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이야기27] 신라와 깊은 인연을 가진 하치만 신

  • 등록 2020.05.29 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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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누구인가 10: 일본의 신앙: 하치만 신(八幡神)과 가라구니의 신묘한 무녀

 

일본인은 누구인가 10: 일본의 신앙: 하치만 신(八幡神)

 

북 규슈 오이타(大分) 현 우사(宇佐)시에는 ‘우사하치만궁(宇佐八幡宮)’이라는 호장한 신사가 들어서 있다. 우사지역은 옛날 토요쿠니(豊国, 이하 ‘풍국’, 뒤에 후젠·후고노쿠니[豊前·豊後の国으로 나뉨])가 들어섰던 고장이다.

 

이 하치만 궁의 제신으로 오진(応神) 천황, 그 어미라는 신공황후(神功皇后), 히메신(比売神)을 모시고 있다. 부연하면 이 신사의 삼대 ‘어전(御殿)’, 즉 제일어전[一之御殿]에는 혼다와케노미도토(誉田別命=오-진천황)을, 제2어전에는 히메신(比売神)을, 제3어전에는 오오타라시히메노미고토(大帶姬命=신공황후)를 각각 모시고 있다.

 

우사하치만궁은 옛 문헌 <엔기시키> ‘신명장’에 ‘후젠국(豊前國)우사군 3좌’라 칭한, 하치만대보살 우사노미야(宇佐宮), 히메신사, 오오타라시히메뵤-신사(大帶嬉廟神社)라고 명기하는 고사이다. 여기서 먼저 하치만 신이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뒤에 살피겠지만 결론부터 미리 말해두면 한반도, 특히 신라와 깊은 인연을 가진 신이다.

 

■ 대보살 신앙 하치만신사, 총 2만5000사 거느려 전국 2위

 

일본 전국 각지에는 수많은 하치만신사가 진좌한다. 우사하치만궁과 이와시미즈하치만(石淸水八幡宮)을 총본사로 하는 하치만 신사는 총 2만5000사에 이른다.

 

이는 이나리(稻荷) 신사의 3만 2000사에는 못 이르지만 전국 2위다. 하치만 신은 옛날에는 ‘하치만 대신’, ‘하치만신’ 등으로 불렸고 그 사당은 하치만 신궁, 하치만 신사 등으로 불렸다. 우사 지명을 그 신명이나 신사 명에 덧씌우게 된 것은 조칸(貞觀)원년(859) 락난(洛南)의 이와시미즈(石淸水) 지역에 하치만 신을 권청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사 하치만궁과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이 일본의 하치만신의 대표적인 신사가 되었다.

 

 

하치만신의 신앙에는 꽤 일찍부터 불교 등과 습합이 있어 앞의 <엔기시키>에도 ‘하치만대보살 우사노미야(八幡大菩薩宇佐宮)’이라는 것도 보이고, 또한 쓰쿠젠국 나카군(那珂郡)의 ‘하치만대보살 하코자키노미야(筥崎宮)’ 등이라고 적혀 있듯이 대보살로서의 신앙이 겹치고 있다.

 

하치만이란 어의부터 살펴보자. 한자 八幡은 ‘하치만’이라고 읽는 방식이 통례이다. 그러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본래 읽는 방법은 <니혼료이기>(日本霊異記) 하권 제19화에 ‘야하타’(矢羽田)라고 기록된 대로 ‘야하타’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이 ‘야하타’의 신의 신격에 대해서 (1)농경신, (2)단야(鍛冶)신, (3)해신(海神) 설 등 여러 가지 논의되어 왔다.

 

각각 논거를 들고 있는데 ‘야하타’의 ‘하타’를 성령이 지피는 ‘깃대’[幡]에 유래한다고 간주하는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 설(‘밀교신의 탄생, <창조의 세계> 93호)는 새롭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

 

<스미요시대신기>(住吉大社神代記)에는 신공황후가 스스로 신주가 되어 탁선할 때 “치하타(天繪), 다카하타(高繪)를 가지고” 신을 부른다는, 가야금 노래 ‘첫머리와 끝머리’[頭尾]에 둔다고 기록한다.

