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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9] 18세기 쓰시마 번주 호-슈, 아베 외교 꾸짖다

‘교린제성’ ‘해유록’ 재발견...‘값싼 일본우월감’ 경고 호-슈 외교사상 새삼 주목

 

희한한 일이다. 18세기 초엽 쓰시마 번주 소(宗)씨의 한 대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유학자가 지금 아베 정권의 대한 외교정책을 꾸짖고 있다. 그가 이 섬에서 활약한, 조선어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이다. 카미가이토 겐이치(上垣外憲一)는 “조선과의 평등을 존중하고 힘에 의한 위압을 부정하는 호-슈의 외교사상이 메이지 일본의 국책과는 도저히 상용될 수 없었다” 면서 그 꾸지람을 이렇게 사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때문이야말로 호-슈는 실로 우리시대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일로전쟁의 승리가 경제전쟁의 승리로 바꿔치기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값싼 일본우월감에 우리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지금, 또한 무력을 대신한 금력에 의한 위압외교에 일본이 의존할지도 모르는 위험도 느낄 수 있는 지금, 호-슈 사상의 의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上垣外憲一, 1989, 8~9).

 

물론 위에서 든 카미가이토의 저서는 아베정권이 들어서기 훨씬 전 1989년에 나왔다. 그러나 그가 20세기 초엽 메이지 일본이 노일전쟁[1904~5]의 승리에 취한 ‘값싼 일본우월감’에 대한 경고는 지금 아베가 자행한 대한 수출규제, 즉 ‘무력을 대신한 금력에 의한 위압외교’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우리가 이번 이야기에서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사상을 회고하고자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쓰시마 섬은 거듭 말하지만 그 지정학적인 위치 상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을 갖는다.

 

앞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쓰시마를 중심으로 하는 한일관계는 역사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고고학 편년기로 말하면 야요이(弥生) 시대[기원전 4세기 경~후 3세기 경] 이래 이 섬은 한반도의 문물이 건너가는 창구이었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 쓰시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저지른 임진왜란의 조선침략 전진기지의 몫을 했다.

 

근세로 들어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집권기에 접어들자 한일 간에 평화의 기운이 일었다. 이때 이 섬은 조선통신사의 길잡이 몫을 했다. 그 길잡이 몫을 해낸 주도적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가 쓰시마 번의 번사로서 조선과의 교린관계를 이어간 그의 안목과 행적을 살피려는 것인데, 이는 지금이나 앞으로 한일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에도 중요한 함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호-슈가 조선 통신사제술관(通信使製述官) 신유한(申維翰, 1697~1769)과 나눈 교유가 눈길을 끈다. 이 교유의 적지 않은 부분이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海游錄)에 남아 있다.

 

■ 민초들이 즐겨 읽는 소설 ‘춘향전’ 등으로 배운 호-슈의 조선어 습득

 

시바료타로는 이키-쓰시마를 여행하면서 아메노모리 호-슈에 관한 대목을 적고 있다. 어느날 아침 함께 여행하는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를 마주쳤을 때 그가 느낀 감회다. 그날 새벽에 이진희 씨가 이즈하라 산꼭대기에 있는 아메노모리 묘에 참배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호-슈의 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아메노모리 호-슈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물이기에 일본인의 ‘자이니치’ 인종차별 벽(癖)에 철벽을 절절이 느꼈을 터인 이진희 같은 재일학자가 참배까지 했는가?

 

호-슈는 1668년 오미(近江) 국 이카군 아메노모리 촌[현재 시가현 나가하마 시 다카쓰키 정]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나이로 가업인 의사 수업을 받았지만 1685년 에도로 나아가 이름난 유학자 키노시타 준안(木下順庵)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을 배웠다. 그곳 같은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던, 평생지기이며 라이벌이기도 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를 만난다.

 

 

호-슈가 쓰시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스승 키노시타의 추천으로 1692년 쓰시마 번에 발탁되어 문교(文敎)나 대조선 문서를 담당하는 진문역(眞文役)이 되면서부터다. 그는 막부정권으로부터 1698년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 즉 통신사 전담 보좌관 명을 받고서 쓰시마에 주재하게 된다. 그때 부산진에 건너와 초량에 있는 왜관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습득한다. 글쓴이는 호-슈의 행적 중 그가 조선어를 배운 마음에 천착한다.

