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곡물 창고에는 곡식이 충분하다는데 밀 가격이 불안하다.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최근 중앙일보가 세계 식량시장을 분석하면서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역설이다. 현재 세계 곡물 재고 자체가 당장 심각하게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시장에서는 밀을 비롯한 곡물가격 폭등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 배경에는 세 가지 위험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첫째, 끝이 보이지 않는 이란 전쟁과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이다. 둘째, 이제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기후변화의 ‘디폴트(default)’화다. 셋째,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초래하는 세계 무역질서의 불확실성이다.
문제는 세 위험이 각각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식량 공급망을 흔든다는 점이다.
■ 이란 전쟁, 식량문제가 되는 이유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식량과 떨어진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대 농업은 에너지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원유가격이 오르면 농기계와 운송비가 오른다. 천연가스 가격 상승은 질소비료 생산비를 끌어올린다. 중동의 주요 해상교통로가 불안해지면 선박 운임과 보험료까지 상승한다.
결국 전쟁→에너지→비료→농업생산→운송→식량가격이라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아세안(ASEAN)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4월 ASEAN 농업장관 고위급 준비회의에서는 중동 정세가 식량안보에 미칠 영향을 별도로 논의했고 APTERR와 AFSIS도 역내 식량·농업 회복력을 높이기 위한 대응책을 보고했다.
중동의 전쟁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남아의 밥상과 무관하지 않다.
■ 기후변화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
두 번째 위험은 기후변화다.
과거에는 홍수나 가뭄을 일시적인 자연재해로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다. 엘니뇨, 극심한 가뭄과 폭우, 태풍, 해수면 상승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ASEAN은 메콩델타, 짜오프라야강 유역 등 세계적인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후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기후변화를 일종의 ‘디폴트 조건’, 즉 앞으로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해야 할 위험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ASEAN도 이러한 변화를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2026~2030년 ASEAN 식량·농업·임업 계획은 기후회복력, 지속가능·재생농업, 온실가스 감축과 기술혁신 등을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농림어업은 2023년 기준 ASEAN GDP의 9.6%를 차지하고 약 9,300만 명을 고용하고 있어 농업의 충격은 경제·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 트럼프 관세가 식량안보와 무슨 관계인가
세 번째가 트럼프 관세다.
식량안보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뿐 아니라 얼마나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관세전쟁이 확대되면 각국은 자국 시장 보호에 나선다. 농산물과 비료의 교역경로가 바뀌고 수출통제까지 확산될 수 있다. 기업들은 공급망을 재편하고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 가격에 반영된다.
2007~2008년 세계 식량위기의 중요한 교훈도 여기에 있다. 실제 생산량 감소 못지않게 각국의 수출제한과 사재기, 시장의 공포가 가격 폭등을 증폭시켰다.
따라서 트럼프발 관세전쟁은 단순한 미국과 교역상대국 간의 통상갈등이 아니다. 이미 지정학과 기후변화로 불안정해진 세계 식량시장의 세 번째 충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 ASEAN은 식량 생산지역이면서 식량 취약지역
그렇다면 ASEAN은 안전한가.
태국과 베트남은 세계적인 쌀 수출국이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팜유 생산대국이다. ASEAN 전체로 보면 상당한 농업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ASEAN 사람들의 식생활이 도시화와 소득 증가에 따라 빠르게 변하면서 밀과 대두, 사료용 곡물 등 역외 의존도가 높은 식품의 소비가 늘고 있다. 특히 열대지역인 동남아는 밀 생산에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식량을 생산하더라도 비료와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 생산비가 상승한다. 사료곡물 가격이 오르면 닭고기·돼지고기·계란 가격으로 번진다.
따라서 앞으로 ASEAN 식량안보의 핵심은 단순한 식품 유용성(Food Availability), 즉 식량의 존재 여부보다 식품 회복력(Food Resilience), 식량체계의 회복력에 있다.
■ ASEAN에는 이미 훌륭한 제도가 있다
다행히 ASEAN은 맨손으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
ASEAN+3에는 APTERR(ASEAN Plus Three Emergency Rice Reserve)라는 비상 쌀 비축제도가 있다. 2011년 협정이 체결되고 2013년 상설화된 제도로 ASEAN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이 참여한다.
