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이야기 32] 아사카와 형제가 발견한 조선도자기 미학

  • 등록 2020.08.24 0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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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누구인가 15 . 일본의 조선관: 야나기에 심대한 영향끼친 아사카와 형제

 

일본인은 누구인가 15 . 일본의 조선관: 야나기에 심대한 영향끼친 아사카와 형제

 

이전 이야기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관, 특히 조선 막사발을 보는 그의 미학을 짚어 보았지만 그의 조선도자기 미학은 아사카와(浅川) 형제의 다리를 매개로 해 성립한 것이다. 야나기로서는 그들이 없었다면 그는 조선예술은커녕 조선에 대한 관심조차 그렇게 깊이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김정기, 2011, 107).

 

아사카와 형제는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것은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야나기가 주도하고 아사카와 형제, 그리고 소수의 야니기 동호인이 참여해 세운 ‘타인’의 박물관이었다.

 

야나기는 형 노리다카가 가져온 청화추초문모깎이 항아리에 눈을 떴지만,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1920년 초겨울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가 지바(千葉)의 아비코(我孫子) 자택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그때 야나기는 다쿠미를 통해 그가 몇 년간 조선에 살면서 터득한 조선민예에의 독창적인 미에 눈을 떴다고 보여진다.

 

 

■ ‘조선멸시관’ 뛰어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몰두

 

조선인도 아닌 그가 왜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열을 쏟았을까? 그가 관찰한 조선예술은 범상치 않은 민족의 예술인데도 당시 일본사회는 조선멸시관으로 충만해 있었다.

 

예컨대 1908년부터 조선에 3년간 산 체험이 있는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라는 인물은 ‘조선전문가’로 행세하면서 《조선문화사론》(1911)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반도의 사실(史實)을 펼쳐보면 지금의 상황을 수긍해야 한다. 그 정치는 창부(娼婦)의 심술에 가깝고, 그 문학은 모방에 지나지 않고, 독창적인 발명도 없으며, 그 신앙은 오로지 미신일 뿐이다. 위정자는 권력과 허영과 음모와 요설(饒舌: 수다)을 즐기고 외척의 발호와 유림의 재앙이 끊일 날이 없으며, 백성은 호랑이보다 사나운 가혹한 정치에 억눌려왔으며, 왕족도, 관료도, 양반도, 상민도 모두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고 재산도 보존하지도 못했다. 이와 같이 나쁜 인습이 오래 계속되어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비굴하게도 참는 특성을 배양하여, 마치 교활한 가축이 겁을 먹는 것과 같이 되었다. 이같이 이어가는 패잔의 운명이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高崎宗司, 2002, 109~110 재인용).

 

이 글에는 무엇보다도 인종편견의 악취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조선의 사정이 이와 같다면 일본의 통치는 오히려 조선 민족을 위해서 당연하지 않느냐는 논지가 깔려 있다. 일본 사회에 충만해 있는 조선멸시관은 야나기로서는 넘어야 장벽이었다. 지은이는 그 인종편견의 장벽을 넘기 위한 기획으로 아사카와 형제와 생각한 것이 조선민족미술관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사카와 형제가 조선 도자기 또는 공예품을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조선도자기 수집가인데, 형 노리타가를 평하여 ‘좀 특별난 인물’이라면서 “정열적이며 독창적인 예술혼의 소유자로 자신의 국적이나 다른 사람의 국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 속의 감추어진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 없는 열의에 빠져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반세기 동안이나 도공이나 조선 공예가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고 회고했다(グレゴリ ヘンだーソン, 1964).

 

도대체 무엇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반세기 동안이나” 조선의 도예 연구에 빠지게 했는가? 아마도 그 마음 안에 내재한 예술혼이 조선 도공의 예술혼과 만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길이 자연스럽다.

 

 

■ 다재다능한 형 노리다카 별명은 “조선도자기의 신령님”

 

노리다카는 다재다능한 예술혼의 소유자였다. 아사카와 형제의 평전을 쓴 다카사키(高崎宗司, 2002, 52)에 의하면 우선 노리다카는 ‘조선도가지의 연구가이며 동시에 수집가’인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긴 꼬리표를 붙여 ‘도예가, 조각가, 고서·고화 수집가, 다인(茶人)’이었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또 다시 이어 “시인, 가인(歌人), 배우[俳人]이며 동시에 미술평론가, 수필가, 장정가(裝丁家)를 겸한 문자 그대로 만능의 예술인이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일본인 학자나 수집가들 사이에 ‘조선도자기의 귀신(神樣=신령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노리다카는 1913년 서울 남대문 근처 한 소학교 교사로 부임해 조선 땅을 밟는데, 이 젊은 예술인의 눈에 조선 도예의 미가 놓칠 수 없이 들어온다. 그 과정이 흥미롭다. 그는 조선의 백자항아리를 만난 경위를 이렇게 회고한다.

