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5] ‘독립영웅’ 75세대 정치 세대교체는 언제?

  • 등록 2026.01.11 12: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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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시대’에서 ‘경영의 시대’ 전환 필연...‘마운 보트’ 낙점은 여전

 

딜리(Dili)의 태양은 뜨겁고,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바닷가에는 푸른 바다를 뒤로 한 채 그냥 서 있는 청년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었다. 활기 넘쳐야 할 청년기, 하지만 그저 서 있는 모습. 어딘가에 막힌 활기, 가슴에 자리한 막막함의 상징이다.

 

동티모르 정치는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에 맞서 정글로 들어갔던 이른바 ‘75세대’가 여전히 이끌고 있다. 샤나나 구스망, 마리 알카티리, 조제 하무스-오르타. 이 이름들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신화에 가깝다.

 

그들이 권좌에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24년간의 무장 저항과 독립 쟁취라는 역사적 정당성, 국민 대다수가 부여하는 신뢰, 그리고 아직 그 무게를 대체할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후속 세대의 현실이 맞물려 있다. 다만 영웅들의 시대가 너무 길어질 때, 국가가 도약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현지에서 통용되는 ‘마운 보트(Maun Boot)’ 문화가 이 상황을 설명해준다. 테툼어로 ‘큰 형님’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전쟁 시기에는 생존을 위한 위계와 존경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이 문화는 사회적 결속의 기제로 작동하는 한편, 세대 간 권력 이동을 더디게 만든다.

 

대통령 선거가 단적인 예다. 2012년 타우르 마탄 루악, 2017년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루올로’, 2022년 라모스-오르타까지, 역대 대통령 모두 샤나나 구스망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되었다. ‘마운 보트’의 낙점 없이는 최고 권좌도 요원하다는 방증이다.

 

나는 한국학센터 대표로서,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차세대 지식인 피델리스 마갈량이스를 대학 강의실로 초청한 적이 있다. 그는 타우르 마탄 루악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2015년 인민해방당(PLP)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동티모르 정치는 샤나나의 동티모르재건국민회의(CNRT)와 알카티리의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이 양분하고 있었다. 피델리스는 이 구도에 ‘제3의 대안’을 제시하며, 투쟁 경력 대신 정책과 행정 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젊은 테크노크라트였다.

 

특강 후 커피를 나누며 물었다. “왜 굳이 이 힘든 정치판에 뛰어듭니까? 더 편한 길이 많지 않습니까?”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담담하지만 결기 어린 대답이었다.

 

“교수님, 동티모르는 바뀌어야 합니다. 독립영웅들이 나라를 세웠지만, 미래까지 그분들 방식에 맡길 순 없습니다. 저는 그 세대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세대교체의 다리가 되어야 하니까요.“

 

피델리스의 시각은 신세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흐름이다. 동티모르에는 해외 유학파 젊은 인재들이 상당수 성장해 있다. 다만 정치적 영향력 확보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75세대의 대중적 신뢰와 조직 기반은 하루아침에 대체되기 어렵고, 젊은 세대는 아직 검증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 필자가 만난 제자들은 기성 정치인의 지지 없이는 입지를 다지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제약인 동시에 도전의 조건이다.

 

경제 구조도 이 정치 지형과 맞물려 있다. 동티모르 재정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 기금은 국가 운영의 근간이자 정치 역학의 핵심 변수다. 오일머니는 참전용사 연금, 공공사업 일자리, 각종 보조금 등 복지 시스템을 지탱한다. 사회 안정에 기여하지만, 민간 부문 성장과 청년들의 독자적 도전을 제약하는 측면도 있다.

 

아세안 정회원이 된 동티모르는 이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아세안 경제공동체 편입은 관세 철폐와 시장 개방을 수반한다. 석유 의존 경제로는 역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농업, 관광, 제조업 등 비석유 부문 육성이 시급하고, 이는 오일머니 분배에 익숙한 기존 정치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과제다. 국제기구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온 경제 다각화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동티모르 독립 영웅들은 “우리는 미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건국 영웅들이 그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장애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70대 중후반에 접어든 영웅들의 역할 변화는 언젠가 논의될 수밖에 없다. 급격한 퇴장인지, 점진적 이양인지는 동티모르 사회가 합의해 나갈 문제다. ‘저항의 시대’에서 ‘경영의 시대’로의 전환은 필연이지만, 속도와 방식은 사회 맥락에 따라 다르다.

 

피델리스가 말했던 ‘세대교체의 다리’가 현실화되기까지, 동티모르의 시계는 제 나름의 속도로 흐르고 있다. 딜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세대가 영웅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들의 언어로 '경제와 민생'이라는 새 장을 써 내려가길 바란다. 세대의 교차점에서, 동티모르는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가능성 사이를 천천히 건너고 있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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