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영웅이 권력을 맡게 될 때, 그 앞에는 늘 두 갈래 길이 놓였다.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는 길과, 자신이 세운 제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길이다.
6월 21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별세한 프란시스쿠 구테흐스(Francisco Guterres) '루올로(Lú-Olo 투쟁시절 가명)' 전 대통령은 후자를 택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식민과 전쟁을 딛고 헌정을 세워본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을 먼 나라의 소식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게 한다.
루올로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24년의 독립 투쟁 저항이 아니라, 그 저항을 끝낸 뒤의 선택이다. 본래 그는 1973년 고향 오수(Ossu)의 학교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던 교사였다. 그러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 뒤, 그는 동료 지도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외교 전선을 폈고 사나나 구스망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이 점령기 도중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루올로는 끝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야전에 남았다. 그는 24년의 전쟁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프레틸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명령과 결단, 생존과 전투가 그의 언어였다. 그런 그가 1999년 인도네시아가 물러나자 총을 내려놓고 향한 곳은 행정부도 군의 중심도 아닌 제헌의회 의장석이었다. 무장투쟁을 이끌던 많은 지도자들이 힘의 자리로 직행할 때, 가장 오래 산에 남았던 전사가 신생국의 가장 더디고 인내가 필요한 일, 헌법 문안을 다투고 정파를 조율하는 일을 자청한 것이다.
여기에 그의 역설이 있다. 가장 오래 무기를 든 사람이, 가장 먼저 무기 대신 법조문을 택했다. 교사로 출발해 전사로 살다 끝내 입법자로 돌아온 셈이다. 2002년 5월 20일 그가 국회의장으로서 독립 회복을 선포한 장면은, 무력이 아니라 절차가 국가를 떠받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대목은 해방 이후 제헌국회를 꾸리고 헌법을 만들어본 한국의 경험과 유사하다. 우리 역시 안다. 독립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헌정은 매일의 인내라는 것을. 영웅의 결단은 위기를 돌파하지만, 신생 민주주의가 오래 견디려면 결국 그 결단이 제도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루올로가 대통령 재임 중 역사적 거물들 사이의 정쟁에서 스스로 전면에 나서기보다 헌법적 중재자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 때로 ‘약한 리더십’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그 선택은, 돌이켜보면 신생국의 민주적 질서를 지키는 데 기여한 신중함이 아니었을까?
그의 퇴장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신호이기도 하다. 동티모르 정치를 20년 넘게 이끌어온 이른바 '건국 세대'의 시간이 한 매듭에 다다르고 있다는 신호다. 독립 이후 이 나라를 떠받쳐온 핵심 지도자 4인—사나나 구스망, 조제 하무스 오르타, 마리 알카티리, 그리고 루올로—가운데, 루올로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의 첫 퇴장인 셈이다.
이들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 이 나라가 의지할 것은 또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루올로가 다져놓은 제도와 절차일 것이다. 2025년 아세안 정회원국이 된 동티모르가 진정으로 시험받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카리스마에 기댄 정치에서 규범에 기반한 정치로 얼마나 안정적으로 옮겨가느냐다.
그가 남긴 한 마디는 이 모든 것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 일러준다. 교사 출신이었던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는 그 경제가 큰지 작은지, 부유한지 가난한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 국민이 배우지 못하면, 그것만으로 나라는 죽는다."
그의 별세 이후 동티모르 온라인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는 이 말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는 당부로 끝맺는다. 제도와 절차를 끝내 떠받치는 것은 결국 배운 시민이라는 것—숲에서 24년을 보낸 전사가 가장 강조한 무기가 총이 아니라 교육이었다는 사실은, 자원도 영토도 작은 신생국이 무엇으로 서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리킨다.
험난한 지상의 임무를 마치고 영면에 든 루올로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정글의 전사가 끝내 의회주의자로 살다 간 그의 생애는, 독립을 이뤄본 나라에 같은 질문을 남긴다. 영웅이 떠난 뒤에도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사람이 아니라 제도이며, 그 제도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배움이라고.
글쓴이=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이사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