 

그가 배운 조선어는 선비들이 쓴 한자 문어가 아니라 오히려 천시했던 언문(諺文)이었다. 언문을 배우기 위해 그는 <춘향전> 등 민초들이 즐겨 읽는 소설을 텍스트로 사용했다 한다.

 

호-슈가 왜 언문에 관심을 두었을까? 그는 그가 교유한 신유한 등 조선 문인들의 언어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조선 민초들의 ‘언문’에 관심을 둔 까닭을 생각해 본다. 조선어에 밝은 일본의 한 연구자는 호-슈의 언어관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중국어, 한국어를 깊게 익힌 호-슈는 비유적으로 구조가 다른 언어라고 해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가치는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어와 중국어에서는 동사와 목적어의 어순이 반대라고 해도 그 말이 형태를 이루고 발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정한다면 일본어도 중국어도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촘스키[Noam Chomsky, 미국 MIT 언어학 교수-글쓴이]의 ‘변형생성문법’ 원형에 너무나 맞는 생각을 250년이나 더 이전에 호-슈는 군더더기 없이 말한 것이다(上垣外憲一, 1989, 6).

 

글쓴이는 호-슈의 언어관을 촘스키에 견주기보다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말한 언어 명제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호-슈가 조선 민초들이 쓴 언어에 큰 관심을 보인 것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라고 비유했듯이 호-슈는 조선 민초의 밑바탕 존재의 언어를 모르고는 조선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본 것이리라. 그는 언문에 스며든 조선의 마음을 읽지 않고는 조선인과의 소통을 하기 어렵다고 본 까닭이 아니었을까.

 

■ 일본인으로서 조선외교에서 마음가짐을 담은 <교린제성>

 

글쓴이는 이와 관련해 호-슈가 1726년 쓰시마 번주 소-요시노부(宗義誠)에 상신한, 일본인으로서 조선외교에서 마음가짐을 담은 <코-린테이세이>(交隣提醒, 이하 ‘교린제성’)에 주목한다.

 

이 책은 조선과의 ‘성심지교(誠心之交)’를 으뜸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기본적 외교사상을 담고 있다. 즉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호-슈가 말한 ‘성심지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여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유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에도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선린우호에 계속 살아 있다”(上田正昭, 2011, 25)고 짚는다.

 

호-슈가 조선외교의 마음가짐을 모두 54개조에 걸쳐 논한 <교린제성>에 대해 위에서 든 카미가이토 켄이치(上垣外憲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호-슈의 저작 중 가장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61세 떼 저술한, 쓰시마 번주에 대조선외교의 마음가짐을 설명한 <교린제성>일 것이다. 22년간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으로서 외교절충의 실무에 있었던 호-슈의 조선에 대한 매우 세밀한 현실파악과 격조 높은 이상주의와의 조화를 이룬 불후의 명저다. 이 책에서 호-슈가 거듭 설명한 것은 조선과의 외교를 행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풍속, 관습을 잘 이해해 이를 존중하는 것이다(上垣外憲一, 1989, 174).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는 일본과 조선의 ‘기호풍습의 차이[嗜好風義の違ひ]에 대해 “일본의 기호풍습을 가지고 조선인의 문물을 보셔서는 (日本の嗜好風義を以て、朝鮮人の事を察し侯はては)” “반드시(必ず)” “잘못”(了簡違)을 저지른 것이라고 명언한다(上田正昭, 2011, 3~4)있다. 그러한 예 중 호-슈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한다.

 

「일본인이 조선역관에 조선국왕은 뜰에 무엇을 심는가라고 묻자 “보리를 심는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이이고 저런 보잘 것 없는 나라군”라고 깔깔 웃었던 적이 있었다」며 「화초라도 심는다면 좋으련만 우아함을 찾아 볼 길 없는 보리를 심다니 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호-슈는 이것은 왕 스스로 농경 일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예부터 미덕으로 삼는 것이기에 반드시 일본인도 깊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해 보리를 심는다고 답했는데도 일본인에게 조소를 받고만 예라고 한다(上垣外憲一, 앞의 책, 175).

