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이야기24] 일본인은 누구인가 7: 일본인의 신앙:이세신앙(伊勢信仰)
에도(江戶)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천황이 등극하기 바로 전 해 이른바 ‘에에자나이카(ええざやないか)’ 소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에에자나이카’ 소동이란 에도막부가 무너지기 ‘전야’ 1867년 여름 돌연 전국 각지에서 분출된 민중 아노미 현상이다.
전국 농촌 도회의 민중은 하늘에서 ‘천조황태신궁(天照皇太神宮)’ 또는 ‘태신궁(太神宮)’라고 적힌 신의 부적[神札]을 비롯해 유명 신사나 절에서 부적이 내려와, 이것이 세상을 뒤엎는 신탁(神託)을 내린 것이라고.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밑바탕에 깔려있는 이세신앙(伊勢信仰)이다.
이 말 같지 않은 구호 소동의 결과 한 연구자가 말하듯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신덕으로 대번에 세상을 바꾼다는 신정(神政)에의 여망이 광범하게 사회 밑바탕에 깔리게 되었다.
광란의 민중은 “에에자나이카”[좋지 않습네?]로 끝나는 비속하고 허접스런 문구를 외쳐대면서 맨발로 지주나 호상의 집으로 마구 들어가 술과 밥을 내놓으라고. 소작인이 지주 집에 들어가 술과 밥을 내오라고 하면서 “좋지 않습네?” 하는 식이다.
즉 신분을 기반으로 하는 옛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이 난중행동을 두고 “전국 각지에서 기성의 질서를 혼란에 빠트려 봉건 지배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村上重良, 1970, 83)고 짚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이 천황의 조상신 천조대신의 신덕(神德)으로 대번에 세상을 바꾸려는, “신정(神政)에의 여망이 널리 사회 저변에 형성되었다”(위 책, 83)는 것이 사실이라면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여긴 ‘신정’의 출현은 예고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메이지 왕정의 책사들은 1889년 2월 11일 선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이하 ‘제국헌법’ 또는 '메이지 헌법‘)을 선포하고 학문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조항을 넣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용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는 제국헌법 제1조이다. 이 조문이 말하는 ‘만세일계의 천황’이란 <기기> 천손강림 신화에 나오는 ‘천양무궁의 신칙(神勅)’을 가리키며 그것은 곧 신정 체제라는 데 의문을 던질 수 있을까. 실제 국가신도 옹호론자들은 이렇게 내세운다.
천황은 천조대신이라는 신적 기원과 계보를 갖는 존재이며, 그와 같은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의 제사는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황실제사는 일본국가 통합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온 나라의 신들은 이세신궁 및 궁중삼전에 진좌하는 천조대신을 정점으로 한 신들의 체계로서 한 몸을 이룬다. 전국의 신사에 진좌하는 신들은 이세신궁과 황실제사를 주축으로 조직화되고 국가제사 체계로 편입된다. 신적기원을 갖는 천황과 국민 사이에는 여느 국가와 다른, 아주 신성한 천륜의 유대[絆]가 있으며, 예부터 이 유대에 의해 왕조교체 없는 국가체제가 지켜져 왔다. 이것을 ‘만세일계의 국체’라고 부르는, 더할 나위없는 존귀한 전통이다. 국민은 황실제사에 참여해 국체사상에 의한 도덕을 몸에 익혀 천황 숭경심을 길러야 한다(島薗進, 2010, 59).
이것은 메이지 왕정의 신정 체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정치선전’에 다름 아니지만 그 논의는 여기서 끝내고 이번 이야기의 주제인 이세신앙으로 들어가 보자. 이세신앙의 형성 과정이나 ’이세‘라는 언어의 의미를 보면 이 신앙에 근저에는 세 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아라비토카미(現人神)로서 천황을 받드는 이른바 ’국가신도‘적 요소, 다음으로 민중 신앙적 요소,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시라기(新羅)‘에서 발원하는 근원적 요소가 그것이다. 글쓴이는 일본 천황제의 국가신도적 요소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론했으므로(김정기, <일본천황, 그는 누구인가>, 푸른사상, 2018) 여기서는 민중 신앙적 요소와 근원적인 ’시라기‘ 요소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 민중신앙 '이세신앙'의 본가는 '이세신궁'
이세신앙의 본가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미에현(三重県)에 들어서 있는 이 신궁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御大神, 이하 ‘천조대신’)으로 상징되는 신사이다.
