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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23] 일본인의 신앙: 쇼민쇼라이와 우두천왕

일본인은 누구인가 6: 일본인의 신앙: 쇼민쇼라이(蘇民將來)와 우두천왕(牛頭天王)

 

2001년 4월 20일 일본의 옛 도읍 나카오카 경(長奧京) 발굴 현장에서 한 매의 나무 표찰[木札]이 발견되었다. 세로 2.7cm, 가로 1.3cm, 두께 2밀리의 이 표찰에는 ‘소민쇼라이자손자(蘇民将来子孫者)’라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비백(飛白) 체[글자의 획에 희끗희끗한 흰 자국이 나도록 쓴 묵서(墨書)의 서체의 한 가지-글쓴이]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소민쇼라이의 자손입니다”라고 쓰인 표찰은 뒤에서 살피듯이 당시 일본의 서민들이 역병막이[疫病除け] 부적[お守り]으로 효험이 있다고 믿는 민중 신앙의 표식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 같은 부적 중 천년 이상이나 된, 가장 오랜 것이라 한다(川村湊, 2007, 6).

 

일본의 신사나 절간에서는 지금도 ‘소민쇼라이’ 부적을 배포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 부적을 현관 입구에 걸어두는 풍습이 지금도 일본 각지 마을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민쇼라이의 자손’이라고 쓰인 부적이 왜 역병을 막아 준다는 것인가? 이런 민간신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여기에는 행역신(行疫神)인 고즈텐노오(牛頭天王, 이하 ‘우두천왕’)의 이야기가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우두천왕 이야기에 쇼민쇼라이蘇民將來)·코단쇼라이(巨旦將來)라는 형제 이야기가 딸려 나오는 것이다.

 

이 형제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문헌은 나오는 카무쿠라(鎌倉)시대 후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샤쿠니혼기>(釈日本紀, 이하 <석일본기>이다. <석일본기> 권 7에 수록된 “에노쿠마쿠니야시로(疫の隈国つ社)”의 연기(緣起)인데, <히고국풍토기>(肥後国風土記)의 일문(逸文)이다. 그것이 바로 소민요라이 형제이야기이다.

 

<석일본기>는 1274년에서 1301년에 걸쳐 우라베카네가타(卜部兼方)가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8세기 초에는 ‘소민쇼라이’ 신앙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적 사실 및 문헌에 의한 사실로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14세기 초 소민쇼라이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은 이 이국신 또는 이국신앙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의문은 잠시 미루고 소민쇼라이 부적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 우두천왕 이야기-조선반도에 그 연원

 

이야기는 우두천왕이 장가 가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머리 위에 3척의 소머리, 붉은 색의 뿔이 나온 우두천왕은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 마나님[后]도 없었다. 어느 때 샤가라(娑竭羅) 용왕의 딸 하리사이메(波梨采女)가 처가 된다는 것을 알고, 많은 권속(眷属)과 가신[家來]들을 데리고 하리사이메가 사는 용궁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 해가 저물어 쇼민쇼라이·코단쇼라이가 사는 곳에 이른다. 우두천왕은 먼저 코단쇼라이에 묵을 곳을 청했지만 코단은 사심을 품고 우두천왕 일행을 내쫓았다. 그러나 그의 형 소민쇼라이는 달랐다. 그는 가난하지만 자비심을 가지고 우두천왕을 후대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우두천왕은 드디어 하리사이메와 혼인해 여덟 황자를 얻고는, 옛날 자신을 박대한 코단쇼라이에 복수를 다짐한다. 그 일족을 모두 죽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시집온 쇼민의 딸만은 ‘쇼민쇼라이의 자손’이라고 쓴 부적과 ‘치노와(茅の輪: 모초로 만든 큰 고리로 음력 6월 그믐날 신사 불제(祓除)행사 때 참배하는 길목에 세워 그 고리 속을 빠져 나가면 병을 피할 수 있다는 민속)’를 주어 목숨을 구해 줬다(<祇園牛頭天王緣起>)고. <기원우두천왕연기>는 교토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의 창건 유래를 적은 고문서인데 여기에 우두천왕 이야기가 나온다.

