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일본의 눈 45] 궁정 쿠데타의 진실 '천황의 나라 일본'

  • 등록 2021.08.30 18: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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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궁성사건에 어른거리는 "천황을 국가 자체와 등치시킨 신국사상"

 

군국주의 일본의 메이지 헌법은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주권자로 적고 있다. 그러나 전후 맥아더 일본 점령 사령부가 마련한 ‘평화 헌법’은 이를 폐기했다. 즉, 천황을 단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다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에 적혀 있을 뿐이다. 이전 이야기에서 보듯이 아직도 일본의 극우세력은 일본을 ‘신국’으로, 천황을 ‘현인신’으로, 자신의 나라를 ‘천황국가’라고 뇌까리고는 욱일기를 흔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대체 이런 터무니없는 발상은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그 답의 실마리는 이전 이야기에서 설명한, 신에게 바치는 ‘고문(告文)’에서 엿볼 수 있다. 9세기 중반 신라로부터 위협에 처한 당시 일본 조정은 전국 각지의 신사와 절간에 ‘고문’을 전독하라고 명하면서 신들에 ‘국가’를 지켜달라고 기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국가’란 백성의 삶의 터전에 질서를 마련한 공간이 아니다. 즉, 한 참 먼 곳의 ‘천황’의 몸뚱이이었던 것이다. ‘고문’은 일본이 ‘신국’이라고 자기 규정하면서 천황을 지켜달라고 외치고 있다.

 

즉 “‘皇御孫(스메미마=천황)의 御体’를 영원히 지켜 주십사”라고 뇐다. 죠-간(貞観) 11년[869] 12월 14일에 이세신궁에 바치는 고문은 다음과 적고 있다.

 

신라와 일본은 오랫동안 적대해 왔다. 듣는 바에 의하면 그 신라가 이번에는 국내에 침입해 공물을 빼앗아 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조정은 오랫동안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를 게을리 했지만 병란은 정말 신중히 걱정해야 할 일이다.

 

우리 일본은 이른바 신명 국(神明の国)이다. 신명[천신 지신]이 수호하고 있는 한 어떠한 적도 다가 올 수 없다. 정말 황송 하옵게도 아마테라스고오카미((天照皇大神, 이하 ‘황대신’=천조대신=천황의 조상신-필자) 우리나라 대조(大祖)로서 군림하고 있는 이상 어떻게 타국의 이류(異類)가 가해오는 침범을 묵시하겠는가. (중략)

 

황대신이여, 어떻게든 우리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셔서 구적(寇賊)이 내습하는 경우 황대신이 모는 신을 지휘해 미연에 막아주십시오. 또한 적이 계획을 진척시켜 병선이 도달하면 국내에 침입하기 전 역풍으로 바다에 빠트려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나라가 「神国」으로 삼가 존경받았던 법도를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

 

그밖에도 「国家」의 큰 재앙, 「百姓」의 큰 근심을 가져오는 여러 재난을 미연에 막아 나라의 평안을 성취하고 주야를 불문하고 「皇御孫(스메미마=천황)의 御体」를 영원히 지켜 주십사 기원 드립니다.

 

사토히로-(佐藤弘夫)는 위의 고문에서 말하는 ‘국가’의 실체에 대해 “현대적 의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역시 말하는 신들이 진호해야 할 '국가'가 현대적 의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추상적인 의미의 국토일반을 가리키는 것도, 거기서 사는 주민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 고대에서 '국가'라는 말은 천황 개인의 신체를 의미했다.

 

국가개념이 보다 널리 국토와 인민[백성]을 포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국토의 혼란과 인민의 곤궁이 천황 지배의 동요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인민의 안온이 '호국'의 중심적 의미내용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고문에서도 신들이 지켜야 할 대상은 궁극적으로는 「皇御孫(스메미마=천황)의 御体」라는 말에 나타나는, 신손(神孫)으로서 천황 한사람에 수렴되는 것이었다(佐藤弘夫, 2018, 85)

 

■ 궁정 쿠데타의 비극-천황을 국가 자체 등치 발상

 

이렇게 천황을 국가 자체와 등치시키는 발상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 중요한 하나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궁정 쿠데타 또는 친위 쿠데타다. 예컨대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이 전형적인 예이다.

 

 

그해 2월 26일부터 29일 사이에 일본에서 육군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청년장교들이 1,483명의 장병을 이끌고 ‘쇼오와 유신(昭和維新)’을 단행한다며, ‘손노오 토오캉(尊皇討奸)’을 외치고는 “간신배를 척살하고 천황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명분을 기치로 내건 쿠데타 미수사건이다.