좀 더 부연하면 내궁과 외궁을 합쳐 이세신궁이라 부르지만 내궁 고다이신궁(皇大神宮)은 천조대신을 제신으로, 외궁 토요우케대신궁은 토요우케대신(豊受大神)을 제신으로 받든다.
이세신궁의 본체는 내궁과 외궁이지만 그밖에 이소궁(伊雑宮)이라든가 쓰키요미궁(月読宮) 같은 별궁이 14개나 있고, 섭사-말사까지 합치면 125개사에 이른다. 이세신궁을 본가로 하는 이세 신앙의 민중 신앙적 요소는 무엇보다도 한 해 참배객이 수백만에 이르는 것에서 간파할 수 있다.
실제 헤-세-(平成) 22년[2011]에는 과거 최고 기록인 연간 900만 인에 육박하는 참배객이 방문했다. 이 숫자는 인구 약 3000만 조금 넘는 에도 시대 말기에 “이세에 가고 싶다. 이세지(伊勢路)가 보고 싶다. 하다못해 일생에 한 번이라도”라고 읊조린 ‘오이세마이리(お伊勢参り; 이세참배)’에서 전국에서 400만 인 이상이 방문했다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 당시의 인구 비율로 견주어도 기록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山村明義, 2011, 261). 이것은 이세 신앙이 민중 사이에 형성된 민중 신앙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이 민중 신앙이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을까? 일본의 중세에 거슬러 올라가면 이세신앙이 형성된 역사를 간파하게 된다. 내궁과 외궁의 신직들이 그들의 믿음에서건, 생활 수단에서 건 이세 신앙을 민중 사이로 전파시키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즉 이세신궁의 신직단이 이세신앙의 전도사의 몫을 한 것이다. 부연하면 내궁의 아라키다(荒木田)씨와 외궁의 와타라이(度会)씨가 각각 이끄는 신직단의 활동에 의해 이세신앙의 민중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글쓴이는 와타라이 씨나 아라키다 씨가 모두 한반도에 유래한 씨족이라고 이전 이야기에서 일깨웠지만 그것은 뒤에 살피는 이세신앙의 발원지 신라와 관련된다.
가마쿠라시대에는 두 궁의 신직인 네기(禰宜)와 곤네기(權禰宜) 약 200명 가량이었다. 이 신직(神職)들은 각각 귀족과 무사들 사이에 이세신앙을 전파했으며 그들을 위해 현세이익적인 기도를 대행해 주었다. 또한 이 신직단은 각지에서 토지를 기부 받아 신궁 영지를 확대해 나갔고, 이렇게 확보된 각지의 신궁 영지마다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명사(神明社)를 세웠다.
이때 각지에서 신궁을 참배하러 온 사람들은 각기 연줄 있는 신직의 알선으로 숙박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로 인해 하급 신직이 경영하는 숙소가 제도화되었고 그런 숙소의 주인은 온시[御師]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에는 이세신앙의 민중화가 보다 진전되었으며 승려 등을 지도자로 하는 무사, 농민, 상공민들의 코-(講: 불전을 강론하는 법회)이 각지에 성립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온시 등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향촌과 마을 단위의 이세코-(伊勢講)을 조직하였고, 민중의 이세신궁 참배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전국시대(1467~1568)에는 도호쿠(東北)지방에서 큐슈에 이르기까지 참궁이 행해졌으며 에도 초기에는 각 마을마다 ‘이세 춤’이 퍼졌다. 앞서 언급한 이세마이리가 에도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배경 아래에서였다.
