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 교수 “30년 강단 떠나지만 베트남 교류 역할 찾겠다”

  • 등록 2024.11.15 09: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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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유학 1호박사 배양수 베트남어과 교수 정년최직 ...한-베 큰 발전 뿌듯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 교수는 유학 1세대다. 한국 최초 베트남 유학생, 1호 박사로 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유학을 성사했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베트남인이 아닌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는 도이머이(Đổi mới: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이후 1992년 9월부터 하노이사범대학교(베트남 어문학 석-박사)에서 유학을 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공식적인 수교를 맺었다. 지난해에는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을 맞아 2022년 두 나라 전문가가 모인 ‘현인그룹’ 멤버로 참여했다.

 

보응웬 지압 장군이 처제를 지도교수를 두어서 장군의 인터뷰에 통역을 하는 등 내로라하는 베트남 인사들과도 교류를 해왔다. 또한 부산외대 베트남어과를 명실상부 한국 최고 학과로 키워냈다.

 

배양수 교수는 다음달 24일 동문선후배과 함께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진다. 30년을 꼭 채우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한-베트남 관계의 가교를 해온 배 교수를 아세안익스프레스가 부산외대 캠퍼스에서 만나봤다.

 

 

■ “한-베트남 미수교 시절 한국 유학생 1호...교수로 30년, 세월이 빠르다“

 

Q.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학과 교수로 몇 년 봉직했나. 정년퇴직 소회를 듣고 싶다.

 

A. 1995년 3월부터 근무했다. 30년을 꽉 채웠다. 아직 학기가 마무리되지 않아서인지 특별한 감흥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것도 없는데, 참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설렘이 있다. 그렇다고 뭘 계획한 것은 없다. 어쨌든 노는 것을 포함해서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가 큰다. 논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쉰다는 얘기다.

 

Q. 교수님은 예전에 베트남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하노이의 먼지까지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 베트남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인생에서 베트남과 처음 만나게 된 인연과 이후 교직을 맡게 된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A. 맞다. 저와 베트남과의 관계는 운명적이다. 이 부분은 좀 길게 얘기하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에 입대하여 하사관으로 5년을 복무했다. 전역 후에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원서를 쓰기 위해 출신 고등학교를 방문(당시는 서무과에서 학교 직인을 받아야 함)했다. 그때 서울에 사는 고등학교 동기를 만났다.

 

그 친구가 한국외대를 가자고 해서 즉석에서 결정했다. 그리고 베트남어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베트남어과를 지원한 건 안전하게 합격하기 위해서였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 입사하여 1988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다. 1988년 10월 19일은 88올림픽 폐막식 날이었다. 이후 2년여 동안 주로 베트남에서 보냈다.

 

 

그러다 베트남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베트남 유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이 미수교 국가였다. 그래서 유학 허가를 받는데 엄청 힘들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우리를 한국보다는 조선공화국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요청해서 1992년 수교한 이후 1년 후쯤에 한국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유학 허가는 1991년에 받았다. 정작 공식적으로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은 1992년 9월이었다. 처음에는 호찌민 인사대로 갔다가 자본주의권 학생이라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하노이 사범대 어문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4년 10월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고, 그해 말에 부산외대 교원 모집에 지원하여 1995년 3월부터 강단에 섰다.

 

■ 100호 박사 된 스토리도 흥미진진, 베트남인 위해 6개월 기다려

 

Q. 하노이 사범대 어문학과 100호 박사 스토리도 재미있다.

 

A. 공부도 계속했다. 1995년 8월부터 박사 과정를 시작했다. 한국과 베트남을 왕래하면서 7년만에 2001년 2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미있는 건 제가 100번째 박사였다. 그런데 100이라는 숫자가 중요해 학교에서 베트남인을 주려고 심사를 6개월 미뤘다. 하지만 밀어준 베트남인이 논문을 못 마쳐 결국 제가 100호가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박사학위를 따려면 그 절차가 까다롭다. 연구소와 학과, 교수들 등 50명에게 논문 요약본을 보내야 한다. 그 중 10개 이상의 회신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당사자가 신문사에 공고를 한다. 총장도 행사 끝까지 앉아 있다. 교육부 대학원 국장도 참석한다. 방송사들도 다 와서 취재한다. 그래서 저도 베트남 방송에 나왔다. 저는 당시 100번째가 어떤 의미가 뭔지 몰랐는데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줘서 알게 되었다. 하노이 사범대에서 60주년을 맞아 그 이야기를 다시 싣기도 했다.