 

 

소민쇼라이 신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가와무라 미나토는 위에서 나카오카 경에서 발견된 소민쇼라이 부적에 대해 “물론 이는 소민쇼라이 신앙이 8세기까지에는 이미 일본에 들어와 일본인에 의해 믿게 된 것을 의미한다” 면서 이 신앙을 이렇게 특징짓는다.

 

게다가 그것은 부적으로서 몸에 지니게 된 민간의, 이른바 서민 신앙이었다. 그것은 외래 신흥종교로서 황족이나 귀족들이 먼저 챙긴 화려하고 장엄한 불교도 아니고, 유학승이나 학자 승들의 마음을 잡은 유교나 도교의 혼효한, 난해하고 치밀한 가르침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행역신(行疫神), 역신, 포창신(疱瘡神), 이른바 역병신의 지벌이나 노여움으로부터 자신이나 가족의 몸을 지키려는 소박하고 단순한 신앙이었던 것이다(川村湊, 2007, 7).

 

소민쇼라이 신앙은 ‘소박한’ 서민신앙이라는 특징은 그대로이지만 일본인의 처지에서 이 신앙의 이국성은 두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는 그것이 한반도에서 유래한다는 점, 그 결과 당연하지만 한반도의 무교를 바탕으로 한 토착 종교·전설과 광범위한 습합(習合)이 이루어진 점이다.

 

쇼민쇼라이 신앙이 한반도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제 강점기 ‘조선민속학의 원조’[朝鮮民俗学の祖]라고 말할 수 있는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鞆)의 저서 <역사민속조선만담>(歷史朝鮮民俗漫談, 1928)에 ‘조선의 소민쇼라이(朝鮮の蘇民将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본의 우두천왕에 관계있는 신사와 절에서 소민쇼라이라고 나무에 새긴 것을 역병막이로서 나오는, 또한 병막이에 소민쇼라이의 자손이라고 써 붙이는 것이 행해지고 있다. 이 쇼민쇼라이는 스사노오노미고토(スサノウの尊)가 해신(海神)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전설이 붙어 있는데 지금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평안남도 미신조사를 했을 때 안주군(安州郡)에서 ‘蘇民将来之子孫海州后入’이라고 가로일촌세로삼촌[橫一寸從三寸]의 적색지(赤色紙) 문패에 붙여 병막이 부적[呪符]으로 하는 것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발견이다(川村湊, 앞의 책, 59~60, 재인용).

 

가와무라는 이마무라가 발견했다는 ‘蘇民将来之子孫海州后入’을 인용하고는 “소민쇼라이 자손이 해주의 며느리[嫁]가 들어왔다”는 의미라며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어쨌든 <히고국풍토기> 일문에 보이는 ‘소민쇼라이자손야(蘇民将来子孫也)’라는 방역 부적의 기원이 조선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보고자가 일본의 사례와 혼동했다든지, 이 소민쇼라이 신앙이 일본에서 역수입되었는지도 모르는 의문이 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원래 ‘소민쇼라이’라든가 ‘우두천왕’이라는 이름의 울림에서 보면 일본기원보다는 조선반도에 그 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납득하기 쉽다. 불교도 유교도 일본열도에 조선반도를 거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川村湊, 위 책, 60).

 

■ 한반도 무교의 전설 '바리공주 설화'와 연관성

 

다음으로 한반도의 무교를 바탕으로 한 토착 종교·전설과 광범위한 습합(習合)이 이루어진 현상에 주목해 보자. 그것들 중 바리공주 설화가 돋보인다. 가와무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옛날 조선의 한 임금이 이을 아들이 얻지 못하고 일곱 딸만을 낳았다. 드디어 임금은 참지 못해 일곱 번째 공주를 왕궁 뒤 정원에 버리라고 가신에 명했다. 그러나 버려진 딸은 까마귀가 거두어 쑥쑥 자랐다. 그것을 안 임금이 이번에는 옥함에 넣어 바다에 버리라고 명했다. 신하는 산을 넘고 강을 넘어 붉은 바다에 딸을 넣은 함을 버렸지만 금색의 거북이 나타나 등에 태워 동해를 헤엄쳐 건넌다. 석가 부처님이 그것을 보고 마침 지나가는 비리공덕(比利功德)의 부부에 함을 수습해 딸을 기르라고 명했다.