 

<하치만우사궁탁선집>(八幡宇佐宮御託宣集)에는 ‘카라쿠니(辛[韓]國) 성(城)으로 하늘에서 내려온[天降] 8개의 펄럭이는 깃발[八流の 幡]이 있어 ’혼다(誉田)천황(오-진천황) 히로하타야하타마로(廣幡八幡麻呂)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탁선집>은 쇼오(正応) 원년(1290)에서 쇼와(正和) 2년(1313)에 걸쳐 미륵사의 으뜸 학승[學頭] 진운(呻吽)이 정리한 전승 사료집이다.

 

무엇보다 그 내용에는 가공이나 윤색이 있으며 사실(史實)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 경시할 수 없는 귀중한 전승도 있다. ‘하타’(幡)가 성스러운 제사의 제구(祭具)이며, 또한 신령이 지피는 매체[依り代(요리시로)]이었다는 것은 예컨대 <후젠국(肥前國)풍토기>의 키시군히메코소향(基肆郡姬社鄕) 조에 나오는 전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에피소드는 쓰쿠젠국(筑前國) 무나가카군(宗像郡) 사람인 카제코(珂是古)가 ‘깃발’[幡]을 들어 기도를 올리니 “진정으로 내 제사를 지내기 바란다면 이 깃발을 바람 부는 대로 가게 해 신이 진좌하는 부근에 내려라”라고 신탁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깃발’이 떨어진 곳에 의해 카제코는 제사를 올리는 신의 소재를 알았다는 이야기다.

 

■ 신라 계 씨족이 받드는 하치만 신

 

하치만 신이 누구인가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하치만 신을 모시는 제사 집단에 가라시마 수구리(辛[韓]島勝) 씨족이 있다는 점이다.

 

‘가라시마 스구리’라는 어의가 ‘한토의 시골 마을’[스구리=시골]에 유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사군가라시마향(辛島鄕)을 근거지로 하는 신라 계의 도래씨족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들은 하치만 신의 하후리(祝)·네기(禰宜)[하후리·네기는 신사 신직의 이름] 또는 무녀 등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앞에서 짚었듯이 이 고장은 풍국(豊国)이 번창했던 고장인데, 이 풍국은 신라 계 도래인과 인연이 깊은 지방국이다.

 

<일본서기> 요-메이(用明) 천황 2년[587] 4월 조에 요-메이 천황이 병상에 누웠을 때 ‘토요쿠니노호-시’(豊国法師, 이하 ‘풍국법사’)가 다이리(內裏=왕궁의 내전)에 왕을 뵈었다 (參入)고 기재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이 기사가 주목되는 점으로 이 스님이 병 치료 주법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이 스님에 법사(法師)라는 존칭을 주었다는 점이라고. 특히 병 치료의 주법은 풍국 고장의 샤머니즘과 불법이 겹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사회과학원의 김석형 교수는 ‘풍국(豊国)’의 훈독법에 주목해 이를 토요쿠니가 아니라 ‘카라쿠니’로 읽는다고 짚었다.

 

후쿠오까 현의 서쪽으로 린접하고 있는 지대에는 ···《히젠》, 《히고》의 두 개 지방(국)으로 불리였고 오늘의 시가, 나가사끼, 구마모도의 3 개 현을 포괄한다. 하나로 통틀어 부를 때는 이를 《肥》로 부르며, 이를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히》로 훈독하고 오늘에도 그렇게 읽는다. 그러나 《肥人》은 워낙 《히노히도》가 아니라 고훈(古訓)에는 《고마노-히도》였다고 한다(5). 따라서 앞서 쓴 바 《肥人》은 《고마히도》 즉 《고마》 사람인 것이며 《肥國》은 《고마》의 나라, 고마 사람의 나라였다...

 

《肥》를 《고마》고 읽었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豊》이라는 이름이 북 큐슈 동쪽 지역을 《가라》라고 읽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상 《肥》에 대해서 말한 것과 꼭 같은 말을 《豊》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고마》였던 《肥》를 《히》 읽듯이, 또는 《고마》라고 불이었던 지방에 《肥》자를 갖다 붙이고서는 《히》라고 읽어버리듯이 이 《豊》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일본사람들은 《도요》라고 읽어온다. 그러나 6세기 말에도 《가라》라고 읽은 적이 있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 북 큐슈의 동반부를 가라라고 부른 때가 있었던 것이다.

