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이야기 21] 한국서 건너간 일본의 신앙 ‘원령’

  • 등록 2020.03.13 1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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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누구인가 4 ‘원혼’ 신앙이 일본 ‘원령’ 신앙으로 재탄생

 

일본에는 ‘고료-신코-’(御靈信仰, 이하 ‘어령신앙’)라는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은 비명에 죽은 사람의 영혼=어령이 무서운 지벌을 내린다고 두려워해 그 영혼을 달래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원령신앙’인데, 이 신앙이 생겨난 것은 기록으로는 8세기 말 시작된 헤이안(平安) 기 이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토(한국의 땅)에서 무교가 일본에 건너간 것이 야요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만큼 그때 무교에 내재한 원혼신앙도 당연히 건너갔을 것이다.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원혼(冤魂)신앙이 ‘원령(怨靈)’이란 옷을 입고 왜 땅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원혼이 천재나 역병 같은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원혼이란 한을 품고 죽었다든지 비명에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말한다.

 

그런데 왜 땅으로 건너간 원혼 신앙은 그 본고장인 조선과는 달리 ‘원령문화’로 꽃피웠다. 조선에서는 경직된 유교 이데올로기에 속박되고 핍박을 받는 신세로 전락돼 무교의 원혼신앙은 ‘무속(巫俗)’이라는 이름으로 사교(邪敎) 화 된 것과 대비된다.

 

일본의 민속학자로 이름난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는 신(神)이 되는 인간의 자격 조건을 두 가지 들고 있다. 하나는 높은 지위나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을 것, 다른 하나는 한을 남기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을 남기는 죽음이란 야나기타의 표현을 빌리면 “요슈우(余執=좀처럼 떠나지 않는 여한)를 남기는(余執を残す)” 죽음을 말한다. 그가 ‘신’이라고 했지만 한을 품은 신은 원혼에 다름 아니기에 원령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자격조건인 셈이다.

 

■ 원령문화, 신(神)이 되는 인간: 원혼이 아닌 원령

 

위에서 글쓴이가 왜 땅으로 건너간 원혼 신앙이 “원령문화로 꽃피웠다”다고 짚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뒤에서 살피겠지만 ‘원령’이 저 땅의 문학과 예술에 두루 모티프가 되었는가 하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원령’이라는 ‘원령사관’까지 등장하고 있다.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라는 철학자는 ‘원령이 된 일본인’(2008)이란 장문의 에세이에서 이 기준에 따라 30여 명의 역사적 인물을 들면서 그 중 대표적 예로서 카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麿),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세아미(世阿弥), 센노리큐(千利休)를 짚는다.

 

히토마로는 7세기 텐무(天武) 조에 출사(出仕)한 만요가인(万葉歌人)인데 물에 빠뜨려 죽이는 형[水死刑]을 받았다고 한다.

 

세아미는 14세기 무로마치(室町) 초기 전통 연극 노(能)의 작가로서 아리송한 정치범으로 몰려 도읍에서 먼 변경의 섬 사도(佐渡)로 귀양 가 죽었다. 하지만 히토마로는 가도(歌道) 또는 문학의 신으로, 세아미는 연극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는 당대의 지체 높은 다인(茶人)인데, 그를 다 선생으로 모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할복 형을 받아 죽었다. 그는 다도의 신으로 모셔지게 된다.

 

 

우메하라는 이들이 하나 같이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받아 비명에 죽은 원령이 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들에 죄를 내린 권력자에 두려움을 주어 제사를 받으면서 각각 분야에서 원조[祖]로 된 그들을 신으로 섬기는 것으로 문학이나 학문이나 연극이나 다도는 이 나라에서 훌륭하게 번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은 현실세계라는 짧은 시간 중에는 패배자[敗殘者]이었을지 모르지만 영원이라는 시간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학문이나 예술은 원령에 의해 영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梅原猛, 2008, 142).

 

■ 불운하게 죽은 뒤 원령이 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위에서 우메하라가 원령이 된 30여 명의 역사적 인물 중 스가와라노 미치자네(845~903) 예를 조명해 보자. 미치자네는 헤이안(平安) 전기 때 귀족 학자이자, 우대신(右大臣)에 이른 명문출신이며 대문장가로서 고대일본의 드문 현학적 인재이다. 그런 연고로 지금 일본인들은 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신다.

 

미치자네는 사누키(讚岐)의 지방관이었는데, 우다(宇多) 천황(재위 887~897) 시절 중앙으로 발탁된 인물로 한학에 밝은 유학자였다. 처음 쿠로도노토-(蔵人頭)로 임명되어 출세 길로 들어선 이래 우대신에 이르고, 드디어 곤다이나곤(權大納言)이라는 천황 측근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미치자네가 졸지에 당시 최고대신[筆頭公卿]인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가 꾸민 참언(讒言: 거짓 비방)에 역살을 맞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다이고(醍醐)천황의 연호를 따 ‘쇼오타이의 변’[昌泰の変, 이하 ‘창태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 사변의 배경을 보면 후지와라 정권이 꾸민 전형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 음모가 꾸민 참언에 의하면, 미치자네가 다이고 천황의 자리를 찬탈해 자신의 사위인 토키요(斉世) 친왕에게 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901년 이 무고로 인해 도읍지로 멀리 떨어진 큐슈의 다자이후(太宰府)로 좌천당하고 만다. 말이 ‘좌천’이지 이것은 유배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그의 네 아들 모두 유배에 처해졌다.

