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시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시장은 대개 벤타잉(벤탄 시장, Ben Thanh) 시장이다. 1군 중심부에 자리한 벤타잉 시장은 시계탑, 기념품 가게, 먹거리 좌판, 관광객의 흥정 소리로 가득하다.
하노이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북부 최대 도매시장으로 알려진 동쑤언 시장(Chợ Đồng Xuân)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베트남의 시장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호찌민시 서쪽 쩔런( ) 지역에 있는 빙떠이(Bình Thạnh)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벤타잉 시장이 사이공 관광의 얼굴이고, 동쑤언 시장이 하노이 구시가지 상업의 중심이라면, 빙떠이 시장은 남부 베트남 화교 상업 문화의 심장에 가깝다. 이곳은 관광객에게 보기 좋게 정돈된 시장이라기보다, 실제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며 도시의 생활 경제를 움직이는 시장이다. 그래서 빙떠이 시장을 걷는 일은 단순한 시장 구경이 아니라, 호찌민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장사를 통해 성장해 왔는지를 읽는 일에 가깝다.
■ 쩔런(큰 시장) 그리고 그 심장부... '남부 베트남 거대한 도매 유통거점'
빙떠이 시장은 호찌민시 6군,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쩔런 지역에 있다. 쩔런(Chợ Lớn)은 베트남어로 ‘큰 시장’을 뜻한다. 이름 자체가 말해 주듯,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사이공과 남부 베트남의 상업 중심지였다.
중국계 베트남인, 즉 화교 공동체가 이곳에 뿌리내리며 도매, 물류, 식료품, 약재, 생활용품 유통망을 발전시켰고, 빙떠이 시장은 그 상업적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으로 성장했다.
시장 규모도 인상적이다. 전체 규모는 약 25,000㎡에 이른다. 약 14,000㎡ 규모의 하노이 동쑤언 시장이나 약 13,000㎡ 규모의 호찌민 벤타잉 시장보다도 크다. 숫자로만 보아도 빙떠이 시장이 단순한 동네 시장이 아니라 남부 베트남의 거대한 도매 유통 거점임을 알 수 있다.
■ 벤타잉은 '관광객의 시장', 빙떠이는 '상인의 시장'
세 시장을 비교해 보면 빙떠이 시장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벤타잉 시장은 호찌민시 1군 중심부에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 사이공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기념품, 커피, 말린 과일, 의류, 로컬 음식을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 여행자에게는 편리하고 친숙한 시장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벤타잉 시장은 관광지화된 성격이 강하다. 가격은 관광객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고, 시장의 기능도 ‘현지 유통’보다는 ‘도시 이미지와 소비 경험’에 가깝다. 벤타잉 시장이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기에 좋은 곳이라면, 빙떠이 시장은 물건이 실제로 움직이는 현장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관광객보다 현지 상인, 도매업자, 지역 주민이다.
빙떠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시장 안에서만 소비되지 않는다. 호찌민시 전역과 남부 지방으로 퍼져 나가고, 더 나아가 캄보디아 등 주변 지역으로도 흘러간다. 박스가 쌓이고, 오토바이가 멈춰 서고, 손수레가 통로를 지나가고, 상인들이 가격을 부르는 이 모든 움직임은 하나의 커다란 유통망을 이룬다. 빙떠이 시장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살아 있는 상업의 리듬에 있다.
■ 동쑤언이 북부의 밀도라면, 빙떠이는 남부의 흐름이다
동쑤언 시장과 비교해 보아도 빙떠이 시장의 개성은 선명하다. 동쑤언 시장은 하노이 구시가지에 자리한 북부 베트남의 대표적 도매시장이다. 하노이의 오래된 거리 체계와 맞물려 있으며, 북부 특유의 생활용품, 의류, 식자재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좁고 촘촘한 하노이 구도심의 밀도가 동쑤언 시장 안에 압축되어 있다.
반면 빙떠이 시장은 남부 메콩 유통망과 화교 상업 문화가 결합한 공간이다. 빙떠이 시장 뒤편은 과거 운하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 수로는 메콩강 삼각주와 이어져 물자 이동이 가능했다. 물건은 강과 운하를 따라 들어오고, 시장을 거쳐 다시 여러 지역으로 나갔다.