비축미를 사전에 약정하거나 긴급상황에서 방출하고, 심각한 재난에는 무상지원도 가능하다. 특히 티어3(Tier 3)는 자연재해와 인도적 위기에 신속하게 쌀을 공급하는 장치다.
한국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2025년 미얀마 대지진 피해를 위해 3,000톤을 제공한 데 이어 2026년 추가로 3,000톤을 지원했다. 이와 별도로 미얀마 현지에는 한국 쌀 2,000톤을 사전 배치해 긴급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한국이 제공한 쌀 400톤이 필리핀 마욘화산과 지진 피해 주민들에게 전달됐다.
식량수급 정보를 공유하고 조기에 위험을 탐지하는 AFSIS(ASEAN Food Security Information System)도 있다. 올해 6월 ASEAN+3 관계자들은 AFSIS의 조기경보, 식량안보 모니터링과 정보공유 기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 이제 APTERR 2.0을 생각할 때다
그러나 기존 제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APTERR의 ‘R’은 쌀(Rice)이다. 기본적으로 쌀 위기에 대비한 제도다.
그런데 앞으로의 식량위기는 쌀 부족에서 시작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란 전쟁으로 천연가스와 비료가격이 오르고, 기후변화로 밀이나 옥수수 작황이 악화되며, 관세전쟁과 수출통제로 국제시장이 분절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APTERR 2.0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쌀 중심의 비축을 밀·옥수수·대두·식용유 등 주요 식량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반드시 모든 품목을 창고에 쌓아둘 필요도 없다. 장기계약과 공동구매, 긴급수입 금융을 결합한 ‘가상 비축’도 가능하다.
둘째, 비료를 식량안보 전략품목으로 포함해야 한다. ASEAN+3가 주요 비료의 공급망을 점검하고 필요하면 공동구매와 장기 공급계약을 추진할 수 있다. 금년 4월 아세안농업장관회의 특별 성명에 식용류를 비상 비축에 포함시키는 방안이 반영되어 있다. 2026년 현재 아세안+3차원에서 비료도 비상 바축물에 포함되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다.
셋째, AFSIS를 단순한 농업통계 시스템에서 식량안보 조기경보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곡물 생산량과 재고뿐 아니라 기후, 비료, 에너지 가격, 해상운임, 수출규제 등을 AI와 위성정보를 이용해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넷째, 한국과 ASEAN의 기후 스마트농업 공동 R&D를 확대해야 한다. 가뭄·홍수·염해에 강한 품종, 스마트 관개, 종자개량, 스마트팜 분야는 한국이 기여할 여지가 크다. ASEAN의 2026~2030 경제전략도 식량정보시스템 강화, 비상 쌀 비축, 농업 R&D와 디지털 전환을 주요 과제로 명시하고 있다.
■ 식량안보를 한·ASEAN 전략협력의 새로운 축으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금융안전망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결국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로 발전했다.
지금의 세계는 또 다른 공동 안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란 전쟁, 디폴트가 된 기후변화, 트럼프 관세라는 세 개의 충격이 동시에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문제에서는 ASEAN+3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일치한다. ASEAN은 거대한 식량 생산지역이고 한국·중국·일본은 자본과 기술, 비축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APTERR를 통해 상당한 신뢰와 경험을 축적했다. 이제 이를 쌀 지원을 넘어 비료 공동구매, 식량 공급망 조기경보, 기후 스마트농업, 공동 R&D와 전략적 비축으로 확대할 때다.
세계 식량위기의 다음 모습은 창고에서 곡물이 사라지는 장면이 아닐지도 모른다.
곡물은 있는데 전쟁 때문에 운반하지 못하고, 기후 때문에 다음 수확을 장담하지 못하며, 관세와 수출규제로 필요한 곳에 식량이 가지 못하는 위기일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식량안보의 핵심 질문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서 ‘충격이 와도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한·ASEAN 식량안보 협력도 바로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