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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의 눈 44] 백제 부흥 꾀한 일본 참패 '신국' 사상 뿌리

일본의 신국론(神国論) 하...7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 '백촌강 전투'

 

일본에서 '신국(神國)' 사상이 대두한 배경에는 한반도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어진다. 이미 살펴 본대로 ‘신국’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전설적인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때 신라왕의 입을 빌려 나왔다는 것은 이미 본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뒤 ‘신국’이란 말이 나온 데에는 고대 일본 조정이 처했던, 보다 현실적인 사정이 자리한다.

 

그것이 당시 동아시아의 최대 역사적 사건인 하쿠스키노에(白村江, 이하 ‘백촌강’)의 전투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촌강이란 ‘백마강’ 또는 ‘백강’이라 부르는,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비빈들이 투신했다는 전설이 서린, 한반도 서남부에서 흐르는 강이다.

 

이 백촌강 전투는 7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나당(羅唐)연합군과 싸움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 참패를 당했다.

 

당시 백제 부흥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군이 당한 이 참패는 지울 수 없는 멍에를 안겼지만 오늘의 주제인 일본의 신국사상도 이에 기인한다. 일본의 한 저자는 이렇게 적는다.

 

수세기에 걸쳐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던 조선반도에서는 당과 결합한 신라가 대두하고 660년 양국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백제의 왕도가 함락되었다. 텐지(天智) 천황은 백제의 요청으로 조선반도에 출병했지만 663년 백촌강의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대패하여 백재 부흥의 꿈은 사라졌다. 이후 고구려도 당에 의해 멸망되고 조선반도에서는 신라와 당과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佐藤弘夫, 2018, 82

 

 

한국의 일본문화 전문가 김용운(金容雲) 교수는 백촌강 전투에 얽인 여러 에피소드를 전한다. 여기에는 헤이시(平氏) 가문에 관한 이야기, 천황의 레가리아[증표물]의 하나인 삼종의 신기에 얽힌 이야기, 백제 부흥군 수장 부여풍(夫餘豊, 백제 의자왕의 아들)과 또 다른 부흥 군 수장 복신(福信)간의 암투 등.

 

백제-왜 수군의 배 400척은 모두 불타 바다가 피와 불로 물들었다는 기록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백제 왕가의 보검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손에 들어갑니다.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수몰된 헤이시 가문[백제계]의 운명은 백강전투의 2막이었던 셈입니다. 천황가의 보물 삼종의 신기의 하나인 보검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안토쿠 천황과 함께 수장된 것도 공통적입니다(김용운, 2010, 18).

 

그 뒤 신라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내쫓고 통일을 이뤄냈다. 이런 국제 정세 아래 일본에서는 673년 텐무(天武) 천황이 즉위한다. 그로서는 신라로부터 심각한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 중대한 정치적 과제로 등장했다. 그 대처 처방이 친 신라 정책으로 일대 전환이었다. 예컨대 669년 텐지 8년 ‘진신의 난(壬申の乱)’ 직전까지 계속되던 견당사(遣唐使) 파견이 ‘진신의 난’ 후 부터 갑자기 두절되고 만다. 대신 견신라사(遣新羅使)가 10회 정도 파견된 한편 신라 측에서 24회가 파견된다.

 

진신의 난...백제계 왕권이 신라계로 넘어가다

 

‘진신의 난’이란 당시 오-아마(大海人) 황자가 텐지 사후 정권 탈취에 성공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백제 계 왕권이 신라 계로 넘어간 것이기도 하다. 그 주인공이 텐무(天武) 천황으로 대화 개신(大化の改新)을 실행해 중앙정권 구조를 다졌다. 재일작가이자 고대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달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 [‘진신의 난’]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진신의 난’을 일으킨 것으로 탄생한 텐무 조는 전혀 신라일변도이었다. 이 말이 지나치다면 적어도 이 기간부터는 가장 밀접한 것에 다름 아니다(金達寿, 1985, 153).

 

그러나 텐무 사후 텐지의 황후인 지토-(持統)가 여제의 자리를 차지하자 왕권은 다시 백제계로 넘어가 신라와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해진다. 이것이 뒤에 살펴보듯이 신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신국사상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창작하는 책(策)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백제 계의 선왕 텐지의 딸로 지-토가 제위로 오르자 자신의 피붙이로 왕권을 잊고자 음모에 착수한다.

 

즉, 텐무의 뒤를 이을 오-츠(大津) 황자의 ‘모반사건’을 조작해 처형한 것이다. 오-츠는 지토-의 피붙이가 아닌, 텐무의 셋째 아들이다. 김달수는 그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오-츠황자는 황후이었던 지토-의 배에서 탄생된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황자의 스승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신라 승 쿄-신(行心)을 비롯해 지키코-야치노아손오토카시(直広肆八口朝臣音橿), 쇼센게이이키무라지하카토쿠(小山下壹伎連博德), 오오토네리나카토미아손오미마로(大舍人中臣朝臣臣麻呂), 코세아손타야스(巨勢朝臣多益須) 등과 함께 포박당해 처형되었습니다. “「시후노오코리(詩賦の興)」는 오-츠 부터 시작되느니[시부(詩賦=중국의 음운시]” 라고 《일본서기》에도 적혀 있는데 오-츠 황자가 그처럼 매우 우수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金達寿, 위 책, 153).

