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나 일본어는 이른바 교착어(膠着語)또는 부착어(附着語)라고 한다. 이는 언어의 한 유형으로 실질적 의미를 갖는 말이나 어간에 기능어나 접사를 붙여 여러 가지 문법적 범주를 나타내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주격에 ‘나는’, ‘나에’, ‘나의’, ‘나를’과 같이 어미 ‘나’에 조사가 붙어 뜻을 더하거나 품사를 바꾸는 접사가 단어가 이루어지는 첨가적 성격을 띤 언어이다.
중국어와 같이 어근이 그대로 한 단위가 되는 언어를 고립어, 영어나 독일어와 같이 단어의 굴절이 내부적 변화로 표시되는 언어를 굴절어와 비교가 된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순이 같고, 교착어라는 성격이 같은 언어다. 이런 성격은 조사가 붙는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본어 は, に, の, を는 ‘는’, ‘에’, ‘의’, ‘를’에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한국어 ‘나는’과 ‘내가’와 같이 미묘한 뉘앙스를 갖는 ‘는’과 ‘가’라는 조사의 경우도 일본어 は와 が의 경우와 신기하게도 의미는 일치한다.
예컨대 “나는 학교에 간다”와 “내가 학교에 간다”를 견주어 보면, 전자 즉 ‘나는’의 경우 “너는 어디에 가는가?” 라고 물을 때 답이며, 후자 즉, ‘나=내가’의 경우 “누가 학교에 가는가”라고 물을 때 답이다. 철수나 영희가 아니라 ‘나=내’가 간다는 뜻으로 나에 초점이 있다. 이것은 일본어 “와타시와갓코니이쿠(私は学校にいく[나는 학교에 간다])”와 “와타시가갓코니이쿠(私が学校にいく[내가 학교에 간다])”를 견주어 보아도 전혀 똑 같다.
다른 용례로 위험한 지역에 가지 않으면 안 될 때 “나는 가지 않는다”라고 부정할 때 쓰이는 반면 그래도 “내가 간다”라고 긍정할 때 쓰인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이국어인데도 이렇게 흔히 쓰는 조사의 미묘한 의미의 뉘앙스가 똑 같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언어의 진화...다른 표기에도 의미구조가 같네
민족이든 언어든 순혈주의란 한갓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글쓴이는 믿는다. 언어는 생물처럼 진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요소들이 혼효하여 성립한다. 현대 일본어의 경우 남방요소와 북방요소가 섞여 있다고 두루 인정되지만 그렇더라도 확실한 것은 북방요소가 훨씬 우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에서 본 한국어의 형적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밖에 어순, 조사, 동사의 활용에서 두루 나타난다.
더 나아가 현대 일본어와 한국어에는 다른 표기에도 의미구조가 같은 문절들이 존재한다. 이전에 우리는 “아줌마가 물 한 모금 마셔본다--小母さんが一口飲んで見る”라는 두 한일 문절을 견주어 “본다”가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본다”(try to do what)는 뜻으로 모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런 용례는 하나만이 아니다. 다음의 예를 주목해 보자.
한국어 일본어
1) 할머님이 귀가 멀다-- お祖母さんが耳が遠い [오바-상가미미가토-이]
2) 저 책을 가져 오게-- あの本をもて来て [아노혼오모테키데]
3) 어머님 잘 갔다 오세요-- お母さんよく行っていらっさい [오카-상요쿠잇테이랏사이]
위의 세 문장 1), 2), 3)의 경우 주목할 것은 주어부가 아니라 술어부이다. 1)의 경우 한국어“귀가 멀다”의 ‘멀다’와 일본어 “耳が遠い[미미가토-이]”는 ‘멀다’는 모두 물리적 거리의 개념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완전히 일치한다. 그것은 모두 모두 “귀가가 어둡다”란 뜻으로 귀일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이는 2)의 경우 “가져 오다”의 명령문인데, ‘가져[possess]’ ‘오다(come)’가 합쳐져야만 의미가 나온다. 즉 ‘가지다’와 ‘오다’를 물리적으로 합쳐진 것에서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서 가져오다[bring the book with you]가 창출된다.