 

졸지에 역모의 살을 맞고 귀양살이에 처해진 미치자네는 본래 우다 천황의 총신이었다. 그런데 우다는 897년 느닷없이 황태자인 아쓰기미(敦仁)에 황위를 양위하여 미치자네는 하루아침에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 양위로 다이고 천황이 탄생되었다.

 

게다가 다이고 천황 2년 우다 ‘태상천황’이 불가에 출가해 승려가 되자 미치자네는 폭풍 앞에 선 외로운 등불이 된 것이다. 실제 그가 도키히라가 꾸민 참언에 얻어맞고 위기 몰리자 우다 상황이 다이고 천황의 다이리(內裏: 천황의 처소)에 왔으나 하루 종일 기다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미치자네는 불운하게 죽은 뒤 원령이 된 것이다. 그는 무고함을 여러 번 호소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좌천된 지 2년 만에 다자이후에서 실의에 빠져 한을 품고 죽는다. 곧 그는 원령이 된 것이다. 이 참언을 꾸민 장본인인 도키히라는 바로 당시 후지와라 정권의 실세로서 좌대신 후지와라노 타다히라(藤原忠平)의 실형이었다. 타다히라도 이 음모에 가담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 무서운 지벌, 미치자네 사후 한 스님 앞에 영혼 등장 “복수하겠다”

 

이제 전승이 전하는 미치자네의 지벌을 되돌아보자. 지벌은 신(神)이나 부처에게 거슬리는 일을 저질러 당하는 벌을 가리킨다. 한국의 경우 서낭당 등에서 귀신이 병이나 벌을 내리는 것등이 대표적이다.

 

이 지벌은 미치자네가 903년 죽은 직후 한 스님의 눈앞에 영혼으로 나타나 “지금부터 나를 좌천시킨 자들에 복수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시작된다. 그 스님이란 히에이산(比叡山)의 엔레키지(延曆寺, 천태종의 총본사)의 제13주지[座主]스님인 홋쇼-보-손이(法性房尊意)라 한다.

 

미치자네의 혼령은 복수를 다짐하면서, “만약 그 자들이 도움을 요청해도 응하지 말아 주시오”라고 알렸다는 것이다. 난처해진 스님은 엉겁결에 “그러나 천황이 세 번 부탁하면 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냉정히 대답했다. 그러자 혼령은 “당연하다”고 답변해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미치자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석류 과실을 대접했는데, 혼령은 먹은 석류를 불로 토해내 노여움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제 미치자네의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된다. 먼저 906년 후지와라노 사다쿠니(藤原定國)라는 조정의 관인이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한다. 그는 미차자네를 유배시킨 음모에 가담한 인물이다. 이어 908년 후지와라노 스가네(藤原管根)가 벼락을 맞고 사망한다. 스가네는 우다 상황[宇多上皇]이 미치자네가 억울하게 유배되자 이를 따지겠다며 다이고 천황을 만나러갈 때, 그의 손을 잡고 말렸다는 인물이다.

 

유배음모의 당사자인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의 경우 더욱 끔찍한 지벌을 당한다. 설화에 의하면 도키히라의 양귀에서 뱀으로 변한 미치자네가 나타나 이를 퇴치하게 위해 여러 가지 기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효과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미치자네의 혼령이 “비켜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기도사들이 맥없이 도망갔다고 한다. 그 뒤 도키히라는 미쳐 날뛰다가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다이고 천황의 두 황자가 어린 나이에 923년과 925년 까닭 없이 죽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지벌은 930년 6월 26일 대낮에 일어난 낙뢰 사건이었다. 천황의 궁중 처소인 세이료-덴(淸凉殿, 이하 ‘청량전’)에 굉음을 내며 벼락이 내리친 것이었다.

 

그때 청량전에서는 타다히라 비롯한 대신들이 농사철에 들어와도 그치지 않은 장마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오후 한 시 경 아타고 산(愛宕山) 위로 먹구름이 덮이더니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청량전 서남쪽 기둥을 내려쳤다. 다이나곤(大納言)이었던 후지와라노 키요쓰라(藤原淸貫)는 옷에 불이 붙고 가슴이 찢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밖에 몇몇 대신이 얼굴이나 머리에 불이 붙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이것은 유례없는 참변으로 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 벼락에 놀란 천황 그 자신도 몸이 망가지고 병이 들어 석 달 뒤 겨우 8세의 어린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된다. 그 일주일 뒤 다이고 천황마저 46세에 죽고 만다.

 

이것은 “미치자네의 원령이 뇌신이 되어 우리 일본에 신벌(神罰)을 내린 것에 틀림없다”고 대신들이 수군거렸다. 후지와라 조정은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이 모두 미치자네를 참언하거나 그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어서 미치자네가 지벌을 내린 것은 당시 고대 왕정의 지도자들로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과연 미치자네는 위대한 지벌신이 된 것이다.

