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베트남 작가 트엉하의 『가자 지구의 잔해』 한국어판 출간

배양수 번역, 낯선 공간이지만 낯익은 전쟁과 상실의 기억을 다룬 장편소설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내는 힘이다.”

 

베트남 작가 트엉하의 장편소설 『가자 지구의 잔해』가 배양수 번역으로 나왔다. 원제는 『Mảnh vụn Gaza』이다.

 

이 작품(도서출판 다해, 신국판 179페이지)은 전쟁의 폐허를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한 전쟁소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총성과 폭격의 기록 너머에 남겨진 아이들, 침묵하는 여성들, 잃어버린 가족, 그리고 사랑받고자 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가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응시한다.

 

작가 트엉하(Thương Hà)는 1981년생으로 현재 하노이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그녀는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내는 힘이다.”라고 말한다.

 

출간 작품으로는, 『한 길』, 『유랑』, 『PTSD의 사람』, 『불온한 변경』, 『NALIS - 운명에 밀려』, 『지우의 어둠』, 『불멸의 원혼들』, 『원한의 사랑』, 『대가』, 『완벽한 위장』 등이 있다.

 

■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기억과 온기

 

소설의 시간은 2077년, 공간은 가자 지구다. 뜨거운 햇볕 아래 폐허가 된 거리를 달리는 오프로드 차량, 무너진 건물과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거리, 그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 장교 로지와 종군기자 윌리엄의 만남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로지는 전쟁과 폭력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냉정함은 타고난 성격이라기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생존 방식에 가깝다. 윌리엄 역시 자신의 기원과 상처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가자 지구의 폐허 속에서 재회하며,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묻어 두었던 기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가자 지구의 잔해』에서 ‘잔해’는 단순히 무너진 건물의 조각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 그곳에 삶이 있었다는 증거다. 누군가 사랑했고 기다렸으며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으려 했다는 흔적이다.

 

작가는 폐허가 된 도시를 통해 전쟁이 남기는 상처가 얼마나 오래 인간의 몸과 기억 속에 머무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한 아이의 이름 속에, 한 여인의 침묵 속에,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의 후회 속에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인물들을 쉽게 선악의 구도로 나누지 않는 데 있다. 로지와 윌리엄은 순수한 희생자도, 완전한 영웅도 아니다. 그들은 상처 입었고,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독자는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폭력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깊이 들을 수 있는가.

 

한국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낯선 배경을 지닌 외국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로 다가온다. 한국 사회 역시 전쟁과 분단, 상실과 재건의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의 폐허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치유되지 않은 기억들과 조용히 맞닿는다. 문학은 뉴스가 다 전하지 못하는 진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고통, 공식 기록에 남지 않는 개인의 삶을 붙잡는다.

 

『가자 지구의 잔해』는 전쟁의 잔혹함만을 말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잔혹함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온기,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다시 삶을 말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폐허 속에서 남은 조각들을 모아 인간의 얼굴을 복원하려는 이 소설은, 오늘의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진다. 부서진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그리고 기억의 잔해들을 모아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는가.

 

번역한 배양수 전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는 “정말 독특한 베트남 소설이다. 가자 지구의 폐허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한국 역사 속 치유되지 않은 기억들과 만난다”고 말했다.

 

 

■ 가자 지구를 다룬 책들

 

▲ 전 세계를 뒤흔든 그래픽 노블의 거장의 조 사코(Joe Sacco)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Footnotes in Gaza)

 

저널리즘과 만화(픽션/논픽션의 경계)를 결합한 '만화 저널리즘'의 효시이자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가자 지구에 들어가 난민들의 삶과 분노, 죽음을 생생하게 인터뷰하고 스케치했다.

 

1956년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학살 사건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억압과 가자 주민들의 잔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가자 지구를 다룬 문학·예술 작품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작품 중 하나다.

 

▲ 가자와 이스라엘의 소통을 그린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발레리 제나티(Valérie Zenatti) — 『가자에 띄운 편지』 (Une bouteille dans la mer de Gaza)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 내에서도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널리 읽힌 유명 소설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소녀 '탈'이 가자 지구의 바다에 편지가 담긴 유리병을 던지고, 이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청년 '나임'이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메일을 통해 국경과 전쟁의 벽을 넘어 서로의 일상과 고통을 공유하고, 거대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교감과 희망을 아름답고 먹먹하게 그려냈다.

 

▲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와 가자의 아픔을 담은 문학

수잔 아불하와(Susan Abulhawa) — 『하늘과 바다 사이의 푸름』 (The Blue Between Sky and Water)

 

전 세계 30개국 이상으로 번역되며 큰 찬사를 받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작가의 대표 소설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나크바) 당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가자 지구의 난민촌으로 흘러 들어간 한 가족의 사연을 4대에 걸쳐 그려낸다. 가자 지구라는 척박하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는 여성들의 강인함과 연대,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환상적 사실주의 기법을 더해 강렬하게 풀어냈다.

 

▲ 소설은 아니지만 최근 가장 주목받는 '가자의 기록'으로 아테프 아부 사이프(Atef Abu Saif) — 『집단학살 일기: 가자에서 보낸 85일』이 있다.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작가이자 전 문화부 장관인 저자가 2023년 전쟁 발발 당시 가자 지구에 고립되어 무차별 폭격 속에서 하루하루 써 내려간 생생한 실제 일기다. 비록 픽션 소설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가자 지구의 비극을 가장 문학적이면서도 참혹하게 증언한 작품으로 최근 전 세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관련기사

포토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