 

6세기 말에 야마도 왕정에서는 조선으로부터 건너간 불교를 접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소동이 일어났고, 이를 맹렬히 반대한 것은 모노노베(物部守屋)라는 당대 대 귀족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장을 《일본령이기(日本靈異記)》에 실었는데 거기서 불상(佛像)을 빨리 《豊國》으로 띄어 보내어 내버리자고 하였다(速急棄流乎豊國也). 그리고 《일본서기》 용명(用明) 천황 2년(587년)에 《천황》은 불교를 믿어보려고 신하들에게 의논하였는데 그의 아우는 《豊國法師》를 끌고 대궐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가노(狩野掖齊)라는 옛 학자는 고증에 의하면 《豊國은 가라구니(韓國)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豊國法師》는 가라구니의 중(韓國僧)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6) (김석형, 1966, 225~226).

 

 

위에서 김석형 교수가 ‘풍국(豊國)’의 ‘豊’을 ‘가라’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일본의 옛 언어학자 가나좌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가 고증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는 가나자와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반동이론’이라면서도 주석 (5)·(6)을 붙여 가나자와가 고증한 ‘豊’의 훈독법을 그대로 따온다. 그렇다면 ‘풍국법사(豊國法師)’는 그가 말한 대로 ‘가라구니의 중[韓國僧)’이 된다. 특히 주석 6에서 <일선동조론> 8쪽을 인요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또한 조선을 토요쿠니(豊國)이라고도 불렀다고도 생각된다.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 상권에 모노노베노모리야(物部守屋)가 불상을 나와와(難波)의 호리에(掘江)에 흘려보내라고 서술한 조에 나라에 일어난 재앙이 인국의 객신상을 나라 안에 두었기 때문에 객신상을 빨리 풍국으로 흘려보내자고 한 것과, 요메이(用明) 천황 2년기에 천황삼보(天皇三寶)에 귀의하려고 군신에 의논케 했을 때 황제(皇弟) 황자가 풍국법사를 끌고 내전에 들게 해 모노노베모리야가 크게 노했다는 것이 그것인데, 카노이쿠사이(狩野掖齊)의 고증에는 풍국은 모두 한국이다, 또한 풍국법사는 역시 한국승(韓國僧)이라고 해석하고 있다(金澤庄三郎, 1929, 8).

 

■ 가라구니 씨족 출신, 신라 계의 신묘한 무녀

 

그뿐만 아니다. ‘가라시마수구리(韓島勝)’ 씨족 출신의 ‘가라구니의 신묘한 무녀’(豊國奇巫, 이하 ‘풍국기무’) 가 나온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이즈미국(和泉国) 신별(神別), 즉 칸나기노무라지(巫別連) 조에 담은 ‘풍국기무’ 소전이 그것인데, 이 무녀가 유라쿠(雄略) 천황의 병 치료를 위해 출사(出仕)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속일본후기> 쇼와(承和) 12년 [845] 4월 조에도 발견된다. 이를 준거로 해 우에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짚는다.

 

풍국(豊国)의 샤머니즘이 조선반도의 샤머니즘과 연결을 갖는다는 것은 우사하치만 신이 무녀로서도 활약한 가라시마 스구리(辛島勝) 집단이 신라 계 도래씨족이었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上田正昭, 1996, 167).

 

옛날 풍국이 들어섰던 고장에 진좌한 우사하치만궁은 제신으로 오진천황, 그 어미인 신공황후, 히메신으로 되어 있다. 이 제신들도 한반도에 유래한 신이지만 정작 이 ‘하치만’궁의 상징으로서 하치만 신은 한반도, 특히 신라와 깊은 인연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된다.

 

참고문헌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연구원 출판사, 1966

上田正昭, 第四章 “海神と八幡神”, <神道と東アジアの世界: 日本の文化とは何か>, 151~179 德馬書店, 1996

金澤庄三郎, <日鮮同祖論>, 刀江書院, 昭和四年[1929]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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