 

 

최근 정년퇴직을 준비하면서 짐을 정리하다가 보니 현재 베트남 교육부 장관이 된 사람이 제 논문 요약본 심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친필 평가서 원본을 찾았다.

 

보응웬 지압 장군의 처제를 지도 교수를 두어서 장군의 한국 미디어 인터뷰에 통역을 했던 기억도 새록하다. 한국 최초 베트남 유학생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내로라하는 베트남 인사들과도 집을 방문하는 등 오랫동안 교류를 할 수 있었다.

 

 

■ 1995년 부산외대 베트남학과 강단...이제 베트남은 ‘파트너 국가’ 뿌듯

 

Q. 부산외대에서 베트남학과 교수와 특수외국어사업단장을 맡아 한국 최고 학과로 키웠다. 초기 베트남어과를 만들어 일구던 시절을 회고해 달라.

 

A. 부산외대에서 베트남어과는 1991년 창립되었다. 저보다 먼저 황귀연 교수님과 하순 교수님이 학과의 틀을 다져놓았다. 다만 제가 부산외대에 근무할 당시에도 한국 내에서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도 이 학문이 어떤 가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설득해야 했다. 베트남은 1990년대 초반부터 개혁 개방을 통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한국과의 교류는 아직 제한적이었다.

 

초기에는 교재나 학습 자료조차 부족했다. 직접 현지 자료를 확보하고, 현지 학자들과 협력해 부족한 학습 자료를 채워나가며 커리큘럼을 완성해 갔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언어의 가치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한-베 교류를 선도하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당시의 학생들은 베트남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지만, 관련 정보나 진로의 폭이 좁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적지 않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베트남 현지로 연수를 가기도 하고, 한-베 관련 세미나를 열어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Q. 당시와 지금과 어떤 변화가 있고, 한-베 관계와 학생과 관심의 차이는?

 

A. 현재 그 시절을 돌아보면, 한-베 관계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땅과 하늘의 차이다. 이제 베트남은 한국과 가장 가까운 파트너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경제적 협력은 물론이고, 문화와 인적 교류까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학생들의 관심도 매우 실용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베트남에 대해 막연한 흥미만 가졌다. 이제는 많은 학생들이 베트남에서 취업하거나 창업을 꿈꾼다. 다양한 한-베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 실제적인 경험을 쌓으려 한다. 한-베 간의 무역과 투자, 그리고 한류의 영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이 베트남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베트남을 ‘알아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제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로 여긴다. 특히 현지에서의 경력 기회를 중시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졸업 후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계획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지금은 단순히 베트남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 현지 비즈니스 문화와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베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베트남어과의 중요성이 어떻게 자리잡아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교직으로 인재 양성과 현지 교류를 강조해왔다. 베트남어과의 발전과 함께 학생들의 관심 또한 확대되고 있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양국의 교류가 더욱 깊어지고 있어 기쁘고 뿌듯하다.

 

■ “한-베수교 30주년 현인그룹 위원으로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 만나 영광”

 

Q. 한-베 수교 30주년 ‘현인그룹(Eminent Persons Group: EPG)’으로 활동했다. 한길로 살아온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면 한두 가지 소개해달라.

 

 

A. 제가 무슨 특별한 기여를 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제가 한-베수교 30주년 현인그룹 위원이 된 것은 영광이었다. 두 나라 각 5명씩 총 10명이다. 한국은 이혁 전 한-아세안센터 사무국장-이한우 서강대 교수-채수홍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박번순 고려대 교수과 함께 저였다.