 

이상이 미치자네가 내린 지벌 이야기의 줄거리인데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전승을 우스개로 넘길지 모르지만 당시 고대인들이 원령의 지벌을 믿었던 시절이다.

 

■ 기타노텐만궁-노미치자네 원혼 진혼을 위해 창건 ‘숭신’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기타노텐만 궁(北野天滿宮)의 창건 전승이다. 이 신사는 스가와라 노미치자네의 원혼을 진혼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것은 미치자네가 903년 죽은 지 거의 반세기 지나서 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 궁의 창건 전승에는 무녀의 신탁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이 무녀가 다시히노 아야코(多治比文子)라는, 헤이안 경 서쪽 끝에 사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고 한다.

 

942년 어느날 밤 무녀가 잠결에 미치자네의 혼이 현몽하여, “내가 옛날 살아 있을 때 요 바로 오른쪽 마장(馬場)이 있는 곳으로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거기에 가면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원한의 불이 쉬고 있다. 빨리 그곳에 사당을 지어 내게 제사 지내주게나”고 공소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무녀는 가난한 처지에서 마장에 사당을 지을 수 없어 자기집 한구석에 작은 사당을 지어 미치자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5년 뒤 947년 오미국(近江國: 지금 시가현)의 오미히라신사(近江比良神社) 신관의 아들에게도 다시히노 아야코에 내린 것과 같은 공소가 내렸다. 그 신관이 놀라 그 마장에 있는 아사히테라(朝日寺)의 주지와 의논한 결과 다시히노 아야코 집에 지은 사당을 마장으로 옮겨 신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당시 우대신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師輔)가 947년 그 신사를 정비해 오늘의 기타노텐만 궁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로스케는 미치자네에 대한 참언 음모에 가담한 타다히라(忠平)의 아들이었다.

 

이와 같은 기타노텐만 궁을 짓게 된 경위를 되돌아보면 미치자네의 원령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해도 한 무녀의 공소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민간의 원령 신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배자의 치세전략과 결부되는 원령사관과는 동떨어진 민간신앙에 의한 원령의 진혼 사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뒤 약 100여 년 동안 대재앙이 일 때마다 미치자네의 지벌을 두려워했는데, 서민들은 미치자네를 ‘텐신사마(天神樣)’로 부르며 숭경하면서 이 신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은 성덕태자를 떠받드는 ‘태자신앙’에 다름없는 것이다.

 

지금 신사본청이 낸 자료에 의하면, 미치자네를 제사 지내는 텐만궁의 수는 전국적으로 1만 441좌에 이르는데, 이는 이나리(稲荷) 신사, 하치만 궁에 이은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이들 신사들은 본사인 교토의 기타노텐만궁과 후쿠오카의 다자이부 텐만궁에서 이른바 ‘권청(勸請)’된 분사들이다.

 

조선 왕조의 경우 야나기타의 기준에 의하면 원령신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던 승 보우(普雨)일 것이다. 명종(1545~1567)의 섭정이었던 문정왕후는 보우에 불교 진흥의 임무를 맡기고 도첩제를 시행하는 등 불승을 배출하는데 힘썼지만 그 사후 보우는 ‘요승’에 몰려 제주도까지 피했지만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무참히 장살(杖殺) 당했다. 그러나 보우는 미치자네와는 달리 ‘신’은커녕 ‘요승’으로만 기록된다.

 

 

■ 숭신과 요신-조선의 보우는 '신'은 커녕요승...팔공산 갓바위는 대학합격 기도장

 

이렇듯 미치자네의 원령신앙은 널리 번져 있지만 한편 그는 어느 사이 학문의 신이 되어 입학 시즌이 되면 학부모가 구름처럼 모여 자녀의 어느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장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수능시험을 앞두고 학부모들이 대구 근교 팔공산 오르막길 갓 바위 돌부처에 기원을 올린다. 현해탄 양편의 학부모가 자식의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은 기타노덴만궁은 장대한 신사이지만 팔공산 갓 바위 돌부처는 풍설에 노출된 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기타노덴만궁이 모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원령신앙으로 우러르는 ‘숭신(崇神)’인 반면 학부모들이 엿을 부쳐 기원하는 갓바위의 돌부처는 유가들이 멸시하고 천시하는 ‘요신(妖神)’으로 치부된다는 점이다.

 

한토의 무교에 기원하는 원령신앙은 어엿한 신도 종교로 승화된 반면 무교의 본고장인 조선에서는 유생들이 무교의 사당을 불태우고 무교들을 도읍에서 쫓아내고 만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 만해도 성수청(星宿廳)에 국무(國巫)를 두고 나라의 안위를 점치고 농사를 위한 기우제를 지내는가 하면 왕실의 의료를 전담했다. 그러나 유교국가는 그들 무녀들을 어느새 ‘요망한 무당’을 만들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梅原猛, <神と怨霊>, 文藝春秋社, 2008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정리=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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