 

여기서 새겨두어야 할 것은 호-슈가 언어에 스며든 조선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그의 마음가짐이다. 그는 두 적대국 간에 심리전적 전략으로 조선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 두 우호국 간의 성의를 다한 교린을 위해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의 국학자들이 도모한 일본 절대화에 대해 그 대척점에 있는 상대주의 사상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시 카미가이토에 돌아가 보자.

 

호-슈의 세계관은 명확히 상대주의적이며, 하나의 고정된 문화의 절대적인 우월을 부정했다. 그것은 존대에도 비하에도 인연이 없다. 당시의 유학자, 예컨대 오규 쇼라이(荻生徂來, 1666~1728: 에도 중기의 유학자-글쓴이)의 중국문명 지상시(至上視) 와도 다르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 에도 중기 사대국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짐-글쓴이)로 대표되는 국학자의 일본 고대문화 숭경과도 다른 것이다. 국학이 그 후 우세하게 되어 그것이 서양 근대의 내셔널리즘과 결부되어 일본에서 하나의 ‘절대’로 되었을 때 호-슈는 잃어버린 사상가로 된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위 책, 8).

 

그러나 한국에서 호-슈는 ‘잃어버린 사상가’는커녕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 중 궁중만찬사에서 ‘성의와 신의의 교제를 신조로 한’ 호-슈의 인물됨을 기리자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교린제성>에 돌아가 보자. 저자는 이 책에서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특히 1597년 때 조선병사의 코[鼻]를 벤 숫자가 10수만을 넘는, 그 이를 데 없는 잔혹함에 분개하고 있다. 1597년 9월 28일 한 중이 코 무덤[비총(鼻塚)]을 공양했는데, 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력을 시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뒤에 비총이 이총(耳塚)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총에 대해 호-슈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총의 유래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분없는 전쟁(豊臣家無名の師)’ 즉 대외명분이 전혀 없는 침략으로 간주하고 “양국 인민이 무수히 살해된 전쟁의 포악이라고, 훌륭하게 짚었다고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되새긴다.

 

<교린제성> 마지막 조 머리에 “성심지교라고 말씀드리는 것, 많은 사람이 되뇌어도 대체로 그 뜻이 막혀버리옵니다. ‘성심(誠心)’과 ‘말씀’[申候(もうしそろう)]은 실 뜻과 말씀드린 것[申事]”이란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류하심을 성심과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호-슈의 외교사상은 되풀이하지만 한마디로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류하심”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에다 교수는 “18세기 전반에 이와 같은 선각자[先人]이 있었다니” 감동하면서 “<교린제성>이 말하는 바의 ‘성심의 교유’란 지금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되새기는 ‘국제화’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면서 “국제화라고 말씀드리는 것, 많은 사람이 되뇌어도 대체로 그 뜻이 막혀 버리는 것이 옵니다”라고.

 

 

■ ‘녹록지 않은 인물’로 묘사된 호-슈에 관한 책 <해유록>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에는 호-슈와의 교유한 언행이 기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호-슈에의 정의(情誼)가 그려져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승냥이 같은 인물[狼人]’이나 ‘험한 승냥이[險狼]’이라고도 쓰기도 한다.

 

이 인물은 녹록치 않다. 겉으로는 근사한 말은 하지만 흉중에는 칼을 차고 있다. 그는 일본 국법에 의해 한 조그만 섬의 서기에 지나지 않기에 좋지만 만일 그에 국사를 맡기고 권력을 갖게 한다면 반드시 인강(隣疆: 조선을 가리킴)에 틀림없이 일을 일으킬 것이다.

 

즉 그도 히데요시와 같이 조선을 침략할 사나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바료타로는 “뒤에 정적으로부터 공격당할지도 모르기에”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司馬遼太郞, 2008, 181~182).

