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해운대 아침 자카리아(Fareed Zakaria)의 GPS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왜 그토록 귀족정(aristocracy)을 경계했을까.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왕정 자체가 아니었다. 부와 출생, 혈통이 권력과 결합해 소수 계층이 국가를 지배하는 구조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를 “인위적 귀족(aristocracy of wealth and birth)”이라고 불렀고, 대신 재능과 덕성에 기반한 “자연적 귀족(natural aristocracy)”을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을 보면 건국의 이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정권 핵심부에 억만장자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내각"이라는 평가가 나왔고, 일부 핵심 국가안보 및 외교 분야에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보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경험 많은 외교관과 공직자들이 사임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상 역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은 자신의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을 기용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국가 운영이 복잡해질수록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관료 집단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선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택된 지도자와 전문 관료 조직 사이의 건강한 균형 위에서 작동한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점차 플루토크라시(plutocracy), 즉 부유층 지배 체제로 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렇다면 동남아는 어떨까.
흥미롭게도 동남아의 문제는 미국과 조금 다르다. 미국이 신흥 슈퍼리치의 정치 영향력 확대를 걱정한다면, 동남아는 훨씬 오래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필리핀은 대표적인 정치 가문 국가다.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 두테르테 등 특정 가문이 수십 년간 정치를 주도해 왔다. 선거는 자유롭게 치러지지만 실제로는 정치 가문 간 경쟁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는 민주화 이후 크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경제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의 결합이 강하다. 자원 산업과 미디어, 정당, 지방 권력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는 정착되었지만 과두 지배(oligarchy)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태국은 군부와 왕실, 재벌, 관료 엘리트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통 엘리트 질서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균형을 찾고 있다.
베트남은 다소 다르다. 공산당 체제 아래에서 관료 능력주의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작동한다. 공개적인 재벌 정치나 가문 정치는 적지만 당 조직 내부의 엘리트 선발 구조가 국가 발전을 이끌고 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능력주의 국가로 평가받는다. 엄격한 교육과 공직 선발 시스템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능력주의가 오히려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국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능력주의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왔다.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교육과 경쟁을 통한 인재 선발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다른 모습도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진영 정치,지역의 영향력과 세대간 정치가 더 커지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자산과 부동산의 세습이 확대되고 있다. 교육에서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기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청년들은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만약 능력보다 배경이 중요해진다면, 한국 역시 미국과 동남아가 겪는 문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미국, 동남아 그리고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부와 출생인가. 충성심인가. 아니면 능력과 공공에 대한 헌신인가.
완벽한 능력주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부모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건강한 민주주의는 최소한 부와 혈통, 연줄만으로 권력과 기회가 세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좋은 사회는 능력 있는 사람이 출신과 배경을 넘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는다.
250년 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경고했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능력과 책임이 함께 작동하는 민주주의인지도 모른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