베트남 문단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어떤 평론가는 “이전의 베트남 단편은 단편이 아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단편이 나왔다”라고 극찬을 했다. 그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아마도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평론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이다.”

 

“흥미 있고 독특한 필법과 과감한 현실 반영, 새로움의 모색으로 베트남 문학에서 이정표를 세웠다.”

 

<퇴역장군>은 장군의 아들인 내가 그 가족 내에서 일어난 일을 진술하는 형식이다. 짧은 단편임에도 베트남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아주 사실적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이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면서 변화하는 베트남 사회에서 베트남 혁명과 통일의 주체인 ‘장군’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도 있으며, 그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품 속에서 장군은 조국과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며 항상 선과 정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인물이다.

 

■ “20세기 말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의 한 명이 귀천했다”

 

이 작품은 극찬을 받은 것 못지않게 사나운 비판도 받았다.

 

“필법도 새로운 것이 없고 수백 년 전에 사용되었었던 방법을 복제한 것이다.”

 

특히 “주제의 사상성이 의심된다”라는 비판이 거셌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도 살아 돌아온 영웅이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조국의 ‘영웅관’을 가진 사람들과 군 고위 장교들이 이런 비판의 주류였다.

 

평론가 호앙응옥히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도기에 처하여 인간 심리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전의 역사 시기는 배급제도의 융성기였고, 특히 전쟁의 환경에서는 정과 의리만으로 살 수 있었고 계산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현재 독립채산제라는 새로운 기원으로 전환하고 있다. 정과 의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늘날의 인간은 공평함과 분명한 계산을 요구하고 있다. 당연히 독립채산제는 효율성이며 문명이고 진보이다.

 

그런데, 경제에서 독립채산제 사유의 위기는 돈이 인간의 모든 정신생활 영역에 끼어들어 통치한대서 온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단지 매매 관계와 이익 추구의 계산만 남는다면 실생활은 아주 무서울 것이다. 실용주의의 변질로 인해 인간의 진실과 정감은 냉정한 계산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응웬후이티엡의 단편은 깊은 경고의 의의가 있다.”

 

소설가 스엉응웻밍은 그의 페이스북에 “20세기 말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의 한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이제 베트남이 시장경제를 적용한 지 4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작가가 경고했던 일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50년간 50여편의 작품을 발표한 응웬후이티엡은 베트남에서도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문학예술훈장(2007), 프레미오 노니노상(이탈리아, 2008)을 받아 베트남을 넘어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당대 베트남 가장 뛰어난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분의 명복을 빈다.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편집자주: 이 글의 상당 부분은 2011년 11월 베트남 교민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재인용했습니다.

 

[배양수 교수 프로필]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 박사․현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

역서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하얀 아오자이>, <정부음곡>.

베트남어 역서 <춘향전>, <미스 사이공>.

논문으로 <응웬비엣하의 신의기회에 대한 연구>, <혁명영화에서 상업영화로, 베트남영화사를 중심으로>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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