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 교수는 유학 1세대로 한국 최초 베트남 유학생이다. 그가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88년 10월 19일은 88올림픽 폐막식 날이었다. 그의 유학 기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와 수교를 시작한 시점을 가로지른다. 그는 도이머이(Đổi mới: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이후 1992년 9월부터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1964년 한국 베트남 전쟁 파병,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통일 등 긴장관계였던 두 나라는 1992년 12월 22일 공식적인 수교를 맺었다. 그는 1세대 유학생으로 2001년 ‘베트남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10년간 총무로 부산을 방문하는 베트남 학자, 고위 공무원들과 밥을 먹고 선물을 나누면서 교류활동을 했다. 베트남 문학 작품 번역가으로도 이름이 난 교수 배양수는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아세안익스프레스에 베트남 단편소설 6편과 르포 1편 등 7작품을 번역해 소개했다. 베트남 단편소설을 집중적으로 단기간에 소개한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이 기획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베트남 현지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스엉응웻밍의 단편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여행자의 전설> <이웃(HÀNG XÓM)> <천지가 진동할 얘기(Chuyện Động Trời)>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에 이어 <생쥐 띠의 실종(Tí chuột mất tích)>을 6번째로 싣는다. 응웬 타이 하이(Nguyễn Thái Hải)는 다수의 청소년 소설을 발표했다. <편집자주> 생쥐 띠의 실종(Tí chuột mất tích) ‘아이스크림 타잉’은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타잉의 별명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타잉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장사를 하러 다녔다. 타잉은 다른 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을 파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쉬는 시간에 바로 자기 학교에 와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아이스크림 타잉은 같은 학년의 오후반 학생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들은 빙, 산, 카잉과 생쥐 띠였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여행자의 전설> <이웃(HÀNG XÓM)> <천지가 진동할 얘기(Chuyện Động Trời)>에 이어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를 5번째로 싣는다. 응웬 후이 티엡(Nguyễn Huy Thiệp)은 도이머이 이후 <퇴역장군(Tướng về hưu)>이라는 단편소설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다. <편집자주>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 “옛사람들 지금 혼은 어디에 있는가?” -부딩리엔- 1.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나는 수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N성(省)에 있는, 여우와 원숭이가 울부짖는 산 구석에 자리잡은 범(Bâm)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때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한 스무 살의 나이로 아주 어벙할 때였다. 나와 한방을 쓰던 동료는 수학을 가르치던 조아잉이었다. 조아잉은 내 나이보다 두 배나 되었고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나는 징계를 받아서 이곳까지 밀려왔네만 자네는 무슨 업장이 있길래 이 구석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여행자의 전설>에 이어 <이웃(HÀNG XÓM)>을 싣는다. 작가는 사이공 해방지(Saigon Giai Phong)> 기자로 활동하였고, 부편집장을 역임했다. <편집자주> 이웃(HÀNG XÓM) 1994년 초에 바띠가 기르던 고양이가 갑자기 집을 나갔다. 바로 그날 아파트 물 펌프의 모터가 타버렸다. 1층과 2층에 있는 집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 탑이 아파트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약하기는 했지만 2층까지는 물이 나왔다. 3층 이상에 사는 사람들은 불평이 대단했다. 경비원은 허허 웃으면서 “나는 그것이 타버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지 놀란 것은 그것이 어떻게 그리 오래 견뎠냐 하는 것이다”라고 빈정거렸다. 그는 이미 석 달 전에 물 펌프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아파트 관리위원회에 경고했다. 관리위원회는 관계 기관에 보고하였다. 관계 기관의 담당 과장은 화가 나서 “그것은 이제 더는 우리 기관 소관 사항이 아니야! 타지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아파트의 반을 차지하고 있어! 우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에 이어 <여행자의 전설>을 싣는다. 주간 <문예지>에서 뽑은 2002년 우수 단편작이다. 작가는 베트남공산당 홈페이지 문예 담당 부편집장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막 끝났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절에 사는 동자는 오직 보리수 나뭇잎만 치울 줄 안다. 너는 엄마를 거울 삼도록 해라. 평생 남자를 훔쳐간 여자라고 비난받았다. 자식도 여러 종류이고, 모두 나를 엄마라고 불렀지만, 속으로는 칼로 찌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놈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내 무덤에 풀이 파랬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운송조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말이 운송업이지 실제로는 매일 물소 수레를 끌고 군청에 가서 소금, 액젓, 성냥, 전등을 받아서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웃통을 벗어 윗도리를 배에 둘러매고, 수레에는 물바가지와 도시락을 느슨하게 걸고는 안 다니는 곳이 없었다. 멈추는 곳이 집이요, 눕는 곳이 침대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혼기를 놓친 처녀로 일찍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를 싣는다. 군 출신 작가 스엉응웻밍은 ‘농촌 여성’을 주제로 쓴 작품이 많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으로, 냉철한 사고와 따뜻한 마음으로 여성의 운명을 통찰한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베트남 현대사를 이해하는 또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1. 남편에게 새 아내를 얻게 했다. 이옌하 마을에서는 전혀 없었던 신기한 얘기다. 신부는 혼기를 놓친 내 친구였다. 그녀는 남편이 필요했고 합법적인 자식을 간절히 원했다. 내가 중매를 섰다. 나는 시댁과 함께 약혼식에도 갔고, 결혼식 참석은 물론 신부를 데려왔다. (역자주: 베트남 결혼식은 신랑 측이 신붓집으로 가서 조상과 친지들에게 예를 갖추고 신부를 데려온다) 결혼식은 기쁨과 슬픔, 수줍음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신부가 행복의 방으로 들어갈 때 나는 조용히 뒷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로 나왔다.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울면서 걷다가 무작정 나루터로 달려가 사공을 불러, 강 건너 친정으로 갔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여자에게는 열두 나루가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다른 여
스엉응웻밍(Sương Nguyệt Minh)은 1958년 9월 15일생이다. 본명은 응웬응옥썬이다. 닝빙성이 고향이며, 군 출신 작가다. 1992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으로 2003~2004년 문예지 단편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십여 권의 작품을 발표했다. 2014년에 발표한 캄보디아 전쟁과 관련된 황무지(Miền hoang)라는 장편소설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현재 하노이에 살고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2002년 겨울이었다. 베트남 단편소설을 연구하면서 고른 작품 중에 1996년에 발표된 단편 <문서로 된 항고장>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당시 10여 편의 단편을 고른 다음 그 작가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베트남 문인회의 도움을 받아 일부는 문인회 사무실에서 만났고, 스엉응웻밍은 따로 만났다. 당시 그는 현역 군인 신분이었다. 20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만남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장보 호수 근처의 호텔 방에서 만났다. 혼자 오지 않고 다른 작가와 같이 왔는데, 그도 군인이었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한 10여 년쯤 되었을 때, 그가 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