 

부모인 왕과 비에 의해 버림을 받은 따님[姬君]이기에 ‘버림받은 딸’ 또는 ‘버린 딸’ 즉, 한국어에서는 ‘버리다(捨てる)’는 ‘ポリダ’[버리다] 이기 때문에 ‘바리(パリ)’공주라 이름짓게 된 것이다. 즉, ‘パリこんジュ(바리공주)’ 또는 ‘パリテギ(바리댁이)’라고 불린다.

 

이 바리공주가 15세가 되었을 때 국왕이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점쟁이에 물으니 일곱 번째 공주를 버린 죄로 임금 부부는 동시에 죽는다고 한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공주를 찾아 삼각산의 불사의 약과 무장신(無長神)의 약령수, 동해 용왕의 히레 주, 봉래산의 가얌초[カヤム草], 아나산[アナ山]의 구설초(狗舌草)를 구하여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들이 딸을 찾아내 드디어 임금 부부의 왕실에 닿았는데, 왕의 편지를 보여주며 궁전에 돌아오도록 간원한다. 공주는 왕궁에 돌아오지만 약수를 구하러 떠나는 자는 없고 다만 일곱 번째 공주 한 사람만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약수를 구해 먼 길을 떠난다.

 

석가, 지장, 아미타 등의 안내를 받아 지옥에 사는 무장신선(無長神仙)의 슬하에 의지한 공주는 9년 동안 물을 긷고 불을 붙이고, 나무를 베는 괴로운 일을 해내고, 다시 무장신선과 혼인해 일곱 자식을 얻고 드디어 약령수를 손에 넣는다. 현몽에 의해 양친의 죽음을 안 공주는 남편과 일곱 자식들을 데리고 도읍에 돌아와 장례 도중 양친에 약수를 마시게 해 소생시킨다. 공주는 부모의 허락 없이 혼인한 것을 사죄하여 왕의 허락을 얻고, 이어 산 자와 죽는 자를 천거하고 인도하는[薦導] 만신신주(万神身主)가 되고 자식들도 모두 각각 신선이나 스님이 되었다(川村湊, 위 책, 68~69).

 

 

이 바리공주 신화는 오랫동안 무당들의 굿에서 구승되어 온 것인데, 처음 문자로 기록된 것은 일제 강점기 서울에 새워진 경성제국대학의 사회인류학 교수로서 조선의 샤머니즘을 연구한 아키바라 다카시(秋葉隆)이었다.

 

그는 저서 <조선무속의 현지연구>(朝鮮巫俗の現地硏究)에서 ‘경성’에 사는 샤먼, 곧 무당 배경재(裵敬載)가 말하는 ‘바리공주 신화’을 채록했다는 책 서문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 채록되는 전설은 바리공주(パリこんジュ) 또는 마루미(マルミ)라 하고, 치노키(チノキ)라 칭하는 망자공양의 무제(巫祭)에서 무녀가 방울[鈴]을 흔들고 장고(杖鼓)를 치면서 부르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조(李朝) 초기에 이루어 진 것으로 여주인공 바리공주[捨姬]는 무조(巫祖)로서 전해지는 것이다(川村湊, 위 책, 70).

 

이 바리공주 신화야 말로 무교를 기반으로 토착화한 종교·전설의 집합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교의 신선사상, 불교의 구원사상 등 무교를 기반으로 토착화한 이야기이다. ‘바리’공주라는 이름부터 우두천왕의 처가 된 하리사이메와 닮았지만 그녀가 낳은 여덟 황자도 바리공주가 낳은 일곱 공주와 엇비슷하다. 다만 우두천왕은 악한 무리를 처단하고 선한 백성을 구했지만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죽음에서 구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지금 전 세계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역병의 팬데믹(대유행)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 이럴 때 본관이 강릉 김씨인 나도 행역신 우두천왕이 가르쳐준대로 ‘소민쇼라이의 자손강릉김씨야(蘇民将来之子孫江陵金氏也)’라는 부적을 적어 문패에 붙여볼까.

 

참고문헌

川村湊, <牛頭天王と蘇民将来伝説: 消された異神たち>, 作品社, 2007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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