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동남아 국가 중 우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가고 시차도 1시간이다. 10만 명 이상의 우리 국민들이 많이 체류하고 국내 범법자들의 피난처로도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 국민의 피해가 많다. 필리핀 경찰서 내 코리아 데스크가 최초 설치돼 한-필 경찰 공조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로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동남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선도국이었고, 장충체육관도 미국 개발원조로 필리핀 엔지니어들이 건축한 건축물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 태국과 함께 동남아에서 참가한 2개국이다. 7,420명이 파견돼 112명이 사망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는 데 기여한 나라이다. 지난해 10월 경주 APEC 계기에 11월 1일 마르코스 주니어(봉봉) 대통령이 현직 필리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 참배하고 식수도 했다.
지금은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이 한국에 많이 온다. 그런데 필리핀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다시 발전하려고 하는 나라다. 한국과 필리핀은 이제 완전 역전되었다.
필리핀이 왜 과거 발전했고 한동안 정체되었는지는 필리핀의 역사를 짚어봐야 한다. 필리핀의 외세 식민지배 및 점령 기간은 380여 년이나 된다. 우리의 일본 식민지 기간의 10배가 훌쩍 넘는다. 그러니 외세의 잔재와 영향력이 지금까지 있다.
■ 스페인 식민지 지배는 330여 년...필리핀 국민 90% 이상 가톨릭 신자
우선 오랜 식민지배의 부정적 레거시(legacy)다.
스페인 식민지 지배는 330여 년이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식민지 영토 분쟁이 발생했고, 교황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카보베르데 서쪽 1,770km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토로 분할했다. 이에 따라 뉴에스파냐(현 멕시코) 총독령 아래 있던 필리핀은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국가 명칭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에서 나왔다.
필리핀은 본국 스페인과 멀었고 국왕의 대리인인 멕시코 총독과도 떨어져 있었지만, 스페인 본국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은 여타 식민지 목적이었던 3G, 즉 God(신), Glory(국왕의 영광), Gold(돈) 가운데 앞의 두 가지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톨릭 전파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스페인은 본국에서 수사(friar)를 필리핀 전역에 파견해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물론, 교회가 국가기관처럼 행동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필리핀 국민은 기존 애니미즘이나 정령사상을 모두 버리지는 않았고, 스페인 수사(friar)들도 이를 묵인해 필리핀 가톨릭은 혼종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현재 필리핀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국민 일상생활뿐 아니라 1986년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 당시에도 가톨릭 주교가 아키노를 지지해 마르코스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페인은 여타 식민지와 달리 필리핀에서 착취할 자원이 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19세기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250여 년간 멕시코 아카풀코-마닐라 간 갈레온 무역을 통해 중남미의 은을 싣고 와 이를 마닐라에서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로 바꾸어 아카풀코를 거쳐 일부는 현지에, 대부분은 유럽으로 수출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이런 중국산 수요가 유럽에서 시들해지자 아시엔다(Hacienda)라는 대농장을 통해 커피, 담배, 마닐라삼 등 환금작물을 재배해 수출하며 이익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기존 스페인 토지 가문들도 번창했고, 여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필리핀 국민들은 토지에 매여 후원-피후원 관계가 형성되고 고착되었다.
미-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하면서 필리핀과 쿠바를 미국에 양도했고, 이어 필리핀의 미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 미국 지배와 일본 점령, 그리고 ASEAN의 일원이 되기까지
다음은 미국 지배 48년이다. 거의 반세기다.
미국은 여타 유럽 식민지와 달리 필리핀의 자원이나 종교 전파에는 관심이 없었다. '민주주의 전파'에 중점을 두어 처음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하고 자치 능력 배양에 힘을 기울이며 교육과 보건에 투자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했다. 그 결과 필리핀은 1935년부터 자치정부를 꾸리고 1946년 독립을 했다. 물론 미국이 중간에 독립을 지연시키자 미국과도 전쟁을 했다.
이처럼 필리핀의 독립은 식민지 주체도 달랐고, 독립 방식도 달랐으며, 무엇보다 가톨릭 중심 사회라는 점이 여타 동남아 국가들과 달랐다. 물론 대(對)스페인-대미국 독립투쟁 과정에서 필리핀이라는 국가의식이 생겨났다.
아직 필리핀이 동남아의 일원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어쩌면 동남아에 있는 스페인이나 미국 정도의 인식이 최소한 엘리트층 사이에서는 확실히 있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시 일본의 3년 6개월 점령이다.