 

한-베트남 관계의 미래 발전 비전에 대한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기 위해, 정치외교-경제통상-사회문화 등 각 분야 작성한 양국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 제언 보고서가 12월 2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에 각각 제출되었다.

 

이 그룹을 하면서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였던 응웬푸빙 대사님과 팜띠엔번 대사님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팜띠엔번 대사님과는 여러 번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다. 1992년 사이공 렉스호텔에서 베트남 공무원과 기업인 대상 교육에서 같이 통역을 맡았었다. 주한 공사로 계실 때는 수교 10주년 기념 베트남을 소개하는 책자를 같이 만들었다. 그분이 시간이 없을 때는 김해공항 커피숍에서 만나 협의하고, 바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또 2대 대사를 맡았던 즈엉찡특 대사님이 계신다. 이분은 1988년 말에 베트남 기업인과 같이 한국을 방문했다. 제가 서울 시내를 하루 안내했다.

 

이처럼 세 분은 모두 한국어를 잘 하고, 북한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남북한을 잘 아는 분들이었다. 이분들에게 1975년 베트남에 억류되어 1980년에 풀려나신 안희완 선생님(당시 영사)이 그동안 당신께서 번역하신 자료를 그분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두 분은 현인그룹 위원이라 직접 전달했고, 특 대사님께는 그분의 아들(현 앙골라 주재 베트남 대사) 에게 전달했다. 안희완 선생님은 한·베 수교 전부터 베트남 경제 관련 자료를 번역하여 우리 기업에게 제공해 왔다. 최근까지도 그러한 봉사를 하고 계신다.

 

 

■ 베트남어학과 제자들, 교원과 중견기업 임원, 사업가 등 두 나라서 맹활약

 

Q.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제자들은 얼마나 되나? 베트남이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소개해달라.

 

A. 사실 베트남어 교수로 가장 큰 보람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맹활약하는 인재를 양성한 것과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30회에 걸쳐 약 1000명 정도가 졸업했다. 그 중에 250명 정도가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있다. 중견기업의 현지 법인장을 맡고 있는 졸업생도 많고 개인 사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졸업생도 있다.

 

특히 국제외국어대학원 대학교 한-베실무통번역학과 학과장 구본석 교수, 이미선 교수, 단국대 베트남학과 백용훈 교수, 청주외고, 충남외교, 하노이와 호찌민 한국국제학교 베트남어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졸업생이 많다. 물론 부산외대 특수외국어 사업단장을 맡고 있는 김태규 교수도 졸업생이다. 제 연구실도 김태규 교수에게 물려주었다(웃음). 한국에서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교원 중 상당수가 저희 베트남어과 출신이다.

 

지금 약 250명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졸업생들이 베트남 각지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 한국 투자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하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를 입학하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베트남 현지 취업을 염두에 두고 들어온다. 우리도 현지 취업을 목표로 가르치고, 이 방법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연어라는 물고기가 있다. 가령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서 산란하며 치어(穉魚)는 거의 1년 동안 강에서 살다가 바다로 내려간다고 한다. 그런데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는 모천회귀(母川回歸) 본능을 갖고 있다. 방류 3년이면 돌아온다. 이제 이들이 두 나라 큰 자산이 되었다. 제자들의 활약의 모습과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면 정말 기뻤다.

 

■ ‘특수외국어 사업단’ 동남아언어 특성화 대학...올해 8개국에 50여명 해외연수

 

Q. 부산외대는 베트남학과 이외 동남아 언어 특성화 대학으로 잘 알려졌다. 그동안 해온 특수외국어 사업단 등 부산외대의 동남아 사랑을 대표하는 사업과 일들을 소개해달라.

 

 

