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가 아는 몇몇 일본인 친구는 말이 친절하고 예절바르고 정겹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구성하는 일본사회가 왜 차별어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특히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어가 두드러지고, 그들의 동포이기도 한 ‘부라쿠민(部落民)’에 대한 차별어도 이에 못지않다. 재일조선인 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어로 악명을 떨치는 말로서 ‘후테이노센진(不逞の鮮人)’이라는 주홍글씨가 있다. 그 말이 쓰이게 된 역사, 배경, 의미를 되돌아보기 전 글쓴이가 이 말에 눈을 돌리게 된 경위를 잠시 적어보자.
전후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한 뒤 맥아더 장군 점령아래 당시 일본은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일본 민주화는 메이지 헌법을 폐기하고 ‘평화 헌법’ 또는 ‘맥아더 헌법’을 만드는 것으로 절정을 만났다. 절대권자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만들고 일본으로 하여금 아애 전쟁을 못하게 한 것이다. 오늘날 까지 일본 군국주의자의 후예 극우 분자들이 이 평화헌법을 줄기차게 개정하려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상징’ 천황을 메이지 헌법 상 ‘현인신(現人神)’ 천황으로 바꾸어 놓고자 하는데 있다.
그밖에 미 점령당국 GHQ는 일본민주화 정책아래 노동삼법을 마련해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인정하는 등 노조를 활성화 시켰다. 전후 일본의 노조운동을 활성화시킨 주역은 GHQ 노동과의 씨어도르 코언(Theodore Cohen) 과장이었다. 그가 남긴 자전적 저서인 <일본의 재건설: 미 점령의 뉴딜>(Remaking Japan: The American Occupation As New Deal, 1987)은 전후 일본의 노조를 일군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어 일본 전후사의 소중한 기록이다.
또 하나 주목할 기록은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 수상의 행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지듯이 요시다는 맥아더 점령아래 일본을 이끌었던 보수원조의 정치인이다. 그는 맥아도 장군에 끈질 지게 일본공산당 불법화를 요구함과 더불어 노조를 일본공산당과 연계된 하수인으로 보아 백안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의 요구를 듣지 않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적색숙청(red purge)’으로 대응하는데 그쳤다. ‘숙청’이라고 해도 그것은 공산당원의 공직추방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일본공산당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아래 일본 점령이 끝나자 합법정당으로 정치의 장으로 부상했다.
글쓴이는 맥아더 장군에의 일본민주화의 공과(功過)를 따진다면 다대한 공으로 일본공산당을 살려 둔 것이라고 보고 싶다. 일본공산당은 자민당의 일당독주 또는 극우화를 견제하는 보루일 뿐만 아니라 다당제 민주주의를 실현키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와 다투는 유명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의 책임을 묻는 올바른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일본공산당이다. 과는 아무래도 쇼와 천황을 전범에서 풀어준 면죄부일 것이다.
■ 후테이노야카라(不逞の輩): 관동대지진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악소문 퍼트려
앞에서 요시다가 일본공산당을 불법화하려 했던 행적을 언급했지만 노조도 공산당 못지않은 표적이었다. GHQ 노동과장 코언 과장의 저술에 의하면 요시다는 코언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해 맥아더 장군에 주의를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무엇보다 글쓴이의 눈길을 끄는 것은 요시다가 노조의 제네스토[총파업]를 앞두고 1947년 새해 첫날 라디오 방송에서 노조 지도자들을 일컬어 ‘후테이노야카라(futei no yakara)’라고 불렀다는 것이다(Cohen, 위 책, 276).
후테이노야카라(不逞の輩)란 무슨 뜻인가. 사회질서를 아랑곳 하지 않고 함부로 날뛰는 무뢰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상종 못할 깡패거리란 말이다. 이것은 일본 우익보수의 원조 요시다가 당시 노조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말해준다.
