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누구인가 16 일본의 조선관: 일본 국사교과서에 각인된 조선관
1984년 9월 6일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신군부 독재자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당연히 이웃나라 국가 원수의 예우로 그를 맞았다. 그때 주목을 받았던 것 중 하나로 일본천황의 ‘말씀(お言葉)’ 즉 ‘만찬사’라는 것이 있다.
그 ‘만찬사’는 예정대로 9월 6일 궁중 만찬회에서 천황의 육성으로 낭독되었는데, 그 중 고대사에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각해 보면 귀국과 우리나라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로 그 사이에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가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컨대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 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게 학문·문화·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 한 시기에 있어 양국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며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마이니치신문> 1984년 9월 7일치).
재일작가이자 한일 고대사 연구가인 김달수는 이 만찬사에 대해 ‘획기적’(金達寿, 1985, 292)이라고 평했다. 그는 “일본 최고 레벨에 의해 여러 각도로 신중하게 검토, 논의된 끝에 만들어 졌을 이 ‘만찬사’는 고대사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매스컴은 이 만찬사의 마지막 부분인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 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며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라든가 또는 “다수의 귀국 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에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쳤다”라는 대목에만 집중했을 뿐 김달수가 주목한 고대사 부분은 “전혀 무시되었다”(위 책, 같은 쪽)는 것이다.
그보다 ‘만찬사’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예컨대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에는’이라는 대목이다. 이것에는 일부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 의한 최신 연구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에 의해 뒤에 살펴보듯이 ‘4세기 후반 무렵’ ‘국내통일을 마친 야마토 조정’ 등이라는 속설이 다름 아닌 야마토 조정의 자손인 천황 자신에 의해 확실하게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 미마나일본부의 속설..."국내 통일을 마친 야마토 조정" 시기적으로 어불성설
어째서 그런가 하면 ‘6, 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 이전, 즉 2세기나 앞선 ‘4세기 후반 무렵’에 ‘국내통일을 마친 야마토 조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사소사전>뿐만 아니라 교과서 등에도 아직도 그러한 속설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83년 1월에 8판 33쇄를 발행한 것으로 되어있는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郞) 감수 <일본사 소사전>을 보면 그 ‘일본부’에 관한 것이 이렇게 적혀있다.
4세기 무렵부터 6세기 중반까지 약 250년 동안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군정부(軍政府). 아야(漢: 한사군을 지칭)가 멸망한 다음 한반도에서는 이른바 삼국시대가 형성되었지만 그 대립관계를 틈타 일본은 한반도의 남단에 있던 변한 땅에 마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 백제를 복속시키고 처음엔 고구려와 나중에는 신라와 장기간 싸움을 하여 562년 미마나가 병탄되기까지 한반도 남부 일대를 지배했다. <일본서기>에 우치쓰미야케(內官家: 이른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때 고구려, 백제에 설치했다는 일본의 관아), 일본국의 미야케(官家, 屯倉, 御宅: 야마토 조정이 직할령 또는 곡물을 수납하는 창고, 경영상 사무소), 일본부, 미마나 일본부 등이라고 적혀있고 별도로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라는 것도 보인다.
고교 교과서의 경우 예를 들면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가사하라 가즈오(笠原一男), 고다마 유키타(兒玉幸多)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고대사 연구가들이 집필한 고교 고과서 <詳說日本史(상설일본사)>를 보면, 그 중에 ‘조선반도에의 진출’이라는 항이 있고 거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야마토 조정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앞선 생산 기술과 철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아직 소국가군의 상태에 있던 반도남부의 변한제국을 그 세력 하에 두었다. 이것이 미마나(任那)이다. 야마토 조정은 그 후 백제 신라를 제압하고 고구려와도 싸웠다(위 책, 291, 재인용).
