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엉하의 세 번째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베트남 저명 소설가 트엉하의 장편소설 『표류』가 산지니에서 출간되었다. 『가자 지구의 잔해』와 『완벽한 위장』에 이어, 트엉하의 세 번째 한국어 번역본으로 배양수가 번역했다.
이 소설은 전쟁과 망각의 경계에서 떠도는 이름 없는 영혼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작품이다.
소설은 베트남 달랏의 소나무 언덕에서 글을 쓰는 여성 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람은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숲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현실과 저승의 경계처럼 보이는 기이한 공간, 검은 목면화가 끝없이 떨어지는 절벽과 마주한다. 그리고 바다의 신으로부터 자신이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전하는 ‘전언자’라는 말을 듣는다.
람이 기록하게 되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가 아니라 여러 시대와 나라를 지나온 영혼들의 기억이다. 윤회의 문을 찾는 베트남 청년 훙, 중국–베트남 국경 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 왕 씨, 베트남전쟁의 격랑 속에서 살아간 남베트남 군인 닷, 전쟁과 난민의 비극을 짊어진 모하메드, 권력과 국가의 논리를 대변했던 리처드 등은 검은 목면 나무 아래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들은 국적도, 이념도, 세대도 다르며 때로는 역사 속에서 적과 적으로 마주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이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와 타인에게 남긴 상처에 관한 질문이다.
한국 독자에게는 비교적 낯선 중국–베트남 국경 전쟁과 베트남전쟁 이후의 상흔을 다루지만, 작품은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설명서처럼 전개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고백과 논쟁이 이어지면서 독자는 거대한 사건을 연표가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 병사와 난민, 권력자와 희생자의 얼굴을 통해 만나게 된다. 트엉하는 초현실적인 저승 서사 안에 구체적인 역사적 기억을 배치함으로써, 국가의 공식 서술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개인의 감정과 윤리적 갈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품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 전쟁이다. 각 나라는 이 전쟁을 서로 다른 이름과 논리로 기억한다. 한쪽에서는 조국을 지킨 전쟁이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침략에 맞선 투쟁이라 부른다.
소설은 어느 한편의 역사 해석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가 ‘승리’를 선언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내면에는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다. 왕 씨의 “우리는 자식들에게 우리 조상이 악인이었다고 가르치지 않네”라는 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역사를 배우지만, 그 기억은 언제나 선택되고 편집된다. 『표류』는 바로 그 선택에서 밀려난 목소리들을 다시 들려준다.
제목 ‘표류’는 바다 위를 떠도는 육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영혼, 조국과 이념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개인, 과거를 잊고 싶지만 끝내 잊지 못하는 생존자, 그리고 이전 세대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후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표류한다.
작품 속 윤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죄책감과 원망, 집착과 오해를 내려놓지 못한 영혼들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을 묶어 온 기억과 대면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며 조금씩 가벼워지는 과정이다.
검은 목면화, 자욱한 안개, 끓어오르는 늪, 폭풍과 바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은 이 작품의 몽환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러한 자연 이미지는 말하지 못한 죽은 자들의 언어가 된다. 검은 꽃잎이 땅 위에 켜켜이 쌓이듯, 전쟁에서 사라진 수많은 이름과 사연도 역사 아래에 축적된다. 람의 글쓰기는 그들을 위한 기록이자 제사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통로다.
『표류』는 전쟁소설이면서도 단순한 전쟁 재현에 머물지 않고, 역사·환상·철학적 성찰을 결합해 인간의 보편적인 상처를 탐색한다. 이 작품이 독자에게 묻는 것은 누가 절대적으로 옳았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였으며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국가와 이념의 이름 아래 지워진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상대의 고통에 귀 기울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표류』는 잊힌 영혼들이 다시 세상에 말을 거는 소설이며, 기억하는 행위가 과거를 붙드는 일이 아니라 더 평온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임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