일본사회에서 ‘후테이(不逞)’는 금기어다. 그러나 이 ‘후테이’가 이른바 ‘쵸-센징(朝鮮人)’에 덧씌우는 인종 차별어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어쩌면 일본 사회의 주술적 인종 차별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이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을 때 당시 군국주의 일본의 매스컴은 이들 조선인을 가리켜 ‘후테이노센진(不逞の鮮人)’이라고 매도한다. 이어 ‘후테이노센진’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에 다시 등장한다. 매스컴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폭탄을 가지고 우리 마을을 습격하고자 한다” 고 선동 ‘데마’[유언(流言)] 퍼뜨렸다. 이 데마를 퍼뜨리는데 앞장선 장본인 중 한 사람이 당시 경시청 관방주사(官房主事)이자 뒤에 요미우리신문의 사주가 된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郞)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이 터무니없는 데마 캠페인으로 ‘후테이노센진’이라는 주홍글씨로 덧씌운 조선인이 떼죽음을 당했다. 일본 곳곳에서 경찰·군대가 직접, 자경단이라는 관변 폭력조직이 거의 6천명에 달하는 조선인을 집단 학살을 저질은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백주에 일어나는 ‘조선 놈 죽여라’라고 외치는 헤이트 스피치의 원조가 바로 ‘후테이노센진’인 것이다.
■ 부라쿠민(部落民): 메이지 말기 관제 차별어 만들어져
‘훗데이노센진’에 버금가는 차별어가 이른바 ‘부라쿠민(部落民)’이다. 부라쿠라는 말은 본래 농촌지역의 집락(集落)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메이지 말기 관제 차별어로서 ‘특수부락(特殊部落)’이라는 말이 만들어져 이것이 차별어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 ‘부라쿠민’은 일본사회의 천민 그룹이다. ‘부라쿠민’들은 조선 시대 ‘망나니’처럼 죄인의 목 자르는 일, 백정과 같이 우마의 사체를 처리하는 일 등 천한 일을 직업으로 대대로 해 왔다. 따라서 이들은 ‘에타(穢多)’ ‘히닌(非人)’ 불려 차별받고 있었던 사정이 있었다.
‘특수부락’이란 말이 관제 차별어로서 의미 짓게 된 사정은 어렵지 않게 헤아려진다. 「“저 사람들은 우리들과 무엇인가 다른 특수한 사람들이어서 차별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본래 가지고 있다”와 같은 함의-울림(含意·響き)이 들어가 있다」(福岡安則, 1984, 17)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부라쿠민’ 집단은 예컨대 그들 자녀들이 나쁜 핏줄을 이었다는 이유로 성혼의 어려움을 겪는 등 각가지 사회적 차별의 표적이 되었다. 취업이나 학업, 또는 영업에서 부당한 차별받는다. ‘부라쿠민’ 자체가 차별어가 된 것은 ‘쵸-센징’이 차별어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들 ‘부라쿠민’들은 마치 조선시대 천민이 된 백정, 무당, 도공 등과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부랑인들이었다.
글쓴이는 앞에서 ‘쵸-센징’이 ‘후테이노센징’이 된 것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매스컴이 있었다고 짚었다. 지금 일본의 매스컴은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주박(呪縛)에서 벗어났지만 ‘쵸-센징’의 현대판인 ‘자이니치(在日)’라는 주박 관에서 벗어났는지 의문이 든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조선인 차별보도: 바카쵼, 어느 틈에 조선인 차별어 전이
일본 매스컴은 재일 조선인 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거의 모든 경우 ‘○○○○こと△△△’라고 먼저 ‘일본 명’을 쓴 뒤에 ‘고토(こと)’를 적고 ‘한국 또는 조선 명’을 병기한다”(田口純一, 1984, 168)는 것이다. 이 경우 ‘고토(事)’란 앞 이름과 뒤 이름이 같은 것이지만 뒤 이름이 올바른 것이라고 알려주는 표현법이다.
다시 말하면 앞의 일본 명과 뒤의 조선 명은 같은 것이나 뒤의 조선명이 올바른 이름이라고 시사하는 어법이다. 제일 한국인은 거의 일본사회의 차별관에 시달린 나머지 본명을 숨기고 일본 명을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재일 한국인이 악행을 저지른 경우와 선행을 베푼 경우를 구별하여 범죄와 같은 악행을 저질렀을 때 으레 앞에 일본 명 ‘○○○○’를 적고 뒤에 한국 명 ‘△△△’을 병기해 은연 중 범죄와 같은 악행을 재일 조선인에 덧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예컨대 ‘김교본(金橋本)’이라는 재일 한국인이 사기죄를 저질렀다고 치자.