A. 맞다. 부산외대는 베트남학과를 포함하여 동남아 언어와 문화에 특화된 대학으로 잘 알려졌다. 오랫동안 저도 관여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베트남어 외에도 태국어, 인도네시아어, 미얀마어, 캄보디아어, 라오스어 등 동남아시아 주요 언어 전공을 개설하여 학생들이 동남아시아 지역 언어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양한 특수사업과 프로그램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 연구와 교류에 앞장서 왔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동남아 언어를 습득하고 현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협력하여 교환학생 및 해외 파견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해외연수의 경우, 올해는 여름에 8개국에 50여명을 파견했다. 겨울 방학에는 아랍권에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현지 경험을 쌓고 언어와 문화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와 같이하는 동남아 언어 캠프는 전국의 모든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특수외국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세안문화원과 함께하는 ‘아세안 언어 캠프’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으로 해오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산외대가 동남아시아 지역 연구와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도 지속해서 확대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부산외대에서는 베트남 대학과 상호학점 인정제도를 하고 있다. 2년을 부산외대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을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와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면 양쪽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2002년 3월에 시작해서 벌써 20년에 접어들었다.

 

■ 2022년 한국과 베트남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레벨업

 

Q. 한국과 베트남은 2022년 한국과 베트남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적대적인 국가에서 재수교, 상호 3대 교역국이자 핵심 투자협력국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는데, 뽕나무가 바다가 되었다. 그 변화가 실감하는 순간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

 

A. 베트남과의 경제 관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뉴스와 정보가 있어서 말씀드리지 않겠다. 제가 20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앞으로 여러분은 한국 기업이 아니라 베트남의 기업에 근무할 수도 있다. 즉, 여러분의 급여를 주는 사람이 베트남 사람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지금 베트남의 FPT사가 서울에 2개, 대구에 1개의 사업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직원이 280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한국인도 있다. 개방 당시 1인당 GDP 200달러였던 베트남이 이제는 우리 국민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기업도 여럿 생겨났다. 이것이 베트남의 성장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전망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 한강의 노벨문학상 정말 기뻐...한-베 문인 교류 활발, 번역가 부족은 아쉬워

 

Q. 교수님은 베트남 문학의 한국 소개, 한국 문학의 베트남 소개에 진심이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보면서 김구의 문화 대국을 새삼 떠올려 뿌듯하다. 베트남에서의 한국 문학 소개와 인기는? 그리고 베트남 문학의 한국 소개는 계속할 것인지 궁금하다.

 

 

A. 아, 정말로 기뻤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번역가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기관이 있다. 여기에서 그동안 꾸준히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노력해 왔다. 여기를 통해 한국 문학이 베트남에 많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도 세 편이 소개되었다. 한-베 문인 간의 교류도 활발한 것 같다. 다만, 번역가가 그 수요에 비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당연히 저는 베트남 문학 번역을 계속할 것이다. 아마도 내년 설 전에 나올 것 같다. 베트남 스엉응웻밍이라는 소설가의 단편집을 교정 중이다. 또 두 명의 베트남 번역가와 공동으로 450쪽에 이르는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역사 연구서를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설명하면,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와 남프엉 황후가 겪은 삶과 도전에 대해 다룬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가족과 조국을 위한 그녀의 헌신과 강인함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1945년 ‘황금 주간(금 모으기)’ 모금 행사에서 그녀의 헌신이 돋보인다. 당시 남프엉 황후는 직접 몸에 걸친 장신구를 하나씩 풀어 독립 기금에 기부하며 솔선수범했다. 이 모습에 감명받은 시민들도 잇따라 참여했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기부를 넘어 조국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며,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큰 영향을 미쳤다.

 

남프엉 황후의 이야기는 애국심과 희생의 상징으로,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바오다이 황제는 1946년 홍콩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그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인도차이나 은행의 지점장으로부터 긴급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또한 홍콩에서 프랑스 선교 기관의 대표를 만나 왕실 자산을 담보로 금액을 빌리는 등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와 같은 만남은 그가 폐위된 이후에도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일화를 보여준다.​

 

Q. 다시 태어나도 베트남과의 인연과 깊이 맺고 싶은가?

 

A.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하하하... 현재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제가 베트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Q.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 동료 교수들, 대학 관계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은?

 

A. 학생들에게는 “한 우물을 파라”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면 지금 하는 일에 몰두해 보라고 한다. 거기에서 좋은 결실을 맺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동료 교수님과 학교 당국에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들은 저의 인생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것이 베트남이다 』,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베트남 현대시모음』,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부산=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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