동쑤언 시장이 북부 내륙 도시 하노이의 상업 리듬을 보여 준다면, 빙떠이 시장은 강과 운하, 항구와 도매망을 통해 움직이던 남부 베트남의 개방적 상업성을 보여 준다.
■ 시계탑과 용 장식, 시장이 성채처럼 보이는 이유...부의 순환과 번영 기원
빙떠이 시장의 또 다른 매력은 건축에 있다. 이 시장은 단순한 시장 건물이 아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기의 근대 건축 기술과 중국식 장식 요소가 결합한 독특한 건축물이다. 멀리서 보면 성채처럼 웅장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중앙의 시계탑과 붉은 기와지붕, 지붕 위의 용 장식, 도자기 타일, 통풍구 문양이 눈길을 끈다.
특히 중앙 시계탑은 빙떠이 시장의 상징이다. 벤타잉 시장의 시계탑이 근대 사이공의 도시적 질서와 상징성을 보여 준다면, 빙떠이 시장의 시계탑은 쩔런 화교 공동체의 상업적 자부심과 문화적 정체성을 함께 드러낸다. 지붕 위의 용 장식과 동아시아식 기와는 이 시장이 단지 프랑스식 근대 건축물이 아니라, 중국계 상인들의 미감과 상징체계가 반영된 공간임을 말해 준다.
시장 구조도 흥미롭다. 빙떠이 시장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자 ‘구(口)’ 자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 중앙에는 네모난 안뜰(中庭)이 있고, 그 둘레를 따라 건물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는 시장 내부에 빛과 공기를 들이는 실용적 기능을 하면서도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안뜰 중앙에는 연못과 기념대가 있고, 물을 뿜는 청동 용상이 남아 있다. 동아시아 풍수에서 물은 재물과 흐름을 상징한다. 상업 공간 한가운데 물을 둔 것은 이 시장이 부의 순환과 번영을 기원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음을 보여 준다.
■ 시장을 지은 남자, 꽉담...개인적 야망과 상업적 안목 감탄
이 시장을 세운 인물은 중국계 상인 꽉담(Quách Đàm)이다. 그는 통히엡(Thông Hiệp)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공과 쩔런 일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화교 사업가였다. 빙떠이 시장의 탄생은 그의 개인적 야망, 상업적 안목과 도시 공간을 읽는 능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꽉담은 1920년대 당시 쩔런의 상업 중심이 점차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기존 시장만으로는 늘어나는 물동량과 상업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더 크고 체계적인 도매시장이 필요했다. 그는 사비를 들여 시장을 건설한 뒤 이를 당시 시 당국에 기증했다. 1926년에 착공되어 1928년에 완공되었고, 1928년 10월 1일 공식 개장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꽉담이 단순한 기부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장을 지어 기증하는 대신, 시장 주변에 몇 줄의 상가주택을 추가로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또한 사후에는 자신의 동상을 시장 중앙에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그를 단순히 ‘선행을 베푼 부자’로만 보지 않게 만든다.
그는 시장이라는 공공적 상업 인프라를 만들면서도, 그 주변의 상업적 가치를 정확히 이해한 사업가였다. 시장이 들어서면 사람과 물건이 모이고, 그 주변 상가의 가치는 올라간다. 꽉담은 바로 그 흐름을 읽었다.
다시 말해 빙떠이 시장은 기부와 투자, 공공성과 사익, 도시 발전과 개인적 명예가 복합적으로 얽혀 탄생한 공간이었다. 이 점이 오히려 빙떠이 시장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좋은 시장은 물건만 모으는 곳이 아니다. 사람의 욕망, 도시의 변화, 공동체의 기억까지 함께 모은다.
