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의 Xin chào16] 언더커버 베트남 기자와 김해 소금공장

  • 등록 2026.03.03 22: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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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유력 일간지 뚜오이째 기자 소금공장에서 하루 노동자 ...아시아게임 취재

 

2002년 가을, 2002 부산 아시안게임(9.29~10.14)이 도시를 뜨겁게 달궜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대형 국제 스포츠 행사였다. 부산은 들썩였고, 대학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서포터즈로 나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베트남 서포터즈’가 되었고, 미디어센터에서 베트남 기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내 역할은 단순했다. 셔틀버스를 놓친 기자를 경기장까지 태워다 주고, 통역을 돕고, 길을 안내하는 일. 그러나 대회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베트남 선수단 일정이 줄어들자, 기자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누군가는 부산 명소를 찾았고, 누군가는 조기 귀국을 택했다.

 

 

그 무렵, 후이토(HUY THỌ)라는 이름의 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베트남 유력 일간지 뚜오이째(Tuổi Trẻ) 소속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조용하고 성실한 인상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잠시 ‘기자’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김해의 한 소금공장에서 하루 노동자로 일했다.

 

다음은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을 일인칭으로 서술한 기사 일부이다. 원문에는 외국인 기자의 음차 표기 특성상 한국인 인물 이름이 다소 혼재되어 있으나, 당시 현장의 기록을 존중해 그대로 옮긴다.

 

 

나는 몰래 노동하러 갔다

 

하띵(Hà Tĩnh) 출신으로 한국에서 8년째 일하고 있는 응웬찡호안(Nguyễn Trinh Hoàn)은 이렇게 말했다.

“살 수가 없다면 어떻게 대문호 응웬주(Nguyễn Du)의 고향인 띠엔디엔(Tiên Điền) 마을에서 한국으로 와서 일하며 생계를 꾸리지 않는 집이 단 한 집도 없겠습니까? 먹고살 수가 없다면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4,000~5,000달러를 빌려 고향의 인력 송출 회사에 내고 이곳에 올 생각을 하겠습니까?”

 

나는 한국 사장이 직접 호안의 집까지 찾아와 사람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호안은 그를 옆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주말을 맞아 쉬고 있는 베트남 청년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반면 사장은 호안에게 낮은 자세를 한국어로 계속 속삭이며 사정했다.

 

호안이 나에게 말했다.

 

“그 사람 공장이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납품 기일을 맞추기 힘들대요. 그래서 보통 시급 7,000원 대신 7,500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일자리가 있으니, 누가 굳이 따라가겠어요?”

 

시급 7,500원. 하루 8시간이면 6만 원. 한 달 26일 일하면 156만 원이다. 한편, 노동자의 생활비는, 내가 만난 이들의 경험에 따르면, 가난한 동네의 작은 방 하나와 기본적인 교통비·식비를 충당하는 수준이라면 약 60만 원 안팎으로 버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계산을 해보며 반쯤 농담처럼 호안에게 나도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은 주물공장 일 못 버텨요. 현장 취재를 하고 싶다면 내가 일하는 소금공장으로 소개해 줄게요. 일도 좀 덜 힘들고 사장도 괜찮아요.”

 

소금공장에서의 하루

 

한진 소금공장은 하찬동에 있었다. 호안의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오전 8시 10분 전, 공장 사장은 나를 훑어보더니 작업복과 장갑, 장화를 건넸다. (기사 원문에는 인물의 성 표기가 일부 혼재되어 있으나, 같은 공장 관계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장 터는 약 1,000㎡. 세 개의 대형 수조와 원통형 저장 탱크가 있었다.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호주에서 수입한 암염을 물에 녹여 약 80도까지 가열하면 정제 소금이 바닥에 가라앉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을 긁어모아 20kg짜리 포대에 담았다.

 

호안은 무거운 일을 맡고 나는 포대를 벌려 받아 쌓는 일을 했다. 잠시 후 사장의 가족이 나타나 커피를 타 주고, 포대 입구를 재봉하고, 지게차를 몰아 포대를 옮겼다. 새벽부터 부산항에서 소금을 실어 온 가족의 일손은 분주했다.

 

작업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어지러웠다. 점심은 1인 3,000원짜리 식사였고 사장이 비용을 부담했다. 오후에도 주문 차량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루 8시간 동안 강도 높은 노동을 한 대가로 나는 40,000원을 받았다. 나는 초보자였기 때문에 숙련 노동자들보다 낮은 일당을 받았지만, 하루 노동의 무게를 체감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2003년 3월’의 불안

 

높은 수입과 많은 일자리 때문에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약속의 땅’으로 불렸다. 당시 일부 단체와 관계 기관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에는 수십만 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체류 자격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2년 계약을 원칙으로 했지만, ‘연수생’ 명목으로 낮은 보수를 받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임금 격차는 일부 노동자들이 계약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원인이 되었다.

 

2002년 3월, 정부는 일정 기간 자진 신고 기회를 주었고, 동시에 단속도 강화했다.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과 불법 체류 단속이 병행되면서 현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부산 아시안게임 기간, 경기장 앞에는 외국인 노동자 권익 보호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 제기와 여론 형성은 이후 최저임금 인상 논의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출처: Huy Thọ, Tuổi Trẻ Chủ nhật. Số 42-2002)

 

 

국제화는 박수와 조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셔틀버스를 놓친 기자를 태워다 주는 일, 20kg 포대를 들어 올리는 일, 주말에도 공장 인력을 구하러 다니는 사장의 발걸음 같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국제화는 언제나 누군가의 땀 위에 세워진다.

 

소금은 바닷물에서 태어나 밥상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손을 거친다. 한 사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시안게임의 함성은 오래전에 잦아들었다. 그러나 소금공장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땀은 바다보다 짰고, 그 짠맛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완전히 녹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의 노동 위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실을, 얼마나 자주 떠올리고 있는가. 후이토 기자는 현재도 두오이쩨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다.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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