3)의 경우는 독특하다. 문자 그대로라면 한국어나 일본어나 “갔다 오다”(go and come)로 무미건조한 문절이다. 물체든 인체든 그것이 “갔다 오다”는 물리적으로 가고 온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언중(言衆)을 대입하면 그것이 “잘 갔다 오라”는 인정(人情)의 인사말[goodby]로 변신한다.
여기서 파행된 일본어 문절로서 “行っていらっさい”(잇테이랏사이)는 내 쪽[I]에서 떠나는 상대[You]에 건네는 존칭 인사말이다. 떠나는 쪽이 내 쪽에 건네는 겸양 인사말로 “いってまいります”(잇테마이리마스), 여느 인사말로 “いってきます”(잇테키마스)도 있지만 기본적인 “갔다 오다”는 “잘 다녀오겠다”라는, 언정(言情)의 말이라는 것은 누구도 안다. 그것은 마치 모래알의 사막에서 언정(言情)의 푸른 들판으로, 말의 숲으로 변신이라고나 할까.
■ 오국의 탄생—일본서기에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들
언어가 8세기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 간에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자료가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그것은 쓰쿠요미노미고토(月夜見尊)와 우케모치노카미(保食神)의 신화다.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우케모치노카미는 다카마가노하라(高天原)에서 내려온 쓰쿠요미노미고토를 위해 입에서 여러 가지 먹을거리[食物]를 내놓아 대접하려 했다.
이것을 더럽다고 여겨 격노한 쓰쿠요미노미고토는 칼을 빼어 우케미치노카미를 베어버리고 만다. 그러자 우케모치노카미 사체의 각 부분에서 각종의 곡물이 생겼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신체 각 부위와 곡물을 세트로 엮어 적는다.
다만 그 신의 머리[頂(이다타키)]에서 말[牛馬(우시우마)]로 된다. 이마[額(히타히)] 위에서 조[栗(아하나)]가 생긴다. 눈썹[眉] 위에서 누에[蚕]가 생긴다. 눈[眼] 안에 뉘[稗]가 생긴다. 배[腹] 안에 벼[稲]가 생긴다. 보지[陰]에 보리[麥] 및 팥[大小豆(마메아즈키)가 생긴다(<일본서기> 제1권, 신대권 상 제5단, 교주자 坂本太郞 외, 59~60).
이것이 흔히 말하는 오국탄생 신화이다. 이 신화에서 눈썹에서 누에가 생긴 것을 빼놓으면 모두 신체 각 부위와 곡물이 세트로 대응된다. 즉 머리[頂(이다타키)]--> 말[牛馬(우시우마)], 이마[額(히타히)]-->조[粟(아와나)], 눈[眼(메)]-->뉘[稗(히에)], 배[腹(하라)]-->벼[稲(이네)], 보지[陰(호토)]-->팥[小豆(포티)].
여기서 신기한 것은 일본어에서는 신체 부위와 곡물 사이에 어떤 관계도 인정되지 않지만 한국어에서는 신체 각 부위와 곡물 세트가 현대 한국어에 맞춰 완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 교주들은 “<서기>의 편자 중 조선어를 아는 사람이 있어 인체의 장소와 생기는 물과 결부짓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풀이한다(위 책, 61).