필리핀은 여타 동남아 국가와 달리 일본을 유럽 식민지를 물리친 영웅 내지 구원자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미-일 태평양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고, 많은 필리핀 국민들이 희생당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말 맥아더가 “I shall return”을 외치며 복귀한 이후 일본과의 약 10개월간 전쟁은 치열했던 만큼 피해도 컸다.
다만 일본이 필리핀을 동남아 제국 경영에 포함시킴으로써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이 동남아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점령이 필리핀을 동남아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계기는 되었으나, 1947년 실론 소재 동남아 사령부의 관할에 필리핀이 속하지 않고 미국의 독자 작전 관할에 속했던 점을 보면, 1967년 ASEAN 출범이 비로소 필리핀에 동남아 지역 소속감을 갖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필리핀은 ASEAN 창립 멤버가 되었고, 이제는 동남아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타 동남아 식민지와 비교할 때 필리핀 민족주의의 특징은 민주주의 전파를 사명으로 한 미국 지배의 성격, 스페인인과 필리핀인의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와 같은 엘리트층의 이중 문화, 그리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1935년부터 시작된 이른 자치 경험이다.
필리핀은 미국 지배의 레거시에 따라 1946년 독립 후 1972년 마르코스의 3선 연임 시도 전까지 약 30년간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하지만 마르코스가 1972년 3선 연임을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1986년 2월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으로 축출될 때까지 필리핀은 마르코스의 권력 사유화 시기였다. 이 기간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판을 치며 필리핀은 혼란기를 겪었다.
그 후 코리 아키노, 라모스, 에스트라다, 아로요, 아키노 3세, 두테르테, 마르코스 주니어로 이어지며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으나, 에스트라다 같은 연예인 출신 지도자나 권위주의적 리더인 두테르테 같은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다.
■ 10~20개 핵심 가문이 정치-경제-사회 장악...필리핀의 현재와 미래
지금 필리핀은 마르코스 주니어(봉봉)가 2022년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돼 2028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2022년 대선 당시 두테르테 가문과 손잡고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지금 필리핀은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이 실질적인 대립을 하고 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서 2000명이 넘는 자국민을 살해한 혐의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재판을 받고 수감 중이다.
그의 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파트너를 이루어 2022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양측은 권력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고 있다. 현재는 공금 횡령 혐의로 상원에서 사라 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그가 탄핵되면 2028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으나, 두테르테 가문의 다른 인물이 가문의 간판으로 출마한다면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봉봉 대통령은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고, 동남아 내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호르무즈 해협 위기에 따른 에너지 안보 등 경제적 부담도 안고 있다. 현재 마르코스 주니어의 국정 지지율은 28%에 불과하다.
하지만 2022년 골드만삭스의 『The Path to 2075』 보고서는 필리핀이 2060년 한국의 GDP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했다. 1억 명이 넘는 인구와 AI 시대에 필요한 니켈 등 희귀 광물을 보유하고 있어, 올바른 지도자와 포용적 제도를 구축·시행하고 해외송금 의존, 낮은 제조업 비중과 서비스 산업 편중 등 경제 체질 개선에 성공한다면 골드만삭스의 전망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필리핀의 미래와 관련해 다시 역사가 소환된다.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 이전 전통사회는 30~100가구(약 100~500명)로 구성된 소규모 독립 공동체였다. 그래서 몇 척 안 되는 배만으로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바랑가이식 지방 세력이 식민지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지역 가문 중심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80여 년에 걸친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지배는 지방 토지 가문을 우대하는 결과를 낳았고, 현재 필리핀은 10~20개의 핵심 가문이 정치·경제·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그러한 바랑가이식 지방 세력이 식민지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지역 가문 중심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떻게 이러한 가문 정치를 풀어나갈 것인가가 필리핀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2명의 아키노 대통령, 2명의 마르코스 대통령, 그리고 신흥 민다나오 가문인 두테르테 정치가문도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따라 후원-피후원(patron-client) 관계가 전 사회에 아직도 팽배해 있다. 후원-피후원 관계는 보호자(후원자)와 의존자(피후원자) 사이의 상호 이익에 기반한 비공식 관계를 말한다. 정당도 이념에 따라 결성되기보다 실제로는 가문 간 결탁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제도보다 가문 중심의 정치가 정치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으므로, 대런 애쓰모글루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제시한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필리핀은 여전히 가문 중심의 소수 집중형 제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거와 의회 등 민주주의의 절차적·형식적 제도가 제대로 순기능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포용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부정부패가 횡행하게 된다. 역사는 이런 국가가 결국 실패한 국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리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 해법은 무엇인가.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