 

사건 후 한동안 이 사건이 ‘후쇼오(不祥)사건’·‘테에토 후쇼오(帝都不祥)사건’으로 불렸다.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는 역사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반역사적 사건이다. 그 이후 역사의 흐름은 ‘천황기관설’과 같이 입헌군주제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황도파가 중심이 된 청년장교들은 천황이 친정을 해야 한다며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반역사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26 사건의 주모자들 모두 처형으로 이 사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는 천황을 국가자체와 등치시키는 발상에 기인한다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궁성사건(宮城事件)의 막장 드라마-천황의 항복선언 막기 위해 쿠데타

 

더 끔찍한 사건은 무모한 태평양 전쟁의 막장 전야에 일어난 이른바 ‘궁성사건(宮城事件)’이다. 이것도 본질은 궁정쿠데타다.

 

이미 일본은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폭 세례를 받고 무려 310여만의 무고한 백성이 희생당한 뒤에도, 게다가 소련의 대일전 참여로 일본 점령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육군 전쟁 지휘부는 결사 항전을 외치고 있었다. 그들이 ‘일억 옥쇄’를 뇌인 이면에는 ‘국체의 보존’ 즉, 천황제 온존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취임 이래 지속적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해왔던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당시의 어전회의에서 육군 측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OhmyNews》, 2021년 8월 14일 치, 박광홍,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소련은 불신(일소불가침 조약을 배신하고 대일전에 참전한 것을 비난하는 의미)의 나라, 미국은 비인도(일본 본토 공습 및 원자폭탄 투하를 비난하는 의미)의 나라입니다. 이런 적들에게 보장 없이 황실을 맡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억의 국민이 모조리 쓰러진다 해도, 우리는 대의에 살아야 합니다. 단, 4가지 조건(천황제 유지, 일본의 주권을 보장하는 점령, 일본에 의한 자체 무장해제, 일본에 의한 자체 전범재판)에 의해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대장 역시 ‘본토결전의 준비는 이미 완료’됐다고 덧붙이며 육군의 완강한 입장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이날의 어전회의에서는 쇼와 천황의 뜻에 따라 다른 조건들을 포기한 채 ‘천황제 유지’에 중점을 두고서 항복 교섭에 임한다는 방침이 결정됐다. 

 

이같이 육군이 조건을 제시하자 미국은 “천황의 지위는 연합군사령부의 관리하에 둔다”라는 답변을 내놨다. 그러자 육군의 과격파 장교들은 미국 측 답변을 “천황의 지위는 연합군사령부에 종속된다”로 해석하고 거세게 반발했다. 일부 장교들은 아나미 육군대신을 향해 “항복을 저지하지 못하면 할복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며 쿠데타까지 채근했다.

 

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는 항복이 지연될 경우 일본이 독일처럼 분단돼 버릴 것을 우려했고, 쇼와 천황 역시 이미 전쟁 종결에 대해 마음을 굳힌 상황이었다. 결국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는 미국의 답변을 수용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것이 확정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과격파 장교들이 일으킨 궁정 쿠데타가 오늘날 궁성사건이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항복 찬성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다음날 8월 15일에 예정된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을 저지한 뒤, 연합군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받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8월 14일 밤, 쿠데타 주동자들은 근위사단장 모리 다케시(森赳) 중장에게 들이닥쳐 정변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모리 사단장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쿠데타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하타나카 켄지(畑中健二) 소좌는 권총을 뽑아 들고는 그를 쐈다.

 

사단장과 참모를 현장에서 살해한 그들은, 사단장의 명령을 위조해 근위사단에 출동을 명했다. 이렇게 8월 15일 새벽 궁성사건이라는 궁정 쿠데타는 시작된 것이다. 위조명령을 받은 근위사단 병력들은 완전무장을 하고서 궁성의 주요 구획들과 출입구, 항복 방송이 실시될 일본방송협회(NHK)를 점거했다. 쇼와 천황의 육성을 녹음한 항복 선언 레코드를 찾아 쿠데타군은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졌지만 항복선언 레코드판을 찾을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동원된 근위사단 병력들은, 처음에는 미군이 상륙해 궁성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을 상상했다가 이내 무엇인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군대가 들어갈 수 없는 구획까지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황궁 경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해야 하는 것도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8월 15일 아침이 되자 사단장은 살해됐으며, 출동 명령은 위조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 쿠데타 주동자들의 권총 자살 "오로지 천황의 몸뚱이를 받든다"

 

쿠데타에 실패한 주동자들은, 항복 선언문이 방송되기 1시간 전에 궁성 앞에서 권총 자살했다. 항복을 막기 위해 나섰던 과격파 장교들의 마지막 발악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15년 전쟁의 막장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폭력과 피로 점철된 채 마감을 본 것이다. 즉, 천황을 국가 자체와 등치시킨 신국사상은 ‘일억 옥쇄’라는 모험을 무릅쓰고 오로지 천황의 몸뚱이를 받든다며 낳은 비극은 이렇게 끝나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佐藤弘夫, <「神国」日本>, 講談社, 2018

《OhmyNews》, 2021년 8월 14일 치, 박광홍,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新人物往來社, <2.26事件と昭和維新(유신)>, 1997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사회과학대학 미디어커뮤니이션 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정리=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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