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다. 한국도 연인원 32만 명이 파견되었고, 그중 8만 5000명 정도가 고엽제 관련 치료를 받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이 480만 명, 환자가 300만 명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숫자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고엽제의 영향을 받아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가 1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피해가 대물림되고 있다.
베트남 작가 밍쭈엔은 <숨겨진 상처>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Báo Văn Nghệ số 30, 26-7-1997. p.10 and 15)를 썼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고통, 특히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다이옥신)의 후유증을 고발하는 르포 형식의 글이다. 전쟁은 끝났고 자연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인간의 몸속에 스며든 화학물질은 세대를 넘어 지속적인 파괴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타이빙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참전 군인 가정을 방문하며, 고엽제로 인해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녀들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부모들의 삶을 기록한다. 겉으로는 총성이 멈춘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각 가정 안에서는 여전히 “폭탄”과 같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당반밍의 두 딸은 젊은 나이임에도 노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며, 말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아버지는 전투 중 총상은 입지 않았지만, 단 한 차례 화학물질에 노출된 이후 그 후유증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조국의 평화를 위해 희생을 받아들였다고 말하지만, 자식들을 바라보는 그의 고통은 감출 수 없다.
또 다른 사례로 도득토앗의 가정에서는 네 발처럼 기형으로 태어난 아기가 며칠 만에 사망하고, 다른 자녀들 역시 심각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라반즈억, 팜반섭, 하티허우, 마이반호앗 등의 가정 역시 비슷한 비극을 겪는다. 부모 세대는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고엽제는 그들의 자녀와 손자 세대까지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남겼다. 일부 부모는 전신마비나 암, 각종 질환에 시달리다 사망하였고, 남겨진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돌봄의 부담 속에서 살아간다.
이 글에서 특징적인 점은 참전 군인들의 태도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과 희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지만, 동시에 자식 세대에 이어진 고통 앞에서는 깊은 절망과 무력감을 드러낸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구조적·윤리적 문제임을 작가는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미국 사회와 전 인류를 향해 호소한다. 고엽제 참상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아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몸속에 남은 ‘숨겨진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이 글의 핵심 메시지다.
열세 번째 나루(직업 군인을 의미함)
스엉응웻밍의 단편 <열세 번째 나루 Mười ba bến nước>는 고엽제가 전쟁의 흔적을 넘어, 인간의 삶과 미래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그려진다. 남편은 전쟁 중 고엽제에 노출되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전쟁이 끝난 뒤 부부는 반복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아이를 출산하는 비극을 겪는다. 병원에서는 외형상 이상이 없다고 진단하지만, 결국 원인은 고엽제 중독으로 밝혀지며 그 영향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개인의 질병을 넘어 가족의 존속과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문제로 이어진다. 남편은 결국 아내에게 정상적인 삶을 위해 이혼을 권하고, 전우들 역시 유사한 고통을 겪는 모습 속에서 고엽제 피해가 개인이 아닌 집단적 재난임이 드러난다. 이처럼 고엽제는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고통, 즉 인간의 몸과 삶을 지속적으로 잠식하는 전쟁의 또 다른 얼굴로 제시된다.
한방 임상실험과 치료 가능성의 탐색
1994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서 하노이 의과대학에 가서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하노이 의대에 가니 한국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잠깐 그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분은 대전에 살고 있으며,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지는 한방 비법으로 한약을 지었는데, 고엽제 환자에게 큰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한약을 임상 실험하고 싶었다. 이분은 한의사가 아니라서 국내에서는 임상실험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캄보디아에 고엽제 환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캄보디아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고엽제 환자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베트남 남부로 들어와서 어느 농촌 마을에서 한약을 달여서 몇 사람에게 주었고, 이 소식이 중앙까지 전해졌다. 베트남 보건부에서는 그를 하노이로 불러, 하노이 의과대학에서 비교적 경증의 환자를 대상으로 열흘간 임상을 했다.
임상을 마치고, 환자들로부터 경과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거의 모든 환자가 불면증이 개선되고, 가려움증이 현저히 나아졌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달걀, 수제 팔찌, 수공예품 등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들의 표정에서 진심 어린 감사가 묻어났다. 불면증과 가려움증으로 엄청나게 고통받았다.
그리고 하노이 의과대학에서 그에게 제안했다. 이번에는 매일 한약을 달여서 나누어주었는데, 다음에는 기숙사에서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2주간 임상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몇 개월 후 한약 재료를 가지고 다시 왔다. 20여 명을 2주간 합숙하면서 한약을 복용케 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날, 나는 다시 통역을 하게 됐다. 저번은 물론 이번도 자원봉사 통역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노이 의과대학에서 이 약의 효능을 확인하는 확인서였다. 그런데 그 확인서에 “불면증, 가려움증 등에 효과가 있으나 백선증은 개선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는 엄청 기분이 상했다. 백선증은 처음부터 고엽제와 상관없는데, 굳이 그 말을 넣었다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하여튼 거의 치료제가 없는 고엽제 환자를 한약으로 치료한다는 얘기에 언론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면담이 끝나고 베트남 TV와 BBC도 촬영했다. 베트남 VTV1에서 베트남어 방송이 끝나면(대략 오후 10시 30분) 이어서 영어로 뉴스를 20~30분 방송했는데, 그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치료를 넘어선 질문: 책임과 희망의 문제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임상에 참여한 현직 군의관이 있었다. 당시 42세라고 했다. 그가 물었다. “이 약을 먹으면 우리가 아이를 가져도 됩니까?” 아기를 갖고 싶은데, 기형아가 태어날 것 같아서 미루고 있다고 했다. 자기도 의사지만 어쩔 방법이 없는 것에 관해 안타까웠다.
그의 질문 앞에서 회의실은 잠시 조용해졌다. 약의 효능을 설명하던 자리였지만, 사실 그가 묻고 있던 것은 약의 효과가 아니었다. 그는 “희망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었다. 전쟁이 남긴 두려움, 혹시라도 또다시 대물림될지 모를 고통, 그 불안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한방 한 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열흘, 이주일의 임상으로 세대를 넘어 이어진 다이옥신의 상처를 단번에 지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무책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의 표정은 분명했다. 불면의 밤을 견디던 이들이 잠을 잤고, 가려움에 피 흘리던 피부가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것은 완치가 아니라도, 적어도 인간의 존엄을 잠시 되찾는 일이었다.
문제는 ‘한 방으로 치료하겠다’라는 과장된 기대가 아니라, 그만큼 절박하다는 현실이다. 치료제가 거의 없고, 국가의 지원도 충분하지 않으며, 국제사회의 책임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매달린다. 그 가능성이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든, 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든, 적어도 그 시도 자체는 절망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날 군의관의 질문은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다. “아이를 가져도 됩니까?” 전쟁은 총성이 멈추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순간까지, 전쟁은 현재형이다. 고엽제의 상처를 진정으로 치유한다는 것은 단지 약 한 첩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고, 과학적 연구를 지속하고, 피해자와 가족을 끝까지 돌보는 일이다.
한방이든 양방이든, 혹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새로운 치료법이든, 우리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숨겨진 상처’가 더 이상 숨겨져 있지 않도록, 그리고 그 상처가 또 다른 아이의 몸에 새겨지지 않도록. 그 군의관이 두려움 없이 “예”라는 답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분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 아마도 명함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사진
01: 고엽제 환자와 대화를 녹화 중인 베트남 TV, 왼쪽 흰머리가 한국인(배양수 제공)
02: 고엽제 환자와 대물림된 자녀(배양수 제공)
03: 고엽제 환자인 군의관(배양수 제공)
04: 임상에 참여한 환자들(배양수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