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헨더슨 부부는 내 영혼의 ‘길동무’였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의 생생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바로 김정기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82)의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한울)이다.
이 책은 김 교수와 두 부부와의 각별한 인연에서 출발했다. 그는 헨더슨 부인이 별세하기 전 국회프락치사건 자료 등을 일체 넘겨받아 이 평전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김 교수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은 1948년 약관 26세의 한국 주재 미국대표부의 부영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승만 대통령 바로 뒷자리에서 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목격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이후 미국의 한국 전문가로서 한국에 대한 애정 어린, 냉철한 시선을 멈춘 일이 없었다. 저는 2021년 출간한 ‘국회프락치사건의 종언’에서 헨더슨을 위대한 기록자로 소묘했다. 그리고 ‘미의 나라 조선’에서는 그를 한국 도자기의 미를 칭송한 한국미의 예찬자로 진면목을 조명했다”고 말했다.
이 평전은 이밖에 헨더슨이 쓴 ‘정다산론’뿐만이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고발자로의 면모를 기록했다. 학문, 사상, 철학, 인물과 인품과 행동하는 지성인의 그의 삶을 담았다.
■ 이승만-4,19-5.16-광주 등을 목격한 현대사의 증인
그레고리 헨더슨은 해방 정국에서 벌어진 김구 암살을 비롯한 주요 정치지도자 암살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체험했는가 하면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을 목격했다.
이 책에는 그의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에서부터 1950년의 한국전쟁을 비롯해 1960년의 4·19 학생혁명, 이어 한국 민주주의를 역전시킨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 목격담이 기술되었다.
또한 19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12·12 쿠데타, 마지막으로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자행한 5·18 광주만행까지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헨더슨이 목격한 한국의 모습이 담겼다.
헨더슨이 저술한 ‘회오리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하버드대 출판부, 1968)’는 한국정치를 설명하는 세계적 고전이 되었다.
김 교수는 “제가 헨더슨을 처음 만나 사귄 것은 생애 말년에 속한 그의 68세였다. 저는 48세였다. 1986년말부터 1988년 여름까지 2년 정도다. 그 짧은 기간의 만남이 이렇듯 인연으로 이어질 줄 나도 몰랐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헨더슨을 알게된 것은 1973년 컬럼비아대 국제대학원 수학 시절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한국은 아직 위험하다’라는 장문의 기사였다. 실제로 그를 만난 것은 13년 이후 컬럼비아대학교 세미나 발표자로 초청받아 갔을 때 만났다. 맨해튼 34번가에서 소줏잔도 기울였다.
■ 국회프락치사건 재판 전과정 기록...죽임 이후 헨더슨 부인 서재자료 김교수에 넘겨줘
헨더슨은 특히 국회프락치사건의 경우 재판심리의 전 과정을 모두 기록해 미 국무부로 보내 귀중한 역사적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그가 그토록 이 사건을 중시한 이유는 “이 사건이 신생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제가 그의 평전을 쓰게 된 건 그의 말년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1987년 그의 보스턴 자택에서 조각가인 헨더슨 여사도 만났다. 1988년 헨더슨이 나뭇가지를 치다가 낙상, 충격으로 돌연 죽음을 맞았다. 헨더슨이 영면한 뒤 헨더슨 부인으로부터 생전 정열을 다해 연구하던 국회프락치사건 자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헨더슨 부인으로부터 “당신이 원하면, 또 계속해 연구를 이어간다면 연구자료를 가져가 달라”는 의외의 제안을 받았다. 그 자료를 기반해 김 교수는 정년퇴직 후인 2008년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1.2’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을 출간했다.
김 교수는 “이후 단순한 길동무가 아니라 펠로 트래블러(fellow traveler)의 마음, 그레고리 헨더슨의 이상, 사상, 철학을 함께 나누는 동조자로서 그의 영혼과 함께 한국과의 인연이 이끌어간 여정을 함께 했다”고 말했다.
■ 다산 정약용 관심-한국 도자기 미학의 경지 개척
헨더슨의 한국 관심은 정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다산 정약용에 주목해 ‘정다산: 한국 지성사 연구(Chong Ta-san: A Study in Korea’s Intellectual History)‘라는 출중한 논문을 1957년 써냈다.
김 교수는 “이 「정다산론」을 계기로 그는 다산 연구가인 이을호 교수와 각별한 교유를 트게 되었으며 그의 조선유교론이 동양사상가이자 재야 민주화 운동가인 기세춘에 지적 충격을 주어 그를 조선 고전에 눈을 돌리게 했다”고 말했다.
또한 고려청자와 고려불교와의 관계를 주목한 ’검은 계곡 이야기‘라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한국 도자기를 만난 경위를 포함해 외교관의 길을 시작할 즈음 당시 한국문화-역사 전문가 조지 매큔 박사를 만난 한국 역사와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헨더슨은 한국에 온 이후 한국 도자기에 심취해 근소한 ‘도자기 컬렉션’을 갖게 되었다. 김 교수는 야나기-아사카와 형제와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인 '미의 나라 조선'을 출판한 바 있다.
김 교수는 “한국을 떠나 일본 교토문화 원장 시절 조선 도예 미의식을 갖게 되었다. 다시 한국 서울 미대사관 문화시절 김원용 박사 등 고미술 전문가들과 교유해 심화되었다. 1957년 다산의 유배지 강진을 찾아 고려청자 가마터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 1964년 국무부 나와 학문세계...진실탐구와 행동하는 지식인
헨더슨은 1964년 국무부를 나와 하버드대학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위촉받아 한국학, 특히 한국 정치 연구에 몰두한다. 이후 1988년 10월 느닷없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4반세기 한국학 전문가로 일가를 이뤘다.
또한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한 투쟁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건의 목격 증인이었다. 그래서 행동하는 지성인의 삶을 살았다. 군사정권의 자행한 불의를 폭로하고 행동했다.
김 교수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광주 만행을 저지르기 위해 특전사를 동원하겠다는 요청을 미국이 승인했다는 폭로와 프레이저 청문회에 참석해 군사정권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고문 행동을 증언한 것 등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헨더슨이 현장에서 목격한 한국 정치는 어떤 것일까. 1948년 미국무부 소속 부영사로 부임한 이래 체험한 것을 펴낸 것이 ‘회오리의 한국정치’라는 저서였다.
그는 또한 하버드대학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이나 한반도 문제를 모든 저서 등에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1972년 초부터 이승만 정부에서 저질러진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이 평전을 펴낸 것은 한 인물의 전기를 객관적으로, 또는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 더 높은 동기가 있다. 그 인물이 추구한 이상, 사상, 철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여백의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김 교수가 탐방한 여정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 그는 40년간 그의 한국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의 마음으로 평전을 써낸 것이다.
김정기 교수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63)을 졸업하고, 동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1966),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1992)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1966~1997),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1998.9~1999.9) 방송위원회 위원장(1999.9~2002.1),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2003~2005)을 역임했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증언』(2021)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2008),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2010),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2006), 『전환기의 방송정책』(2003), 『우리 언론의 숨겨진 신화 깨기』(1999), 『분단국가의 언론정책』 (199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