이 경우 일본 매스컴은 김교본의 일본 명 ‘하시모토’라고 적고는 ‘고토’ 그리고 한국 명 ‘김교본’이라고 보도한다는 것이다. 이 보도를 접한 「일본인 독자 대중은 “역시 조선인은...”이라고 받아들이고 만다는 것, 적어도 그런 우려가 농후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田口純一, 위 글, 171)고. 「일본인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하는 경우 “역시 일본인은..”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아 당장 그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 개인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는 대조적이다. 문제는 이런 유의 보도가 재일 조선인 집단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의식과 편견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위 글, 같은 면).
반대로 선행을 베푼 경우 일본 명 ‘○○○○’만을 적는 다는 것이다. 실제 1983년 9월 20일치 <츄니치>(中日) 신문을 보면 재일 한국 기업인에 관한 기사에서 “일한친선의 역할을 위해 재인한국인 사장 오카자키(岡崎) 다시 레크 시설[レク 시설이란 리크리에이션 시설의 일본식 약어로 복지 시설이라는 뜻--글쓴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이 기사는 “이 사람은 카리야(刈谷)시... ○○통상의 ○○○○[일본 명] 사장(58). 재일 37년의 일본통”이라고 쓰고 있다. 예상대로 ‘일본 명’ 만 적고 ‘고토’는 적지 않고 있다. 위 글의 저자인 다구치 스미카즈는 이렇게 비평한다.
재일 조선인[한국인]이 이른바 ‘좋은 일’을 했을 때에는 ‘민족명’을 숨기고 ‘일본 명’만으로 보도하고, 반대로 나쁜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일본 명’뿐만 아니라 ‘민족명’도 들추어낸다고 하는, 가려 쓰는 보도스타일은 ‘고토’가 단순한 ‘사실’보도는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말해 준다고 할 수있다(田口純一, 위 글, 169).
다음으로 ‘바카쵼(バカチョン)’이라는 말의 사용례를 보자. ‘바카쵼[바보 멍청이]’은 ‘바카데모쵼데모(バカでもチョンでも)’라는 표현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왜 이 말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어로 쓰이는가? 본래 ‘쵼(チョン)’이란 말은 ‘진지하지 않은 것’ 또는 ‘머리가 나쁜 것’[<日本国語辞典>, 小学館]이라는 뜻이기에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는 언 듯 보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어떤 말이 관계의미는 그때그때 사회적 규정성을 띤다. 이런 맥락에서 후쿠오카 야스노리(福岡安則)는 “예컨대 현대 젊은 세대들은 ‘쵼’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라고 질문은 던진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분석을 내린다.
학생들의 리포트 등을 참조하는 한, 한편으로 ‘쵼’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바보(ばか)’나 ‘얼치기(のろま[野呂間])’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습관이 거의 소실됨과 더불어 ‘쵼’라는 말에 대해서는 의미를 모르는 채 ‘바카데모쵼데모’라는 말이 근사한 어조라고 즐기는 자가 있다. 다른 한편 ‘쵼’이란 재일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배워 익힌 자가 상당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학교 학생에 대한 ‘쵼코-’라는 차별어가 다시 약어화(略語化) 되어 젊은 세대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포함하는 한, 그 본래 뜻은 어쨌든 ‘바카쵼’이라는 말이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어 라는 판단은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갖는 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福岡安則, 1984, 32~33).
‘바카쵼’이라는 말이 사전적 의미로 조선인과는 상관없는 ‘바보 멍청이’이지만 그것이 어느 틈에 조선인에 대한 차별어로 전이된 것을 위 글은 짚고 있다. 그렇게 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다음 글 ‘속 차별어’에서 살펴보자.
참고문헌
Theodore Cohen, <Remaking Japan: The American Occupation as New Deal>, The Free Press, A Division of Macmillan, Inc. New York, 1987
磯村英一·福岡安則, <マスコミと差別語問題>, 明石書店, 1984
八木晃介, <反差別メデイア論>, 批評社, 1980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