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똠얌꿍과 팟타이 같은 태국 음식, ‘미소의 나라’, 타이 마사지, 푸껫과 파타야의 아름다운 해변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동남아의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도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태국은 독특한 나라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동남아를 양분하던 시절에도 독립을 지켰다. 서쪽의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는 영국이, 동쪽의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는 프랑스가 차지했지만 그 한가운데 있던 시암, 오늘의 태국은 살아남았다.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서지 않고 끊임없이 균형점을 찾는 태국 외교를 흔히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태국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 오늘의 태국을 이해하는 데는 세 가지 키워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쿠데타, 왕실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체제, 그리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민주화다.
■ 첫 번째 키워드, 쿠데타
태국 현대정치의 출발점은 1932년이다.
그해 인민당이 일으킨 무혈혁명으로 짜끄리 왕조의 절대왕정이 끝나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됐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입헌군주제가 민주주의로 곧장 이어진 것이 아니라 쿠데타와 헌법, 군부정부와 민간정부가 반복되는 독특한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다.
쿠데타 횟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932년 이후 20차례 안팎의 쿠데타가 시도됐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헌법도 20개나 만들어졌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쿠데타의 나라’다.
태국 현대정치에는 익숙한 순환이 있었다.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 군부가 계엄령이나 비상조치를 선포한다. 쿠데타로 정부를 무너뜨린다. 군부 주도의 과도정부가 등장한다. 새 헌법을 만든다. 선거를 실시한다. 민간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다 다시 정치적 갈등이 커지면 군부가 등장한다. 그래서 태국의 쿠데타는 정치체제 밖에서 일어나는 예외적 사건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정치체제 안에서 반복되어 온 하나의 정치적 관행에 가까웠다.
■ 두 번째 키워드, 왕실과 군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부가 강해졌다. 그러나 태국 정치를 단순히 ‘군부 대 민간정부’의 대립으로만 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그 뒤에는 왕실과 군부, 고위 관료, 재계와 일부 도시 엘리트가 연결된 보수적 권력 네트워크가 존재해 왔다. 그 중심에는 1946년 즉위해 2016년 서거할 때까지 무려 70년 동안 재위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정치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국왕의 권위는 중요한 조정자 역할을 했다. 동시에 군부 역시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국왕이 쿠데타를 승인해야 성공한다’고 단순화하기보다는, 성공한 군부가 왕실의 재가와 상징적 권위를 통해 쿠데타 이후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왕실-군부-관료-재계의 보수적 네트워크가 태국 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래서 군부가 물러나 민간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완전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라기보다는 군부와 관료 엘리트가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관리된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가 반복됐다.
1950~60년대 사릿 타나랏 체제가 그랬고, 1980년대 쁘렘 띤술라논 체제 역시 군부와 왕실, 관료 엘리트의 협력 위에서 유지됐다.
그러나 민주화도 반복됐다. 그렇다고 태국의 역사를 쿠데타와 군부통치의 역사로만 볼 수는 없다. 쿠데타가 반복된 만큼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반복됐다.
나는 태국 현대사의 민주화를 크게 네 차례의 물결로 나누어 보고 싶다.
첫 번째 민주화는 1973~1976년이다.
1973년 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군사독재가 무너졌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1976년 10월 탐마삿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잔혹하게 진압됐고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첫 번째 민주화는 그렇게 좌절됐다.
두 번째 민주화는 1992년이다. 1991년 쿠데타 이후 군부 출신 수찐다 끄라쁘라윤이 총리가 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른바 ‘검은 5월’이다.
군부의 유혈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결국 수찐다가 물러났다. 이후 태국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1997년에는 국민 참여를 확대하고 정치제도를 개혁한 이른바 ‘국민헌법’이 만들어졌다.
태국 민주주의가 이제 정착되는 듯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탁신 친나왓이었다.
■ 세 번째 민주화와 탁시노크라시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이 이끄는 타이락타이당이 압승했다. 탁신은 태국 정치의 판을 바꿨다.
그 이전까지 방콕의 관료와 군부, 재계 엘리트가 주도하던 정치에 북부와 동북부 농촌 주민들이 대규모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30바트 의료제도, 농촌개발기금, 농민 부채경감과 같은 정책은 농촌 주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탁신의 정치에는 또 다른 얼굴도 있었다. 권력 집중과 정경유착, 부패 의혹, 언론에 대한 압박 등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래서 그의 정치체제를 비판적으로 ‘탁시노크라시(Thaksinocracy)’라고 부르기도 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탁신 시대를 태국의 세 번째 민주화 과정으로 보고 싶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치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농촌 주민들이 자신의 한 표가 정부의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강하게 경험했다.
탁신은 문제 많은 민주주의자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깨운 수많은 유권자의 존재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 쿠데타와 사법의 정치화
바로 여기에서 기존 기득권층과 충돌이 시작됐다. 왕당파 보수세력과 군부, 기존 엘리트는 탁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2006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해외에 있던 탁신을 축출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탁신을 제거했어도 그의 지지층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친탁신 계열 정당들은 이후 여러 차례 선거에서 강한 경쟁력을 보였고 다시 집권했다.
그러자 정치 개입의 방식도 달라졌다. 정당 해산, 정치인의 피선거권 박탈, 헌법재판소의 판결 등 사법적·제도적 수단이 정치의 향방을 좌우하기 시작했다.
군부가 탱크를 몰고 거리로 나오는 직접적인 개입과 함께 헌법과 법원, 상원과 독립기관을 통한 정치 통제가 나타난 것이다.