 

한국의 일본문화 전문가 김용운(金容雲) 교수는 백촌강에 얽인 여러 에피소드를 전한다. 여기에는 헤이시(平氏) 가문에 관한 이야기, 천황의 레갈리아[증표물]의 하나인 삼종의 신기에 얽힌 이야기, 백제 부흥군 수장 부여풍(夫餘豊, 백제 의자왕의 아들)과 또 다른 부흥 군 수장 복신(福信)간의 암투 등.

 

백제·왜 수군의 배 400척은 모두 불타 바다가 피와 불로 물들었다는 기록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백제 왕가의 보검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의 손에 들어갑니다.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수몰된 헤이시 가문[백제계]의 운명은 백강전투의 2막이었던 셈입니다. 천황가의 보물 삼종의 신기의 하나인 보검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안토쿠 천황과 함께 수장된 것도 공통적입니다(김용운, 2010, 18).

 

신국사상=신라 의식해 창작된 대항 국가 이데올로기

 

다시 신국론으로 돌아가 보자. 8세기 초 ‘일본서기’가 편찬될 때 만해도 이른바 신국사상은 아직 전설의 수준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그것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창작한데에는 신라의 위협이 작용한 결과다. 사토히로는 간결하게 말한다.

 

‘일본서기’의 신라정토 에피소드도, ‘신국’ 이념도 새로운 패자가 된 신라를 강하게 의식해 그에 대항하기 위해 창작되었다는 성격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위 책, 82).

 

 

그 뒤 신국사상은 일본에서 떠오르게 된 것은 9세기 후반 세이와(淸和) 천황 때이다. 그것도 신라와 관계 때문이었다.

 

죠-간(貞観) 11년 [869] 신라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배 두 척이 치쿠젠(筑前, 후쿠오카)에 내항해 약탈을 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해에는 전국각지에 지진이나 풍수해 이어져 세상이 어지러웠던 상황이 드러났다. 위기감을 품었던 조정은 군사 면에서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편 신불에 도움을 얻으려 여러 지방 국 사원에 대해 불교경전을 전독(転読=불교법회에서 행해지는 독특한 불경 읽는 방식)을 명했다. 지방 국 신들에 공물을 바침과 더불어 이세(伊勢)나 이와시미즈(石淸水)·우사(宇佐) 등 유력 신사에 코몬(告文: 신에 바치는 글, 이하 ‘고문’)을 바쳐 국토에 안온을 기원했다. 이 고문 안에 「신메이의 나라(神明の国, 神明=신메이는 천신 지신의 뜻, 이하 ‘신명 국’)」 「신국(神国)」이라는 어구가 여기저기 보인다. 이 시기 신라와의 관계를 의식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각적으로 「신국」의 자기규정이 쓰이게 된 것이다(위 책, 83).

 

일련의 고문 중 가장 최초가 되는 죠-간(貞観) 11년 12월 14일 부의 이세신궁의 그것을 살펴보자. 이 고문은 당시 빈발하는 재해를 언급한 뒤 대체로 아래와 같이 논하고 있다.

 

신라와 일본은 오랫동안 적대해 왔다. 듣는 바에 의하면 그 신라가 이번에는 국내에 침입해 공물을 빼앗아 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조정은 오랫동안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를 게을리 했지만 병란은 정말 신중히 걱정해야 할 일이다.

우리 일본은 이른바 신명 국이다. 신명[천신 지신]이 수호하고 있는 한 어떠한 적도 다가 올 수 없다. 정말 황송 하옵게도 아마테라스고오카미((天照皇大神, 이하 ‘황대신’=천조대신=천황의 조상신)이 우리나라의 대조(大祖)로서 군립하고 있는 이상 어떻게 타국의 이류(異類)가 가해오는 침범을 묵시하겠는가. (중략)

황대신이여, 어떻게든 우리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셔서 구적(寇賊)이 내습하는 경우 황대신이 모는 신을 지휘해 미연에 막아주십시오. 또한 적이 계획을 세워 병선이 도달할 때 국내에 침입하기 전 역풍으로 바다에 빠트려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나라가 「神国」으로 삼가 존경받았던 법도를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

그밖에도 「国家」의 큰 재앙, 「百姓」의 큰 근심을 가져오는 여러 재난을 미연에 막아 나라의 평안을 성취하고 주야를 불문하고 「皇御孫(스메미마=천황)의 御体」를 영원히 지켜 주십사 기원 드립니다...

 

신국 망령, 아직도 도쿄 하늘에 출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신국사상’이란 처음 신라의 위협에 대처하는 발상에서 출발했지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결국 천황의 ‘현인신’ 론으로, 종당 이웃나라 조선을 병탄한데 이어 무모한 태평양 전쟁으로, 이와 더불어 ‘카미카제(神風)’ 특공대와 같은 함정을 만들어 무수한 자국 청년들은 물론 수많은 조선 청년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은 의 빌미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황당한 신국사상의 망령이 지금도 도쿄의 하늘에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김용운,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2010

佐藤弘夫, <「神国」日本>, 講談社, 2018

金達寿, <日本古代史と朝鮮>, 講談社, 1985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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