<고사기>에도 ‘오곡의 기원’ 이야기가 나온다. 스사노오노미고토(須佐之男命, 미고토(命)는 큰 어른이라는 뜻--이하 ‘스사노오’ 또는 ‘스사노오 신’--글쓴이)가 하늘나라인 고천원에서 난폭한 행동으로 추방된 뒤 이즈모 국(出雲國)의 히(肥)강 상류로 내려와 큰 뱀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퇴치한 유명한 신화가 나온다. 그 사이 스사노오가 오곡을 탄생시키는 이야기가 삽화처럼 끼워진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이하 <고사기>, 倉野憲司 교주, 1991, 상권 “천조대신과 스사노오노미고토(天照大臣と須佐之男命)” 제5 “五穀の起源”에 의함). 고천원에서 추방당한 스사노오가 정처 없이 헤매다가 문득 배가 고파 식물을 관장하는 오게쓰히메 신(大氣津比賣神)에게 먹을 것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신이 코, 입, 궁둥이에서 먹을 것을 꺼내자 그 모습이 역겨워 격분한 스사노오가 이 신을 베어 죽였다. 이렇게 죽은 오게쓰히메의 사체가 도막도막 오곡으로 변했다 한다. 풀이하면, 머리는 누에[물론 오곡은 아니다], 두 눈은 벼, 두 귀는 조, 코는 팥, 음부[보지]는 보리, 궁둥이는 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오곡을 가미무스히노미오야 신(神産巢日御祖命)이 주워 씨앗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고대한일관계사에 밝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일본서기>가 “그 신의 頂(정: 머리)에서 牛馬(우마: 말)가 생기고, 額(액: 이마)에서 栗(률: 조)가 생기고, 眉(미: 눈썹)에서 蚕(잠: 누에) 이 생기고, 眼(안: 눈) 속에서 椑(비: 뉘)가 생기고, 腹(복: 배) 속에서 稻(도: 벼)가 생기고, 陰(음: 보지)에서 보리와 콩과 팥이 생겼다”고 소개하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와나미판(岩波版) 일본고전문학대계 <일본서기>상권 두주(頭注)에서 “이것들이 생기는 장소와 생기는 물건[物]과의 사이에는 조선어로써 비로소 대응하여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듯이 두(頭)와 마(馬), 액(額)과 율(粟), 안(眼)과 비(稗), 복(腹)과 도(稻), 여음(女陰)과 소두(小豆)와는 조선어에서 상응한다. 이것은 이 ‘큐우지(舊辭: 고대 설화집)’의 전승과 필록을 담당한 자가 조선도래 계 사람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上田正昭, 1989, 129).
이와 같이 오곡의 이름이 한국말로 통한다면, 자신을 산화하여 오곡이 된 우케모치 신이나 쓰키요미 신이 한반도와 인연이 깊은 신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게 된다. 요컨대 한신들이 조화를 부려 오곡을 탄생시킨 셈이 된다. 카미가이도 켄니치는 이 신화를 두고 “<일본서기>의 기록은 8세기의 것인데, 1200년 전의 이야기가 현대 한국어에 맞추어져 완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평한다.
게다가 그 일치는 신체어나 주요곡물의 명칭이 각각 세트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기에 단편적인 단어의 유사보다도 훨씬 본질적인 친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우케모치 신화는 현대 한국어의 조상에 해당하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간에 전해져 온 것이다... (上垣外憲一, 2003, 286).
오곡뿐만 아니라 스사노오는 일본에 나무종자도 가져온 것에 관계된 신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사노오는 그의 아들 이다케루 신(五十猛神)을 데리고 신라에서 이즈모(出雲)로 건너 올 때, 이다케루는 하늘에서 많은 나무종자를 가져와 ‘오오야시마쿠니(大八洲國)’ 곧 일본열도에 심어 온 나라를 푸른 산[靑山]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들이 일본을 풍요롭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일용할 양식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이 이 신화에 나타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고사기>(古事記), 倉野憲司 교주, 岩波書店, 1991
<일본서기>(日本書紀), 전 5책, 교주 坂本太郞, 家永三郞, 井上光貞, 大野晋, 岩波書店, 1994
上垣外憲一, <倭人と韓人>, 講談社, 2003
上田正昭, <古代の道敎文化と朝鮮文化>, 人文書院, 1989
글쓴이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