앞에서 보았던 <일본사소사전>에 ‘변진의 땅’으로 되어 있던 것이 여기서는 ‘변한제국’으로 되어 있는 것 외에(이것도 엉터리이고 잘못이다) 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국가 형성 시대’를 ‘6, 7세기’라고 한 이른바 천황의 ‘담화’가 나온 뒤에도 ‘야마토 조정은 4세기 후반부터...’ 운운하는 이런 거짓된 역사가 아직 그대로 계속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고교 교과서 <新日本史(신일본사)>는 저자는 ‘교과서 재판’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씨인데, 정부 쪽에서 반체제적 저자로 보고 있는 사학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산세이도(三省堂)에서 출간되어 1972년 3월 재판까지 찍어내고 있는 고등학교에도 미마나 일본부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기원 3세기 무렵 조선반도의 남부에는 한민족(韓民族)이 그 무렵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소국가군을 형성하여 마한·진한·변한의 세 국가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일본의 통일과 전후한 4세기 전반 무렵 마한·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라는 두 한민족의 국가에 통일되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 야마도 정권의 세력은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소국가군의 상태로 있던 변한을 영토로 삼고 여기에 미나마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한 후 391년에는 또 군대를 보내어 백제·신라도 복속시켰다. 반도남부를 정복한 야마도정권은 반도의 부(富)와 문화를 흡수해서 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했으며 국내통일을 이로써 현저하게 촉진되었다(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4, 41~42, 1984).
이어 “백제는 그 후에도 일본에 계속 복속했지만 한민족으로서 자각이 강한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여 일본에 반항을 계속했다”라고도 쓰고 있다면서, 김달수는 “정부 쪽에서 반체제적 저자로 보고 있는 그 이에나가씨조차 고대 부분은 이 정도이다. 그러므로 그 밖의 일본 사가들의 고대사관이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도대체 일본 사가들이 이렇게 쓰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記·紀>가 역사서로서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임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일한 고고학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중국 동북(東北: 滿洲)의 지안(集安·輯安)에서 발견된 고구려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 비문밖에 없다. 그래서 이에나가씨의 <신일본사>에도 그 사진이 실려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391년 일본의 조선출병은 지금도 중국 만주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군은 지금의 경성(京城: 일제시대 ‘서울’의 호칭-역주) 근처까지 북상하여 신라를 구하기 위해 남진한 광개토 왕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위 책, 42, 재인용).
■ 석회부도작전...광개토왕릉비문의 개찬 '가짜 탁본' 파문
광개토왕비문의 그 부분을 이렇게 읽는 것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의문이 나왔지만 1971년 잡지 <思想(사상)>3월호에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씨의 “근대일본사학사에 있어 조선문제--특히 「광개토왕비문」을 둘러싸고--”가 나와 드디어 이것은 일본학자 사이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뒤이어 <日本歷史(일본역사)> 1972년 4월호에는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의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제검토를 위한 서장」이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일본사학자들이 금과옥조와 같이 여기는 비문의 탁본[실은 双鉤加토墨本]은 본래 일청(日淸)전쟁에 대비해 만주 주변을 탐사하고 있었던 일본육군 대위 사코-카게아키(酒勾景信)가 메이지 17년에 발견하여 지참하고 가져온 것을 당시 육군참모본부가 ‘해독’한 것이었다고. 김달수는 이어 광개토왕릉비문이 개찬되었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상당히 놀랐지만 다시 <사상(思想)> 1972년 5월호에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가 오랫동안 조사에 의거해 「광개토왕릉비문의 수수께끼--초기조일관계사상 문제점」이 나옴에 이르자 나는 더욱 한층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읽은 교토대학의 우에다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다카마츠총벽화고분발견에 이은 대 사건이군요」라고 내게 말했다. 실로 그대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희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식민지 화를 노리고 있었던 일본의 육군참모본부는 그 비문을 단시 ‘해독’한 것뿐만 아니다. 다시 현지의 광개토왕릉비에 접근해 말 못하는 그 비문에 ‘석회부도작전(石灰塗付作戰)을 감행해 비문을 개찬했다. 그리고는 국내의 학자들에게 배포한 그 가짜 탁본을 떴다는 것이다(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4, 43~44, 1984)
■ 일본 사학자들의 황국사관-침략사관 체질
그럼에도 일본의 사학자들은 그 ‘해독’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전혀 의심한 흔적조차 없었던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김달수는 결국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그것은 결국 일본의 사학자들도 또한 메이지 이후의 군부와 부국강병, 한반도·대륙 진출의 노선을 함께 걸어왔다는 증거이며 그에 따라 조성된 황국사관·침략사관의 체질이라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위 책, 44).
참고문헌
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4, 1984
--. <日本古代史と朝鮮>, 講錟社, 1985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