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익스프레스는 7월 동남아의 관문 국가 태국 방콕에서 생생한 현지소식을 전해줄 전창관 기자의 태국세설(泰國世說)을 담은 칼럼 '전창관의 태국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오랜 태국 학습을 통한 글쓰기에서 배어나오는 웅숭깊은 칼럼을 기대해주세요. [편집자 주]
[방콕=아세안익스프레스] 태국은 인류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통치형태로 일컬어지는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존중을 기반으로 한 불교를 토대로 국회 제도라는 다수결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한 입헌군주제의 나라이기도 하다.
태국을 ‘태국으로 만들어내는’ 색깔은 누가 뭐래도 ‘국민=적색(赤), 불교=백색(白), 국왕=청색(靑)’이다. 태국 국기에 있는 ‘색’들이다. 정치 역사적 색채이기도 하다.
태국 국기에 반영된 색은 세 가지다. ‘붉은색’이 국민과 국가를, ‘흰색’은 불교, 그리고 ‘청색’은 국왕을 상징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을 하늘과 땅의 근간으로 삼아 불교적 정서를 신봉함과 동시에 국왕 수호’를 국체로 삼고 있다.
흔히 태국인들이 자존심이 강한 이유를 “수코타이 왕조 설립 이래 780여년 내내 독립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해 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든다. 하지만 크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외세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국가적 독립유지 역사와 관련한 자부심”에 대해서 별다르게 내색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오히려 “태국은 격동의 2차대전 이후 불교적 신앙심을 토대로 국왕을 따르며 온 국민이 합심해 이룬 민주주의 체제하에 아세안 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에 더 큰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
실제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른 국가들이 극도의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정치적 리더십 부재로 말미암은 후진 경제적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세안은 전 세계 75억 인구의 2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6억 5000만명의 땅이다. 그 중 태국은 아세안에서 나름 ‘바트경제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도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바트경제권은 태국을 중심으로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 4개국이 형성하는 소규모 경제권이다.
■ 삼성전자 냉장고 컬러 마케팅...삼색에다 태국 왕실 상징 ‘노란색’ 추가 역시!
태국의 정치 역사적 색채가 ‘적색(赤)·백색(白)·청색(靑)’으로 국기에 반영되어 있듯이 국가 융성의 토대를 만들어 낸 기반환경을 이루고 있는 색채 역시 다름 아닌 빨간색과 청색이다.
예전에 가전제품 판매 주재원으로 방콕에 근무할 당시였다. 태국 시랏차 지역에 대규모 백색가전 냉장고 생산공장 신축을 확정지은 후 현지 생산 냉장고의 컬러 결정을 위해 본사의 일본인 디자인 고문이 초빙해 그가 태국을 방문했다.
‘백색가전’이라 함은 말 그대로 세탁기와 냉장고 등을 총칭하는 흰색 가전제품(White Goods)을 일컫는 용어다. 태국은 그 당시만 해도 열대지방 사람들의 원색 선호 성향 때문인지 방콕의 백색가전제품 매장에는 흰색 외에 상당 부분 ‘빨·주·노·초·파·남·보’의 다양한 색상의 냉장고가 소비자들이 선호했다.
이에 따라 신설될 공장에서 어떤 색깔의 냉장고를 생산해야 할지를 정하는 일은 공장 가동을 앞둔 상황에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본사에서 출장온 동남아에 정통한 관록 있는 일본인 디자인 고문과 함께 3박 4일간 가전제품 매장은 물론 태국인들의 주거 생활환경과 그외 자연환경 및 전자제품 쇼핑 인프라 등을 함께 두루 돌아보았다.
당시 출장 온 초로의 디자인 고문이 내렸던 태국 냉장고 컬러 마케팅을 위한 대표 색상은 다름 아닌 빨간색, 녹색,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이었다. 따져보면 태국 국기에 표시된 ‘적색(赤)과 청색(靑)’에 태국 불교사원과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추가된 개념이었다.
태국인들이 주거해 온 전통가옥은 붉은빛을 띤 티크 계열의 목재를 주로 사용해 만들어졌으니 태국인들의 눈에 ‘빨간색=붉을 적(赤)색’은 어려서부터 늘 보아오던 익숙한 색깔이다.