이와 같은 신직단과 온시들의 활동에 의해 이세신궁은 새로운 민중적 기반을 확보했으며 내궁과 외궁의 영지도 정비되었다. 오늘날 신궁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삼나무들도 이 시기에 식목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세신궁의 새로운 번영은 내궁과 외궁 사이의 심각한 대립을 초래했다. 이세신궁은 율령 국가 하에서 조정에 의지하여 번영했지만, 봉건 사회가 성립하자 이제는 신직들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 이세신궁은 ‘소’의 궁: '소'는신라, 이세신궁은 서라벌 무녀의 사당
신라의 본래 이름(原戶)가 ‘소’이다. 이를 밝힌 사람은 옛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이었지만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준 사람은 재일작가이자 고대사 연구가인 김달수(金達寿)씨였다.
이세 국인가 이세신궁인가는 어쨌든 나는 조금 이세와 조선의 관계에 천착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이 아시다 시피 일본의 고대사에 대해서는 남북 조선에서도 여러 가지 연구를 해오고 있고 그 중에는 재미있는 의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일본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예컨대 언어학자 가나좌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의 그것에 의해 이세라고 하는 지명을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세의 ‘이’ 또는 아소(阿蘇)의 ‘아’라는 것은 오래 전 아라이 하쿠세기(新井白石) 등이 말하고 있습니다만 발어(發語) 즉 접두어인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소’입니다. 이 ‘소’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까 신사의 발생에서 언급한 신라와 관계가 짙은 것입니다. 조선어에 의한 국명, 지명의 해석으로 되는데 조선의 新羅는 ‘신라’라고 읽는데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라(羅)’ ‘야(耶)’ ‘나(那)’는 고대 조선어로 토지, 즉 국토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고대 일본의 수도인 나라(奈良)은 국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라는 사로족(斯盧族)이 건국한 나라라는 것이 됩니다만 조선어로 말하면 사족 또는 소족이 됩니다...
풀이하면 이 소족의 이동이라는 것으로 여러 가지의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대 조선의 소족의 나라로 소족의 이동은 일본의 지명 국명에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하나 주의하고자 하는 것은 이 ‘소’에 속하는 ‘사’ 행의 음은 ‘다’행의 그것과 쉽게 전화(轉化)된다는 것입니다. <니혼쇼키>에 나오는 쿠니노도코다치노카미(國常立神)은 쿠니노소코다치노카미(國底立神)이라고도 한데다가, 동시에 <일본서기>에서는 아마노도코다치노카미(天常立神)은 <성씨록>에서는 아마노소코다치노카미(天底立神)이 되고 있습니다...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큐슈의 중요한 나라인 이토국(伊都國)의 ‘이토’와 ‘이세’와는 실로 같은 명칭이었다고 가나좌와 쇼-자부로 씨는 적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소족의 이동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재미있었던 것은 타니카와 씨가 말씀하신 이소베(礒部)의 伊雜宮--이것은 ‘이사와노미야’라고도 불러지고 있습니다. 그 고장 사람들은 보통 ‘이조구-’ ‘이소구-’라고 합니다만 이것도 ‘이’가 접두어라고 하면 즉 ‘소의 궁’입니다.
그 이조궁을 보고 나는 매우 감동한 것입니다. 나는 최근 일 때문에 큐슈로부터 칸토-까지 신사 신궁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이조궁 만큼 감동한 신사는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조신묘(祖神廟)의 이미지 그 자체를 지녔기 때문이지만 그것이야 말로 신사가 되는 것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金達寿, 1986, 91~93).
이전 이야기에서 이세신궁의 제신 천조대신의 별명이 세오리츠히메(瀨織津姬)가 ‘소우리츠히메(都つ媛)’ ’소우리츠히메(京つ媛), 또 다른 별명 ‘오히루메무치’ 즉 귀하디귀한 무녀의 뜻을 지닌 말이라는 것을 아울러 생각하면 천조대신이야말로 서라벌의 무녀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세신궁은 서라벌 무녀의 사당이라는 뜻에 다름없게 된다.
참고문헌
金達寿, <古代朝鮮と日本文化: 神々のふるさと>, 1986
村上重良, <國家神道>, 岩波書店, 1970
島薗進, <国家神道と日本人>, 岩波書店, 2010
山村明義, <神道と日本人: 魂とこころの源を探して>, 2011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