2011년에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가 됐다. 그러나 다시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2014년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태국 정치의 오래된 순환이 다시 시작됐다. 탱크에서 헌법으로. 2014년 쿠데타는 과거와 조금 달랐다. 군부는 단순히 정권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도 속에 심어 놓았다.
2017년 헌법이 대표적이다. 군부가 사실상 임명한 상원이 총리 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2019년 총선 이후에도 쿠데타를 주도했던 쁘라윳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제도적 배경이었다. 탱크에 의한 정치개입이 헌법과 제도에 의한 정치개입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세대가 등장했다.
■ 네 번째 민주화, 젊은 세대가 등장하다
2020년 태국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는 과거와 달랐다. 군부정권 퇴진과 헌법 개정뿐 아니라 그동안 태국 정치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던 왕실 개혁 문제까지 제기했다.
태국 민주화 운동의 세대가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그 흐름은 2023년 총선에서 폭발했다. 젊은 층의 지지를 받은 전진당(Move Forward Party)이 제1당이 됐다. 그러나 정권을 잡지는 못했다.
군부가 임명한 상원이 총리 선출에 참여하면서 전진당의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총리가 되는 것을 막았다. 2024년에는 헌법재판소가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한 전진당을 해산했다. 그러나 전진당 정치인들은 국민당(People's Party)을 만들어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정당은 해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당을 지지한 젊은 세대의 생각까지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태국 정치가 다시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태국 정치의 구도 자체도 변하고 있다. 과거 태국 정치는 크게 왕당파·군부·보수 엘리트와 탁신 세력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기에 새로운 진보세력이 등장했다.
보수적 정치세력, 탁신계 푸어타이당, 그리고 젊은 층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이 경쟁하는 새로운 다극구도로 움직이고 있다. 2026년 총선에서는 아누틴 찬위라꾼의 품짜이타이당이 제1당이 됐다. 따라서 이제는 ‘탁신 세력이 선거만 하면 이긴다’는 과거의 공식도 더 이상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같은 시기 유권자들이 군부정권 아래 만들어진 2017년 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헌법 제정에 강한 지지를 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태국 유권자들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보수적인 정당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보다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오늘의 태국이다.
경제 기적에서 중진국 함정으로 정치가 불안했지만 태국 경제는 한동안 놀라울 정도로 잘 나갔다. 1960년부터 1996년까지 태국 경제는 연평균 약 7.5% 성장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로 진출하면서 태국은 동남아 제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자동차와 전기전자 산업이 발전했고 방콕을 중심으로 거대한 산업벨트가 형성됐다.
그러나 1997년 위기가 찾아왔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출발점이 바로 태국이었다. 바트화가 폭락하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무너졌다. 경제는 이후 회복했지만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0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평균 2%대에 머물렀다. 태국은 2011년 중상위소득국가에 진입했지만 아직 고소득국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이다.
더 큰 문제는 인구다. 태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문제가 태국에서도 현실이 되고 있다.
■ 그래도 태국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태국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태국은 대륙 동남아의 중심에 있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메콩지역과 말레이반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산업 기반도 만만치 않다. 수십 년 동안 일본 자동차 기업들이 구축한 공급망 덕분에 태국은 ‘동남아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릴 정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했다. 최근에는 중국 전기차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중심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이동하고 있다.
전기·전자 산업 역시 경쟁력이 있다. 기존 제조업 기반을 반도체, 전기차, AI, 데이터센터와 연결할 수 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태국의 문제는 잠재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 정치적 안정과 제도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외국 기업이 공장을 짓고 장기간 투자하려면 예측 가능한 정치와 정책이 필요하다. 오늘 만든 헌법이 내일 쿠데타로 바뀌고,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법원의 판결로 해산되고, 민간정부와 군부정부가 반복된다면 투자자들은 장기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태국이 다시 한번 동남아 경제의 선두권으로 도약하려면 쿠데타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리고 선거의 결과를 존중하고 권력교체가 헌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 민주주의라는 마법램프 안 지니(Genie)
나는 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1973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1992년 시민들이 다시 군부에 맞섰다. 2000년대에는 북부와 동북부 농촌 주민들이 선거의 힘을 경험했다. 2020년 이후에는 젊은 세대가 군부를 넘어 왕실과 국가의 역할까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넓어졌다. 물론 태국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후퇴할 수 있다. 군부가 다시 등장할 수도 있고 정당이 다시 해산될 수도 있다. 왕실과 보수 엘리트의 영향력 역시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과거와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지니가 이미 호리병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기득권 세력이 다시 호리병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해도 이제 모두 집어넣기는 어려울 것이다.
태국 민주주의는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두 걸음 앞으로 갔다가 한 걸음, 때로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1932년 이후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길게 놓고 보면 조금씩 움직여 온 방향이 있다. 왕실에서 국민으로, 군부에서 민간으로, 방콕의 엘리트에서 농촌 주민과 젊은 세대로 정치의 주체가 넓어지는 방향이다.
그래서 나는 태국의 민주주의가 정착할 것인가를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다 시간의 문제라고 보고 싶다.
태국을 ‘미소의 나라’라고만 보면 태국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식민지를 피한 영리한 나라였고, 쿠데타를 반복한 모순의 나라이며, 동시에 그 쿠데타의 역사를 끝내려는 시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나라다.
쿠데타의 나라, 왕실과 군부가 강한 나라, 그러나 민주주의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 나는 이 세 가지 얼굴을 함께 볼 때 비로소 오늘의 태국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