 

신유한이 1719년 통신사 제술관(製述官)으로서 쓰시마에 도착해 호-슈와의 주고받은 말도 흥미를 끈다. “식사라 끝날 즈음 한 사람이 태수(太守), 즉 번주가 납시었다고 고했다. 좌중이 일어나려고 하자 나는 말을 막고 「청컨대 모두는 앉아 계세요」라고. 아메노모리는 내가 말을 듣고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한다. 나는 이르기를 「당신은 반드시 나를 하여금 섬주 앞에 나아가 절을 시키고 섬주는 않은 채 소매를 들고 대답하기를 바라겠죠」라고. 그는 「예부터 그러 했오」라고 한다. 나는 비로소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서로 앉아 말하지요」[合座交敎]라고 주장했다.

그 때 좌중 한 사람인 아메노토-(雨森東=아메노모리 호-슈)만이 나의 뜻을 풀이해 돌연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도 섬주에 아래이고 군신의 의가 있다. 굳이 당신의 말로써 위아래를 바꿀 수는 없소. 두 나라가 선린을 맺은 이래 그래서 예가 있지요. 지금 하루아침에 이것을 버리기를 바란다면 나를 업신여기는 것 아닌가」 라고. 나는 이르기를 「예는 경(敬)에서 나오는데 업신여기면 버려집니다. 나는 굳이 귀국을 업신여기지 않았거늘 귀국이 나를 업신여기는군요」.

<해유록> 말미에 그가 일본에 머문 10개월 동안 보고 들은 것을 부록으로 묶고 있는데, 이름하여 ‘일본견문잡록’이다. 이 견문잡록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아메노모리 토-(雨森東)가 에도에서 돌아와 객관에 느긋이 머물고 있었을 때 내게 말했다.

 

“여보시오. 언젠가 틈이 나면 말해보고 싶은 소회가 있소.

“일본과 귀국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인데 서로 신의를 깊게 하고 있소. 우리나라[敝邦] 인민은 모두 조선국왕과 우리 주군이 경례의 국서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때문에 공사의 기록[文簿]에 반드시 극진히 존경을 다하고 있소.

“그러나 귀국인이 은밀히 펴낸 문집에를 보면 그 중 말이 우리나라에 미치는 곳에는 반드시 왜적(倭敵), 만추(蛮酋)라고 칭하여 추멸낭자(醜蔑狼藉), 참을 수 없는 바이오.

“우리 문소왕(文昭王=도쿠가와 이에노리(德川家宣) 제6대 장군)이 그 말년에 가끔 조선 문집을 보고 모여 있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조선이 우리를 업신여기게 된 것을」라고 삶이 끝날 때가지 유감으로 생각했소. 오늘날 제공들은 그 뜻을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아메노모리는 몹시 불평의 기색을 띠고 점점 노기조차 나타냈다. 나는 이르기를

 

“그 뜻은 쉽게 알 수 있지요. 되돌아보면 귀국이야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오. 당신이 본 우리나라 문집이란 누가 지은 것[何人の著 ]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이 모두 임진왜란[壬辰の乱] 뒤에 간행된 글[文]일 것이오. 히데요시[平秀吉]는 우리나라의 하늘을 찌르는 원수[通天の讐]이며, 종사(宗社=국가)의 치욕, 생령의 육신과 피(生靈の血肉)를 유린한, 실로 만세에 없었던 변을 일으킨 자이오. 우리나라 신민이 된 자 누가 그의 육신을 찢고 저며 먹으려 생각지 않으려는 자(その肉を切り刻みて食わんと思わぬ者) 있을까. 위로는 천신(薦紳=신분 높은 이)부터 아래로는 미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이를 놈[奴]이나 적(賊)라고 말하여 되돌아보고 그것이 글로 반영되었다 해도 너무 당연할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성조(聖朝)는 어짐[仁]으로써 생민을 사랑하고 관시(關市=부산 동래왜관)를 열어 교역하고 더욱 일본 산하에 히데요시와 같은 부류가 없음을 알고 있소. 때문에 통신사를 파견해 화묵을 닦고 국서를 교환하고 대소의 민서 모두가 그 덕을 기리고 있소. 어찌 굳이 숙원을 재발시키려 하겠소.”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참고문헌

 

上垣外憲一, <雨森芳洲>, 中央公論社1, 1989

司馬遼太郞, <街道をゆく> 시리즈 13 「壱岐·対馬の道」, 朝日新聞出版, 2008

申維翰, <海游錄> 姜在彦 訳, 平凡社, 1974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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