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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34] 다시 떠오른 1998년 인도네시아의 악몽

당시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근무...환율과 금리, 정부에 대한 신뢰 중요

 

1998년 5월. 인도네시아를 32년간 통치했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결국 권좌에서 내려왔다.

 

당시 나는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에서 정치와 교민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와 폭력 사태 속에서 우리 교민 4,800여 명의 철수를 지원했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인도네시아를 다시 찾았을 때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달러당 18,000루피아. 환율이 1998년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황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당시에는 달러당 2,000루피아 수준에서 불과 몇 달 만에 18,000루피아까지 폭락했던 전례 없는 금융위기였다. 지금은 그만큼의 급격한 붕괴는 아니다. 그럼에도 루피아 약세, 증시 하락, 금리 인상이라는 모습은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뛰고, 이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린다.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커지고 증시는 약세를 보인다. 이런 흐름은 경제학 교과서 그대로다.

 

그렇다면 지금 인도네시아 경제는 왜 흔들리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선이다. 투자자들은 경제성장률보다 정부를 더 본다. 특히 정부가 재정을 얼마나 책임 있게 운용하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 이후 약 30년 동안 재정건전성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최근 프라보워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무상급식 정책 등을 계기로 재정준칙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초에는 국제적으로 신뢰를 받던 재무장관 교체까지 겹치면서 시장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무상급식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시장이 "정부가 앞으로도 재정을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면 경제의 기초체력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경제성장률은 올해도 5% 안팎이 예상되고, 니켈을 비롯한 광물 수출도 비교적 견조하다. 은행 시스템과 외환보유액 역시 1998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정적이다. 지금은 5개월 반치 외환보유고가 있다.

 

결국 지금의 문제는 경제 펀더멘털보다 정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더 가깝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외국인p[ 투자자와 국제 언론이 과도하게 부정적인 신호를 만들고 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금융시장을 통해 신흥국 경제가 과도한 영향을 받는다는 지적 역시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최근 자카르타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현장 경기는 생각보다 괜찮다"고 말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의 지지율도 여전히 70% 안팎으로 높은 수준이다.

 

 

왜 그럴까. 인도네시아의 오랜 과제인 양극화가 그 배경에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시경제 지표가 아니라 오늘의 식탁이다. 정부가 연료보조금을 지급하고, 무상급식을 추진하는 이유도 결국 취약계층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정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시장이 걱정하는 정책과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우려스럽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거의 모든 주요 정책을 직접 결정하고, 각 부처는 대통령의 의중을 지나치게 살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정책의 속도는 빨라질 수 있지만, 견제와 균형이 약해질 경우 정책의 지속가능성에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나는 1998년의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루피아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수입품 가격은 몇 시간 만에 바뀌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생필품을 사재기했고, 서민들은 하루아침에 생활비가 폭등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IMF 권고에 따라 연료보조금이 축소되자 민심은 폭발했다. 결국 거리의 분노는 수하르토 정권의 종말로 이어졌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오늘날 프라보워 정부의 각종 복지정책도 단순한 포퓰리즘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1998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현실적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재정건전성을 요구한다. 국민은 생계를 요구한다. 정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그것이 지금 프라보워 정부가 마주한 가장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30년 전 격변의 현장을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인도네시아가 이번에도 위기를 슬기롭게 넘어 더 성숙한 국가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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