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이야기10] 쓰시마 섬 ‘반은 조선, 반은 일본’

  • 등록 2019.11.21 15: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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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가 문화공동체...‘혁거세’라는 이름서 신사 유래

 

지금까지 이야기를 되돌아보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떠있는 조그만 섬 쓰시마가 예로부터 한일 두 나라 간 문물 교류의 가교로서 중요한 몫을 해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교류라고 하지만 고대 쓰시마는 일본열도가 한반도로부터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창구이었다.

 

이번 이야기는 쓰시마가 그 이상 문화공동체를 탄생시킨 모태라는 점을 일깨우고자 한다. 재일작가이자 한일고대사 연구가인 김달수는 쓰시마 섬을 두고 ‘반은 조선, 반은 일본’(金達寿, 1986, 229)이라고 말한다. 그 만큼 쓰시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서로 나누는 점이 많은 섬이다. 글쓴이는 이번 이야기에서 이 점을 자세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 문화공동체는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가 형성하는 지형이다. 이 지형에 사는 가야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제사를 나누면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말을 함께 썼다는 점이다. 물론 글쓴이를 포함한 현대인은 고대를 산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일본어와 한국어를 견주면 이를 연역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우선 현대 두 나라 언어 사이에는 수많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섬(島)’-->‘시마(島)’로, ‘절(寺)’-->‘테라(寺)’로 된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불특정 추상명사 ‘것’이 ‘고토(事)’로 된 것도 또 다른 예이다. 그밖에 어순, 조사, 동사의 활용에서 공통점이 두루 나타난다.

 

더 나아가 현대 일본어와 한국어에는 다른 표기에도 의미구조가 같은 문절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아줌마가 물 한 모금 마셔본다[한국어]”--“小母さん(오바상)が一口飲んで見る[일본어]”와 같은 한일어의 문절을 견주어 보면 한국어 “마셔본다”와 일본어 “논데미루(飲んで見る)”는 같은 의미로 모아진다. 즉 “본다”와 “見る”는 그 어떤 대상물을 본다는 개념이 아니라 “무엇을 해보다”[try to do what]을 뜻으로 귀일한다.

 

이것은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한국어와 일본어는 한 조어(祖語)에서 어느 때인가 갈라진 것이라는, 무리 없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좀 더 전문적인 분석이 필요한 과제임으로 뒤에 다시 상세히 다룰 것이다.

 

■ 무교의 제사공동체

 

이 말 공동체를 전제로 그 옛날 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가 문화공동체라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또 그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그 실체를 하늘에 제사를 함께 나누는, 즉 제사공동체, 다르게 말하면 신앙 또는 종교공동체라고 본다.

 

이 제사공동체는 한 상징적 인물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가 ‘신라 왕자’라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 <고사기>에는 ‘天之日矛’라고 적음)이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 3년 조에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내귀했다고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3년 봄 3월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내귀했다. 가져온 물건은 하후토타마(羽太玉) 한 개, 아시다카구슬[足高玉] 한 개, 우가카아카시구슬[鵜鹿鹿赤石玉] 한 개, 이즈시카타나(出石小刀) 한 자루[一口), 이즈시호코 한 자루[一枝], 히노거울[日鏡] 한 장[一面], 쿠나노히모로기(熊神籬) 한 벌(一具) 모두 일곱 물건[七物]이다. 그리고 다지마(但馬) 국에 보관하여 늘 신물(神物)로 삼는다(坂本太郞외 <일본서기> 권 2, 22).

 

그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왔다고 ‘일곱 물건’ 중 천황의 신분을 보장하는 ‘삼종의 신기’, 즉 구술, 거울, 칼[玉, 鏡, 劍]가 모두 포함돼 눈길을 끈다. ‘신라 왕자’가 가져온 물건이 언제 어떻게 천황가에 ‘삼종의 신기’로 부회되었는지 이것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한반도 특히 신라에 발원하는 신물이며, 무당이 하늘과 소통할 때 쓰이는 무구(巫具)라는 점이다.

