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서정인의 아세안ABC 42] 미국-중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중력

규칙은 있지만 국제 질서는 없다...카프카적 세계와 한국·ASEAN의 선택

 

요즘 국제정치를 바라보다 보면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이 떠오른다.

 

‘심판’의 요제프 K는 어느날 갑자기 체포되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한다. 법은 존재하고 법원도 존재하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성’의 주인공 K 역시 성에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복잡한 관료체계와 알 수 없는 규칙에 가로막힌다.

 

규칙은 있지만 그 규칙을 누가 만들고 어떻게 적용하는지 알기 어렵다. 권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국제질서가 조금씩 카프카의 세계를 닮아가고 있다.

 

■ 두 개의 중력이 만드는 다극적 국제세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유엔헌장과 국제법이 있었고, 유엔과 WTO 같은 다자기구가 이를 뒷받침했다. 미국은 동맹과 자유무역, 다자주의를 중심으로 이 질서를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 그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다.

 

한편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한국-호주와 유럽의 동맹 및 우방 네트워크가 있다. NATO, 한미동맹, 미일동맹, AUKUS, 쿼드 등 다양한 안보협력체가 중첩되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고 북한과 이란 등이 이들과 가까워지면서 서방 중심 국제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 같은 비서방 협력체도 외연을 넓히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세계를 과거 미-소 냉전처럼 두 진영으로 단순하게 나누기는 어렵다.

 

중국과 러시아조차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인도는 쿼드에 참여하면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도 미국과 안보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경제협력을 확대한다. ASEAN 국가들 역시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사안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오늘의 세계는 두 개의 진영보다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중력이 작용하는 다극적 세계에 가깝다.

 

■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트럼프2기 미국 ‘더욱 카프카적인...’

 

더욱 카프카적인 것은 전후 국제질서를 만든 미국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미국은 동맹과 국제기구, 자유무역이라는 제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의 힘뿐 아니라 미국이 만든 제도에 대한 신뢰가 미국 패권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의 미국은 훨씬 거래적이다.

 

동맹국에도 방위비와 투자 확대를 요구하고 관세를 외교·안보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동맹과 통상, 투자와 안보가 하나의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간다.

 

동맹국들이 직면한 문제는 미국이 약해졌다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과거보다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반대편의 중국 역시 안정적인 대안 질서를 제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국이자 많은 국가의 최대 교역국이다. 일대일로와 BRICS, 글로벌 사우스 외교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힘은 주변국에는 동시에 위협이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중국에 대한 의존과 경계도 함께 커지는 역설이 나타난다.

 

많은 국가들은 결국 미국에도 완전히 의존할 수 없고 중국에도 완전히 기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 우크라이나 전쟁-중동 전쟁 속 작아지는 유엔의 그림자

 

여기에 유엔을 비롯한 다자기구의 영향력 저하가 겹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중요한 성과는 강대국조차 국제기구라는 공간 안에서 협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전쟁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상임이사국의 이해충돌과 거부권 앞에서 반복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WTO 역시 미중 무역갈등과 일방적 관세조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규칙은 존재하지만 강대국이 이를 따르지 않을 때 강제할 힘이 부족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카프카적인 국제질서다.

 

그렇다고 유엔과 다자주의가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다. 평화유지, 난민, 식량, 보건, 개발, 기후변화와 인도적 지원에서는 여전히 이를 대체할 조직이 없다.

 

오히려 국제질서가 불안정해질수록 강대국보다 중소국이 국제법과 다자주의를 더 필요로 한다. 규칙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결국 힘이 규칙이 되기 때문이다.

 

■ 동아시아, ‘경제와 안보’가 서로 얽혀있는 ‘가장 위험한 복도’

 

이러한 국제질서 변화가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동아시아다.

 

대만해협, 남중국해, 한반도, 동중국해라는 잠재적 분쟁지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더욱 어려운 것은 경제와 안보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은 안보에서 미국에 크게 의존하지만 중국과 깊은 경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ASEAN 국가들에게도 중국은 최대 또는 핵심 교역 상대국인 동시에 남중국해에서는 안보적 우려의 대상이다.

 

과거에는 흔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분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반도체, AI, 배터리, 희토류, 조선, 에너지와 공급망까지 안보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경제가 안보가 되고 기술이 외교가 되는 시대다.

 

■ 한국의 위기와 기회...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외교 필요

 

한국은 이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 때문에 한미동맹은 한국 안보의 핵심이다. 동시에 중국은 포기할 수 없는 거대한 경제적 이웃이다.

 

따라서 한국 외교를 친미냐 친중이냐의 이분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안보에서는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억지력을 유지하되 경제에서는 공급망과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기술에서는 미국·일본·유럽과 협력하면서 중국과의 경제관계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여기에 ASEAN·인도·호주·캐나다·EU 등 중견국과의 네트워크를 넓힐 필요가 있다. 선택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외교가 필요하다.

 

한국에는 위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미중 경쟁으로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원전 등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산업의 전략적 가치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경제력과 기술력, 군사력, 민주주의 경험을 가진 한국은 강대국과 중소국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중견국 외교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 ASEAN 역시 미중 경쟁 한가운데, 압력과 기회의 공간

 

ASEAN 역시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 있다.

 

중국에게 동남아는 거대한 시장이자 일대일로의 핵심 지역이며 남쪽의 전략적 공간이다. 미국에게도 동남아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핵심 지역이다.

 

그래서 미중 경쟁은 ASEAN에 압력인 동시에 기회다.

 

미중 무역전쟁과 공급망 재편으로 중국에 집중됐던 생산기지 일부가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데이터센터와 디지털경제 분야에서도 새로운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회를 활용하려면 ASEAN 내부의 결속이 중요하다. 남중국해와 중국을 바라보는 회원국들의 입장이 다르고 경제발전 수준과 정치체제도 다양하다. 미중 경쟁이 심화될수록 ASEAN 내부의 균열 가능성도 커진다.

 

ASEAN 중심성(Centrality)가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중립을 넘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을 만들어야 한다.

 

■ 카프카의 ‘성’ 밖으로...신냉전이 아닌 ‘다극적 무질서 시대’ 전략은?

 

앞으로의 세계는 새로운 냉전이라기보다 다극적 무질서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력하지만 혼자 세계질서를 설계하기 어렵다. 중국은 부상했지만 미국을 대체하는 보편적 질서를 만들지는 못했다. 러시아와 인도, 글로벌 사우스가 움직이고 유엔과 WTO 같은 다자기구의 권위는 약해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한국과 ASEAN 같은 중견국이 취해야 할 전략은 세 가지다.

 

자강, 다변화 그리고 다자주의다.

 

안보와 경제의 자체 회복력을 키우고, 어느 한 강대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며, 여러 국가와 중층적인 협력망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약해진 유엔과 다자주의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켜야 한다.

 

카프카의 ‘성’에서 K는 끝내 성의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의 중견국들이 반드시 성의 주인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미국과 중국 가운데 누가 새로운 성의 주인이 될 것인지 기다리는 대신 서로 연결해 새로운 길을 만들면 된다.

 

강대국의 선택을 기다리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규칙은 있지만 질서는 보이지 않는 카프카적 세계에서 한국과 ASEAN이 살아남고, 동시에 기회를 만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관련기사

포토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