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깡패나 폭력배보다 조선인이 무섭다”
1921년 11월 4일 당시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 1856~1921)가 도쿄역 남구(南口)에서 한 청년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암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범인을 포박한 형사가 대뜸 “너 쵸-센징이지”라는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사실 범행을 저지른 건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 청년이었지만 경찰은 반사적으로 범인을 조선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경찰뿐만 아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은 하라 수상의 암살을 호외(戶外)로 전하면서 “하라 수상 센징(鮮人)에 찔려/도쿄역전에서 쓰러져” “돌연 군중 속에서...14~15세 조선인 풍(朝鮮人風)의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大阪朝日新聞, 1921년 11월 4일치 호외]라고 쓰고 있다. 이런 선입견에 의한 오도가 “두려운 존재로서 조선인의 이미지를 널리 번지게 한 것”(水野直樹·文京洙, 2015, 20)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1923년 9월 일어난 칸토 대지진 때 ‘후테이노센징’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등 터무니없는 데마로 조선인이 일본 곳곳에서 떼죽음을 당한 참극을 일깨웠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건을 예외로 치더라도 ‘두려운 존재로서 조선인의 이미지’는 일본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도대체 이런 조선인의 이미지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날 리가 없다. 재일작가이자 고대사 연구가인 김달수는 조선인에 대한 이런 유령 이미지가 일본사회에서 생겨나는 까닭을 생생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는 “수년 전의 일, <아사히저널>에는 「학교를 연다」라는 난이 있었는데, 거기에 ‘고교생의 조선관’이란 것이 실린 적이 있다”다며, 이를 상세히 인용하고 있다(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9, 1992, 194~195). 그것이 다름 아닌 다카마츠(高松)시의 한 고교 학생들이 지닌 조선관이었다.
■ 다카마츠 고교생의 조선관 “90% 이상이 편견과 멸시에 가득 차 있다”
“요즘 다카마츠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조선에 관한 의식조사를 한 결과 고교생들이 놀랄만한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조선이라든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고 당신은 어떤 이미지를 가집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회답을 적고 있다. 즉 “3학년생 약 200명의 대답 중 90% 이상이 편견과 멸시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회답 중에는 「어둡다, 음울하다, 비굴하다, 더럽다, 촌스럽다, 가난하다, 처량하다, 불쌍하다. 무섭다, 열등하다, 낙후돼 있다, 야만, 비문명국」 등의 말이 범람하고 있었다.”
다카마쓰(高松)라면 조선 도래인이 그리워하는 지명의 여운을 남기도 있다. 다카마츠는 카가와(香川) 현 사누키(讚岐)에 있는 지역으로 도래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한 독자가 김달수 씨에 보낸 1985년 5월 20일 치 <아사히신문>의 ‘지명을 찾는다=다카마츠’라는 스크랩에 의하면 ‘600m를 넘는 나무 그림자(樹影)/도래인이 사랑한 두 글자’라는 제하에 “고대에 왜 다카마츠(高松) 란 지명이 생겼는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승이 내려온다”라고 적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그 하나는 시사편수실에서 펴낸 <다카마츠 지명사화(地名史話)>가 통설로서 들고 있는 큰 ‘소나무 설’이다. 옛날 소나무의 거목이 높이 솟아 있어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소나무에는 가지나 잎이 무성해서 아침 저녁 해에 비친 그늘의 길이가 600m에 달했다. 사람들은 그 거목을 신목(神木)으로서 우러러 받들며 거목의 이름을 지명으로 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카마츠라고 불렀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현 다카마츠시의 닛타정(新田町)에 ‘마츠노우치(松の内)’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여기가 그 소나무의 거목이 있었던 자리일 것이다.
또 하나는 이쿠마 노부오(猪熊信夫) 씨의 <다카마츠 지명고>에 나오는 ‘도래인 설’이다. 도래인은 ‘다카(高)’라는 글자를 좋아하고 소나무를 사랑했다. 「다카(高)와 마츠(松 두 글자를 거주하는 지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카마츠에는 예부터 기라이(帰来)라는 지명이 이었다 귀화한 사람이 살고 있었던 곳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이카 개신(改化改新, 645년 나카오에(中大兄) 황자가 당시 권력자 소가 씨를 물리치고 내 세운 정치개혁--글쓴이) 때의 야시마 성(屋島城)은 이들 도래인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그 지명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金達寿, 앞의 책, 1992, 192~193)
조선 도래인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이 다카마츠에 들어선 고교생들이 조선인에 대한 ‘놀랄만한’ 차별의식에 차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문제는 조선인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터인 고교생들이 어떻게 이런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는가에 있다. 여기서 밝혀진 사실 또한 충격적이다. 밝혀진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말을 깔보며 쓰고 있던 것을 들었던 탓인지 역시 어딘가 조선 은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깡패나 폭력배보다 조선인 쪽이 무섭다고 합니다.
△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조선인에 대한 욕을 자주 들어 왔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조선인은 일본인보 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 사회적 병리 차별-원칙과 속마음은 다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말을 깔보며 쓰고 있었던 것’ 또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조선인에 대한 욕[惡口]을 자주 들어 왔기 때문에’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일탈행위하면 그런대로 무시할 순 있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즉 일본의 사회적 병리인 것이다. ‘주위 사람들’(周囲の人々)이란 다름 아닌, 일본 사회 자체를 말하며 ‘할머니에게서 들은 조선인에 대한 욕’은 손자에게 다시 그 자손에 이어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다카마츠의 한 고교생들이 지닌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란 일본사회 전체의 한 샘플에 지나지 않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답은 현 고교생이 차별하는 것을 머리 속에서 부정하면서도 전전(戰前)의 차별자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체질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이런 생각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좀처럼 버려지지 않습니다).
△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왠지 조선이라고 들으면 문명이 낙후된, 경멸해야 될 나라라는 이미지가 솟아납니다.
△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로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자신보다 낮은 사람, 야비한 인종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 나 자신도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좋아할 수 없습니다. 조선에 간 적도 없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떤지 본 적도 없는데 이런 말을 해서 인도에 어긋난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본심입니다.
나쁜 일이라고 말하면서 차별하고 있는 이 모순, 요컨대 원칙(たてまえ)과 속마음(本音)은 별개라는 것이다.
김달수는 한탄한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지난 30여년간 무엇을 가르쳐 왔단 말인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차별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확실하게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만으로 끝나버리고 구체적인 차별 실례는 무엇 하나 가르쳐 오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金達寿, 앞의 책, 1992, 195).
그렇다면 해결책은 영 없는 것인가? 다카마츠 일고(一高)의 교사인 조도 다쿠야(淨土卓也) 씨 등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일본과 한국을 연결하는 모임’[日本と朝鮮をつなぐ会]이라는 만들었다. 이 모임의 회지 <기즈나>(絆)를 출간하여 ‘시코쿠(四国) 속의 한국문화’라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것이다(金達寿, 앞의 책, 1992. 196). 우리는 이와 같이 양심적인 몇 명의 일본 지식인에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놓지 말아야 할 것인가.
참고문헌
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9, 講談社, 1992,
文京洙·水野直樹, <在日朝鮮人>, 岩波書店, 2015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