 

여기서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왔다는 ‘쿠마노히모로기’에 주목해 보려는데, 그에 앞서 에도시대 고증학자인 후지이 사다모토(藤井貞幹, 藤貞幹[토테이칸]이라고도 읽음)는 저서 <슈-코-하츠>(衝口發)에서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을 전하고 있다. “일본기[일본서기를 이름--글쓴이]를 읽으면 우선 이 나라의 일은 마진 이한(馬辰二韓: 마한 진한)에서 열리고 곁으로는 변한의 것도 석여 있음을 깨달아야...”라고 적고는 “예부터 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덮으려는 것을 알지 못하고...”라고. 이어 그는 쿠마노히모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짚는다.

 

쿠마노히모로기는 후세 신사(神祠)이다. 무어라고 해도 그 사람 몸소 모시는 당주를 장사지내는 곳이다. 이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읽는 것은 본래 신라 말로 그것을 빌려 사용하는 것이다...예컨대 거울을 만들어 이를 그 사람 몸소 항상 빈소에 시중드는 것과 같이 봉공하는 것으로 빌려 쓰는 말이다. 아메노히보코가 가지고 온 쿠마노히모로기도 히보코가 부조(父祖)의 주(主)인 것을 알려 주느니.

 

이것은 히모로기가 신라 말이라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아메노히보코를 상징으로 하는 신라 계 부족의 수장[父祖の主]이라는 것이다. 또한 히모로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 신사가 조신묘(祖神廟)에 유래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의 신궁·신궁의 기원이 조상에 대한 신앙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일본 고대사에 밝은 타니카와 켄니치(谷川健一)는 “신사 그 기원에 대해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일본 각지의 신사를 찾는 것을 요사이 일거리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 신사 경내에 고분이 많다는 사실이다. 신사는 성스럽고 묘지는 더럽다고 하는 성예(聖穢)의 관념에 사로잡혀 신사 안에 묘지가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신주(神主: 신사의 신관)나 네기(禰宜: 신관 아래 신직--글쓴이)도 있고 좀처럼 그 실정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관념 자체가 불교도래 보급이후의 것으로 그 이전에는 망자를 격리하는 성예의 관념이 있었을 리가 없다. 일족의 조상이나 지역 호족의 매장지를 예배하는 것을 당연한 일인데도 후대 신도가가 기피하려 해서는 정말 안 된다.

신사의 기원이 고분이라는 것은 전혀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미 에도시대 이래 많은 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金達寿, 1986, 48~49 재인용).

 

그렇다면 신사·신궁의 원형인 조신묘는 언제 어디서 일본으로 왔는가? 이제까지 논의에서 그것은 신라이지만 무엇보다 <삼국사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신라 초대왕 혁거세(赫居世)가 죽자 제2대 남해왕(南海王)이 조신묘를 지었다. 그것이 서력기원 6년이다. 그리고는 왕의 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재케 했다. 다시 21대 소지왕(炤知王) 9년[서력 487년]에는 조신묘는 ‘신궁’으로 된다. <고사기> 스진(崇神) 천황 조에 천황의 누이 도요스키이리히메(豊鋤入姬)를 이세신궁의 사이구(斎宮: 이세신궁에 봉사하는 미혼의 황녀)로 하여 제사로 주재케 한 것과 서로 통한다. 신궁이 조선이나 일본이나 서로 통한다면 ‘신사’는 어떤가?

 

이것은 신라 초대왕 ‘혁거세’라는 이름에서 신사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혁거세’의 ‘혁’은 이름, 여기에 존칭 ‘거세’가 붙은 것이다. 이 ‘거세’가 일본에 들어와 신사인 ‘코소’가 된다. 신사(神社)의 사(社)는 ‘야시로’로도 읽지만 지금도 ‘코소’라고도 읽는다. 예컨대 시타테루히메(下照姬: 기기신화에서 이즈모대사(出雲大社)의 제신인 오쿠니누시(大国主命)의 딸)의 사당의 경우 <엔기시키 신명장>)에 의하면 히메코소(比売許曾)는 “히메코소(姬社)의 뜻이 되느니”(姬社の義也) 라고 적혀 있다. ‘무엇무엇 신사(神社)’는 ‘무엇무엇의 카미코소(神許曾)’이기도 함으로 히메코소신사(比売許曾神社)로 된 것은 코소와 사(社)가 겹친 것이다.

