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 동남아시아 소식을 주로 전하는 외신에서 흥미로운 기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랩(Grab)과 고젝(Go-Jek)의 합병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로 풀이되는 뉴스들이 잇따라 보도된 것입니다.
외신들은 동남아의 ‘유이(有二)’한 ‘데카콘(Decacorn, 기업 가치가 100억 달러(약 11조 8740억 원)를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현지 디지털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온 그랩과 고젝이 합쳐지는 시나리오를 소개했습니다.
사실 두 모빌리티 데카콘의 합병 가능성은 그동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독점 문제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만만치 않은데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까지 겹치면서 당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합병 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고, 이는 동남아 스타트업계 전반이 구조조정 및 사업 축소 등에 내몰리는 위기 상황에서도 그랩과 고젝의 존재감이 여전함을 증명했습니다.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거나 출장길에 오른다면 한 번쯤은 그랩과 고젝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랩 또는 고젝의 헬멧을 쓰고 손님을 태우거나 주문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 기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랩과 고젝은 나란히 기업 가치 1위, 2위를 달릴 정도로 동남아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합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설립된 후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겼고, 고젝은 2010년 창업 이래 안방인 인도네시아에 주력해 왔습니다.
그랩과 고젝은 세계 최대 모빌리티 스타트업인 미국의 우버가 처음 선보인 앱(애플리케이션) 기반 차량 호출 서비스를 출시하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택배와 전자 결제, 동영상 콘텐츠 등으로 비즈니스 영역을 넓히면서 동남아의 모바일 생활 플랫폼으로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랩과 고젝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켠 2010년대 중반 이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이들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 그 발전상에 여러 번 놀랐습니다. 저렴함과 편리함을 내세워 기존 대중 교통 체계의 빈틈을 파고든 차량 호출 서비스는 젊은 세대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급속도로 사용자 수를 늘려갔습니다.
이후 신용카드 보유 인구가 적은 현지의 특수성을 반영한 전자 결제 시스템이 도입돼 성장을 가속화한 한편, 규모의 경제를 꾀할 수 있는 기능들도 잇따라 추가됐습니다.
두 데카콘은 몰려드는 투자금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갔고, 그 결과 그랩은 2018년 초 우버의 동남아 사업 부문을 인수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경쟁에서 밀려 퇴출되는 택시업체들이 속출한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젝의 창업자가 2019년 교육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태국, 베트남 등을 포함한 동남아 8개국 500여개 도시에 발을 들여놓은 그랩은 역내 차량 호출 서비스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동남아 5개 나라에 진출한 고젝은 역내에서 가장 큰 인도네시아 시장 선두 자리를 놓고 그랩과 뜨거운 각축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조사기관에 따라 수치가 엇갈리지만 일반적으로 차량 호출 서비스 부문에서는 그랩이,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 부문에서는 고젝이 앞선 것으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지난해 하반기경 불거진 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심각성을 더한 동남아 스타트업계의 수익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그랩과 고젝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병 이슈가 동남아를 넘어서까지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스타트업을 향한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랩과 고젝의 합병설이 코로나19 정국을 지나면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돼 나갈지 사뭇 흥미진진해집니다.
글쓴이=방정환 YTeams 파트너 junghwanoppa@gmail.com
방정환은?
매일경제신문 기자 출신으로 아세안비즈니스센터 이사로 재직 중이다. 2013년 한국계 투자기업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래로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인도네시아 입문 교양서 ‘왜 세계는 인도네시아에 주목하는가’에 이어 동남아의 최신 디지털 경제와 스타트업 열풍을 다룬 ‘수제맥주에서 스타트업까지 동남아를 찾습니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