■ 사라진 전신상-돌아온 흉상 '...시장을 세운 인물'을 불러냈다
시장 중앙에 세워졌던 꽉담의 전신상은 빙떠이 시장의 역사에서 특히 상징적인 장면을 만든다. 원래 시장 안뜰의 팔각형 흰 돌 기념대 위에는 꽉담의 전신상이 놓여 있었다. 시장을 세운 인물을 시장 한가운데 기념한다는 점에서, 이 동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쩔런 화교 상업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제적 성취와 도시적 기여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이후, 베트남의 정치 체제와 도시의 기념 공간이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 전신상은 시장 중앙에서 사라져 호찌민시 미술관 뒤뜰로 옮겨졌다. 구체적인 이전 사유가 자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식민지 시기 상업 엘리트와 화교 자본가를 기념하던 조형물이 통일 이후의 새로운 공공 기념 질서 속에서 원래 자리에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동상이 사라진 뒤에도 꽉담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신상이 있던 자리의 기념대와 연못 그리고 물을 뿜는 청동 용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비어 있던 기념대 앞쪽에 꽉담의 흉상이 다시 안치되었다. 이는 전신상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시장을 세운 인물을 다시 시장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인 상징적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상인들과 방문객들은 전신상이 아닌 흉상을 통해 꽉담을 만난다. 과거의 전신상이 식민지 시기 화교 상인의 권위와 성공을 기념했다면, 현재의 흉상은 빙떠이 시장이라는 공간이 여전히 그를 창건자이자 후원자로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꽉담은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계속 기억되는 인물인 셈이다.
■ 1,400개가 넘는 점포로 복원된 시장, 그러나 박물관은 아니다
빙떠이 시장은 여러 차례 보수와 복원을 거쳤다. 1992년 전면 보수가 이루어졌고, 2006년에는 추가 건물이 들어섰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된 대규모 복원 공사였다. 약 2년 동안 상인들은 임시 시장으로 옮겨 영업을 이어갔고, 2018년 11월 15일 시장은 다시 문을 열었다.
이 공사의 핵심은 단순한 현대화가 아니라 원형 복원이었다. 1928년 건립 당시의 기와지붕 형식을 되살리고, 용 장식, 서까래, 바닥, 계단, 난간 등을 역사적 가치에 맞게 정비했다. 보수 후 시장은 더 정돈되고 쾌적해졌으며, 간판의 크기와 색상도 통일되어 한층 질서 있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빙떠이 시장은 박물관이 아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1,4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좌판까지 포함하면 2,000개가 넘는 판매 공간이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산물, 건어물, 가공식품, 향신료, 의류, 신발, 장난감, 생활용품, 포장재, 잡화가 이곳에서 거래된다. 전복, 상어 지느러미, 부레 같은 고급 식재료도 판매된다. 관광객에게는 다소 복잡하고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이 혼잡함은 무질서라기보다 도매 유통의 리듬에 가깝다.
■ 시장 구경이 아니라 도시 읽기...과거와 현재 나란히
빙떠이 시장을 방문할 때는 벤타잉 시장을 둘러보듯 기념품 쇼핑을 기대하기보다, 쩔런의 상업적 생태를 관찰한다는 마음으로 걷는 편이 좋다. 이른 오전에는 물건을 나르는 움직임이 활발하고, 시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향신료와 건어물 냄새, 비닐 포장재의 색, 상인들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중앙 안뜰에 잠시 서서 시계탑을 올려다보면, 분주한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이 주는 시간의 깊이가 느껴진다.
빙떠이 시장은 벤타잉 시장처럼 화려하게 관광객을 맞이하지 않는다. 동쑤언 시장처럼 북부 구도심의 압축된 밀도를 보여 주지도 않는다. 대신 이곳은 남부 베트남과 화교 상업 문화가 만나 만들어 낸, 더 넓고 깊은 유통의 세계를 보여 준다. 붉은 기와와 용 장식, 중앙의 연못, 끝없이 이어지는 점포와 물건의 흐름 속에는 쩔런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놓여 있다.
그래서 빙떠이 시장을 걷는 일은 단순한 시장 구경이 아니다. 그것은 한 도시가 어떻게 장사를 통해 성장했고, 한 공동체가 어떻게 상업을 문화와 건축, 기억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읽는 일이다. 쩔런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빙떠이 시장은 오늘도 그 심장처럼 뛰고 있다.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