 

에도시대 학자인 반노부토모(伴信友, 1775~1846)는 “신사를 코소(古曾)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코소’가 붙은 신사가 많다. 예컨대 가와치국다시지히군(河內国丹比郡)의 아마미코소신사(阿麻美許曾神社), 이세국미에군(伊勢国三重群)의 오코소신사(小許曾神社), 오미국아사이군(近江国浅井群)의 가미코소신사(上許曾神社), 이즈모국아키카군(出雲国秋鹿郡)의 코소시신사(許曾志神社) 등등.

 

■ 아메노히보코의 행적(行蹟)

 

아메노히보코는 앞에서 보듯이 새로운 신앙을 가져온,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가 한반도 남부 소국 안라(安羅)에서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상륙한 뒤 행적을 되돌아보자.

 

일본의 그의 유적을 살펴보면 그는 쓰쿠시(筑紫), 즉 북 규슈의 이토반도(系島半島)로 상륙한 뒤 그는 거기에 나라를 세웠다. 이는 <일본서기> 추아이(仲哀) 8년조에 이토현주(県主[아가타누시)의 조상이라는 이도테(五十迹手)는 추아이 임금을 맞아 항복의식을 치르면서 “나는 코마국(高麗の国)의 오로산(意呂山)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히보코(日鉾)의 후손[末裔] 이도테입니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오로산란 한일전문가들에 의하면 한반도 남부의 울산이라고 한다. 나는 히보코가 세운 나라를 무축(巫祝)왕국, 즉 무교를 신앙적 기반으로 하는 왕국이라고 본다.

아메노히보코의 신라 이주 집단은 북 규슈에만 머물지 않았다. 타키카와 마사지로(瀧川政次郞)는 “히메코소(比売許曾) 신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도국(伊都国)에는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와, 히메코소를 모신 사당이 존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앞서 든 이토군(怡土郡)의 다카스신사(高祖神社)는...이토(伊都) 국왕이 받든 아메노히보코 또는 히메코소의 사당인지도 모릅니다.

아메노히보코가 그의 적처(嫡妻)를 쫓아 나니와(難波: 현 오사카)에 이르렀다는 것은 나의 해석에 의하면 히보코를 조상신으로 받드는 씨족과 수장이 그 부중을 거느리고 나이와의 배후에 있는 야마토로 침입한 것입니다. 일본의 중원이라고 해야 할 야마토 땅으로 침입을 도모한 씨족은 어떤 씨족이었을 까요. 이 문제에 명쾌히 해답을 준 것은 타나카 다카시(田中卓) 박사입니다. 타나카 박사는 “일본국가의 성립”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은 케이코(景行紀)에 보이는 이토현주 이도테가 [히보코의] 자손이라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이토현주가 위지왜인전에 보이는 이토국왕인데 그 부강함은 천하에 으뜸이라는 것은 전에도 논술한 바 있습니다. 그 유력한 호족이 동방의 미지(美地)를 바라 동정하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金達寿, 1986, 42~43).

 

타키카와의 해석은 매우 시사적인데, ‘동방의 미지를 바라 동정’이란 결국 야마토를 넘본다는 것이 아닌가. 타키카와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이상 내가 분명히 해 안 히메코소 사당을 서쪽에서 차례로 헤아리면 치쿠젠국(筑前国) 이토군의 다카스신사(高祖神社), 부젠국(豊前国) 다가와(田川郡)의 카와라신사(香春神社), 붕고국(豊後国) 쿠니사키(国前郡)의 히메코소신사(比売許曾神社), 세츠국(摂津国) 토세이군(東生郡)의 히메코소신사, 같은 국 스미요시군(住吉郡)의 아카루히메노미고토신사(赤留比売神社)로 됩니다. 나는 이들 히메코소 사당을 차례로 연결하여 간 줄[線]이 킨키(近畿) 귀화인이 하카다 만의 이토수도(系島水道)로 상륙한 뒤 킨키의 각지로 옮겨간 행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위 책, 43).

 

결론적으로 고대 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는 같은 문화권, 즉 야요이(弥生)문화권을 형성하고 그 제철과 도작을 수반한 문화의 강한 힘은 계속 동쪽으로 미쳐 일본의 ‘중원’ 야마토에 이르고, 다시 일본 각지로 번져 오늘날 일본사회 또는 일본국을 만든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정리=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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