국토의 태반이 푸르른 숲과 수로로 이어져 있으니 ‘녹색과 파란색=‘푸를 청(靑)색’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도처에 눈에 띄는 무려 4만 5000여 곳에 달하는 황금빛 첨탑 모양의 사원과 왕실의 색인 ‘노란색=누루 황(黃)색’이 태국의 대표색이다. 순간 무릎을 탁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태국의 국기인 삼색기의 ‘적(赤)·백(白)·청(靑)색’과 태국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늘상 접하는 3가지 대표 색깔인 빨간색(전통가옥), 청녹색(열대 숲과 물) 그리고 노란색(황금빛 사원과 왕실)을 활용해 태국의 냉장고 컬러마케팅을 실행키로 했다.
한 마디로 백색가전이라는 대명사를 만들어낸 색이자 태국 국기에 ‘국민과 국가로 표시된 하얀색’과 더불어 ‘빨간색, 녹색, 파란색, 노란색’ 냉장고가 제작되었다. 시장반응도 뜨거웠다. 판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오렌지색 당기 ‘팍 아나콧 마이’당 3위 돌풍, 하지만 열망은 꺾이고 당 해체
태국에서는 각 정당의 색깔도 태국 국기에 나타나 있는 적, 청, 백색의 색깔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2014년 군부 쿠데타를 전후로 한 갖가지 정치 경제적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태국민들을 이합집산시켰던 각 정당의 깃발에 반영된 색깔 역시 그들의 삼색 국기와 일상 생활환경에서 친숙해져 있는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 일색이었다. 거기에 왕실을 수호하는 노란색이 더해졌다.
팔랑쁘라차랏, 프어타이, 쁘라차티빳, 품짜이타이 당 등 각양 각색의 보수 정당들이 그들의 당을 상징하는 깃발을 디자인할 때면 여야 모두 여지없이 태국 국기의 삼원색 일색으로 도배를 했다.
그런데 돌연변이 같이 완전히 다른 ‘색깔전쟁’을 선포한 정당이 있었다. 2019년 총선을 전후해 태국 정치사회에 전에 없던 새로운 색깔이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진보성향의 타나톤 쯩룽르엉낏 당대표가 이끄는 ‘아나콧 마이당(Future Forward Party, 신미래당)’이었다.
태국의 자동차 부품 생산 대기업 타이 써밋 그룹(Thai Summit Group) 후계자인 타나톤 당 대표는 나이가 불과 40살(1978년생)로 오렌지 색깔의 당기를 휘두르며 태국 정가에 돌풍을 일으켰다.
젊은 유권자층을 기반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색깔인 ‘오렌지 색’을 당기로 채택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판도를 일순간에 뒤바꿔 버렸다. 무려 627만 표를 획득해 87석의 의석 차지로 명실공히 3위 정당으로 껑충 치솟았다. 소속 81명 전원이 초선이었다.
태국을 굳건한 아세안 2위 경제대국으로 만들어낸 것을 자부하는 보수세력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다가, 정치적으로도 지지부지한 횡보를 이어가는 것에 회의를 느낀 결과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창당 1년 만에 태국 정치지도 색깔을 바꾼 오렌지색 깃발의 돌풍은 상당수 국민들의 대대적인 기대와 열망에도 불구 얼마 가지 않았다. 정치적 압력에 휘말린 ‘아나콧 마이당’은 이내 해체되고 말았다.
태국 헌법재판소가 지난 2월 21일 총선 당시 당 대표 타나톤 쯩룽르엉낏이 받은 자금이 불법이라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타나톤을 포함한 정당 수뇌부 17명의 향후 10년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장구한 세월 속에 삼색기 색깔을 표방하는 ‘구태의연한’ 보수정당 정치에 너무도 익숙해진 태국 사회는 오렌지색이라는 새로운 색깔에 의한 정치적 적응에 실패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언제, 어떻게 또 다시 태국의 정치사회라는 팔레트에 다시금 제3의 색깔이 올려져 태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색깔을 구현해낼지, 그 선택은 태국의 민주주의라는 캔버스를 앞에 놓고 붓을 거머쥔 태국 국민들의 손에 달려있다.
방콕=전창관 기자 bkkchun@aseanexpress.co.kr
전창관은?
18년간 삼성전자에서 글로벌 세일즈 & 마케팅 분야에 종사하며 2회에 걸친 방콕현지 주재근무를 통해 가전과 무선통신 제품의 현지 마케팅을 총괄했다.
한국외대 태국어학과를 졸업 후, 태국 빤야피왓대학교 대학원에서 ‘태국의 신유통 리테일 마케팅’을 논문 주제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태국학회 해외자문으로 활동 중이다.
아세안의 관문국가인 태국의 바른 이해를 위한 진실 담긴 현지 발신 기사를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