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랩 블로그, 유튜브를 운영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예측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정보성 콘텐츠보다는 당연히(?) 맛집, 여행, 특산품 등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반전도 있다. 정보성 글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콘텐츠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세안의 왕”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세안 10개국 중 ‘국왕’이 존재하는 국가는 브루나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 4개국이다. 브루나이는 국가보다 왕이 더 유명하다. 국왕의 플렉스(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뽐내거나 과시한다는 뜻)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듯하다.
태국은 “살아있는 부처” 라고 불리며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푸미폰 국왕이 2016년 서거하면서 언론에 더욱 많이 노출되었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는 사실 총리가 더욱 유명해서 ‘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두 개 국가는 왕이 되는 과정이 특이하다. 왕을 선출하는 캄보디아, 순번제로 운영되는 말레이시아가 그것이다. 이번 칼럼은 아세안의 다양한 왕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 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 故 푸미폰 국왕
필자의 유학 시절 룸메이트가 태국인이었다. 그래서 태국 이야기도 많이 듣고 태국 레스토랑, 행사 등 태국 문화에 대해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 중 의아했던 것이 태국과 관련된 장소에 갈 때마다 국왕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린 상식으로는 그런 사진이 곳곳에 걸린다는 것은 공산주의 국가, 북한이 연상되었다.
태국 친구들에게 국왕의 사진을 걸어두는 것이 국가가 규정한 것인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은 태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왕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면서 순수한 눈빛으로 하나같이 답변을 했다.
형식적인 사진 게재를 넘어 진심이 느껴졌다. 형 라마 8세의 서거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급작스레 왕인 된 故 푸미폰 국왕. 2016년 89세의 일기로 서거하기까지의 재위 기간 70년. 어떻게 이 오랜 기간 동안 한결같은 지지를 받는 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故 푸미폰 국왕은 매년 6개월 이상 소외되고 고립된 지역을 포함하여 사륜구동을 직접 운전하면서 태국 전역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국민들을 돌보았다. 이를 기반으로 열악한 지역 국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힘써왔다. 1988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도 불리는 막사이사이상(Ramon Magsaysay Award)을 받기도 했다.
친근하고 인자한 국왕이지만 정치적인 영향력도 대단했다. 재임 기간 19번의 쿠데타를 겪었는데 국왕의 승인 여부에 따라 성공 여부도 갈릴 정도로 태국 정국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故 푸미폰 국왕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한 일이 있었다. 외교부 근무 시 외교부 출입 기자와 동행하여 아세안 국가를 방문하는 ‘한-아세안 언론인 교류사업’을 담당했다. 2016년 방문하는 국가에 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거 후 한 달, 모든 국민이 슬픔에 빠져있던 기간에 예정된 태국 방문은 취소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예의바른 태국 공무원들은 그대로 진행하되 검정색 옷을 입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한편, 기자들을 동행하는 만큼 태국 공무원들은 국왕의 영향력과 국민들의 애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물론 굳이 분향소를 가지 않더라도 국민들은 대부분 검정색 옷을 입고 거리 곳곳 국왕을 애도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분향소는 여전히 국왕을 애도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기다려야해 환자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진료소도 구축되어있었다. 분향소 안에는 또한 무료 급식소까지 있어 모두가 마음으로 국왕을 기리고 또 질서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재위한 라마 10세 마하 와치라롱껀 국왕은 어떠할까.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생활과 이혼 경력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이러한 탓에 선왕과 비교하여 국민의 지지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그가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지, 또 어떻게 신임을 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 넘사벽 재벌이자 친근한 “인싸” 브루나이 하사날 볼키아 국왕
아세안 10개국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를 꼽으라면 바로 ‘브루나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나이 하사날 볼키아 국왕의 일화를 소개하면 “아, 들어봤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브루나이가 한국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2014년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시 하사날 볼키아 국왕이 직접 전용기를 몰고 한국에 왔다는 뉴스가 나오면서였던 것 같다. 물론, 2019년도에도 직접 전용기를 운전했다.