 

“어느날 밤 경성(京城)의 고물상 앞을 지나다가 보니...조선의 물건들 사이에 하얀 항아리 하나가 전등불 아래 번쩍 빛나고 있었다.” “은은하게 불록하고 둥근 이 물건에 마음이 끌려 한참 들여다보았다”(浅川伯敎, 1956, 1)고. 값을 물으니 5엔이라기에 기쁜 나머지 얼른 그 백자 항아리를 사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려청자가 과거의 차가운 아름다움이라면 이 백자는 현재의 내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벗이다... 내가 눈을 뜬 것이며 좋은 물건을 본 것이다.”

 

■ 동생 다쿠미가 발견한 ‘조선의 소반’ 쓰임의 미

 

동생 다쿠미는 노리다카를 따라 한 해 뒤 1914년 조선에 건너왔다. 그는 임업시험장에 취업했지만 노리다카의 조선도자기 연구를 이어갔다. 오히려 한발 앞서 조선도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 업으로 삼았다.

 

그는 형과는 달리 조선말을 익히고 조선인들과 사귀면서 조선인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 토착문화를 내면화시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일본인이었다.

 

다쿠미는 조선의 공예에 관한 적지 않은 글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은 역저로 꼽힌다. 다쿠미가 저술한 《조선의 소반》은 그가 조선인이 사용하는 일용품에서 조선미를 찾은 그 현장 관찰의 산물이다.

 

이 책은 비교적 길지 않은, 모두 55쪽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올바른 공예픔은 사용자의 손에 의해 점차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며, 조선의 소반이야말로 그 표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발견한 순미단정(純美端正)의 아름다움이다.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도 조선 사람의 생활 문화를 내면화시킨, 예리한 관찰의 산물이다. 이 책은 그가 1931년 4월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뒤 5개월 만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머리말에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민족의 생활을 알고 그 시대의 풍조를 읽으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선 그릇의 본래의 올바른 이름과 쓰임새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그릇의 ‘올바른 이름’을 그르친 예로서 든 것이 ‘미시마(三島)’라는 이름이다. 그는 이런 이름에 대해 “그렇지만 이것은 조선어에 근거를 둔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경로라든가 그와 관련있는 지명, 또는 기물의 형태, 유약 색의 변화 등과 연관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면서 “올바른 산지나 시대를 나타내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기대된다(浅川巧, 1931, 180).

 

이에 맞장구치듯 한국의 선구적인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미시마’라는 일본 이름에 반대해 ‘분청사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1930년대 말이었다. 다쿠미는 쓰임의 미에 대해 이렇게 이어간다.

 

이조도자기의 특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 용(用=쓰임)을 떠난 기물이 없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청자에도, 일본의 도자기에도, 쓰임을 떠나 미술로서 바라보기 위한 이른바 ‘장치물’[置物]에 속하는 것이 있다. 처음부터 목적을 장식에 두어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조도자기에는 그런 것은 볼 수 없다. 만일 있다면 그 장치물이야말로 실내 용구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물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것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좋다...

용도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기물의 존재상 ‘건강한 멋’[强味]이다. 용도를 갖는 것은 만일 용도를 떠나 장치물이 될 때라도 ‘싫증난 멋’은 아니다. 오히려 장치물로서 가치가 더해질지 모른다(浅川巧, 1931, 74~75).

 

참고문헌

김정기, <미의 나라 조선>, 한울아카데미, 2011

高崎宗司, <朝鮮の土となった日本人: 浅川巧の生涯> (增補三版), 草風館, 2002

グレゴリ ヘンだーソン, “浅川伯敎の死を悼む,” <陶說>, No. 133, 1964년 4月号

浅川伯敎, <李朝の陶磁>, 座右寶刊行會, 1956

浅川巧, 《朝鮮陶磁名考》(復刻版, 2004), 草風館, 1931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정리=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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