“브루나이의 모든 것이 국왕의 것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국왕이 살고 있는 누룰 이만 왕궁은 호화스러움의 극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차량도 몇 천대이며, 취미로 운전 중인 항공기도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국민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으니 정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인물이 아닐까. 인구 44만 명에 경기도 절반 정도의 작은 국가인 브루나이에서 국왕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호화스러운 누룰 이만 왕궁은 새해에 공개가 되는데 이때 국왕에게 새해 인사를 하면 세뱃돈으로 1인당 한화 약 100만 원을 준다고 알려져 또 국왕이 유명해졌다. 이는 사실, 브루나이의 1인당 GDP가 4만 달러(약 4438만 원)를 넘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현재는 1인당 약 5000원, 혹은 선물을 지급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KBS JOY 채널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는 ‘딴 세상에서 사는 재벌들의 괴짜 취미’를 주제로 순위기 매겼었다. 2위로 브루나이의 하사날 볼키아 국왕이 선정되었다. 국왕의 취미는 바로 ‘국민 복지’였는데, 의료비를 지원하여 진료비를 단돈 900원만 받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유학을 원하는 경우 유학비도 지원한다고 소개하였다.
이렇게 브루나이를 유토피아로 만들어 준 국왕. 따라서 사치를 부려도 국민들이 괴리감보다는 친근함과 존경심을 갖는 이유가 아닐까.
■ 왕이 있었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태국의 왕에 비해 덜 언급되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도 국왕이 있다는 사실을 필자도 깊게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이 두 개국 모두 왕보다는 총리가 더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데, 엄연히 왕이 존재한다. 다만 흔히 알려진 혈통에 따라 왕위를 물려주는 방식이 아니다.
캄보디아의 경우 국왕선출위원회라는 비상설기구에서 비밀투표를 통해 다음 국왕을 뽑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 헌법 제2장 제10조는 ‘캄보디아 왕실은 선출된 정권이다. 왕은 통치권 계승자를 지명할 권한을 갖지 아니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대통령과 같이 정치적이나 원한다고 후보가 될 수 있는 방식은 아니다. 왕이 될 수 있는 가문이 세 개가 있다(엄밀히 따지면 세 가문은 같은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앙 두옹(Ang Duong), 노로돔(Norodom), 시소왓(Sisowath)이 그것이다. 이 가문 출신 30세 이상의 남성만이 후보에 오를 수 있다.
캄보디아에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시하누크 전 국왕(1922~2012) 이후 현재는 2004년 선출된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이다. 캄보디아 국왕은 지배하지 않는 군주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여전히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 정부, 그리고 연방 정부로 구성되어있다. 13개의 주 정부 중 9개 주는 종교지도자인 주왕(술탄), 주왕이 없는 4개 주는 주 총독이 주 정부의 수반이다. 이 주왕이 있는 9개 주의 주왕들이 정해진 순번에 따라 5년 임기로 돌아가면서 국왕을 맡고 있다.
투표절차는 비밀투표로 부쳐지는 선출식이지만 정해진 순번에 따라 연장자가 뽑히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사실상 차기 국왕은 예상 가능하다. 명목상은 선출식이지만 실제로는 순번제로 운영되는 셈이다. 이 방식은 말레이시아가 독립했을 때 지역 간 분란을 방지하고 성공적인 연방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최근 이 말레이시아 국왕이 언론이 언급된 적이 있는데 바로 ‘세기의 결혼식’으로 꼽힌 무하맛 5세 국왕과 미스 모스크바 출신의 옥사나 보예보디나의 결혼 때문이다. 무하맛 5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년을 갓 넘긴 후 퇴위하였는데 왕위 대신 사랑을 택했다고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혼설, 불화설에 시달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친자 확인에 휘말리는 등 한동안 시끄러워졌다. 2019년 1월부터 현재는 압둘라 국왕이 말레이시아 제16대 국왕을 맡고 있다.
저 세상 이야기이지만 언제든 흥미로운 왕실의 이야기. 아세안의 왕실이 지속적으로 경이롭고 또 존중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글쓴이=김시은 asean.sekim@gmail.com
김시은은?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학교 형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인권을 기반한 개발’을 논문 주제로 하여 국제개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국제개발학 박사과정을 수료 후‘아세안 문화개발협력’ 관련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2010년부터 2012년 초까지 외교부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 준비기획단에서 근무하고,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외교부 아세안협력과 내에서 한-아세안 협력사업을 관리하는 전문관으로 근무하였다.
현재는 한-아세안 협력사업 컨설팅 및 아세안 관련 정보 제공을 주 업무로 하는 아세안랩(ASEAN LAB)을 창업하여 운영하며, 아세안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다. 외교부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아세안 업무 매뉴얼을 담은 책 '아세안랩'을 8월 8일 출간했다. (미국 메릴랜드주 수잔리 하원의원 표창, 2012년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 2017년 외교부장관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