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의 동상이 있다.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큰 봉우리, 횡보 염상섭이다. 그의 등 뒤 세 개의 큰 바위에는 굵은 한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문장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최근, 딜리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가지 상상을 더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와 이 글귀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한복판에 똑같이 세운다면 어떨까. 그곳을 지나는 동티모르 사람은 이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이 되물음 속에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모든 문제가 기반이 들어 있다. 필자는 딜리 내 여러 도서관을 찾아본 적이 있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도서관은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용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묘하게 적막한 공간이었다. 반면 시내 중심의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Xanana Gusmão Reading Room)과 UNTL 캠퍼스 안의 ‘우마 아메리카(Uma Amerika)’는 달랐다. 학생과 청년들이 책상마다 앉아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공간은 살아
동티모르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를 때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이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왜 여기서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곳(Lulik)입니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를 갖추는 겁니다.“ 그제야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 그 위에 묶인 야자잎과 붉은 천. 관광객 눈에는 이색적인 장식품이었을 것이 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영이 지켜보는 영역. 신성하다는 뜻 그래서 금지의 뜻을 함께 갖는 루릭의 대표 상징이 ‘타라 반두(Tara Bandu)’다. 테툼어로 ‘타라(Tara)’는 ‘매달다’, ‘반두(Bandu)’는 ‘금지’를 뜻한다. 금지의 약속을 나무에 걸어 놓고 특정 활동을 하지 않기로 금기하는 관습법이다. 성스럽다는 것 ‘루릭’이란 무엇인가. 동티모르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누군가 루릭이라 이야기를 내게 묻곤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신성한 것이라서 금기시 되는 것 같다’는 밋밋한 답을 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의 대표 인류학자 조시 트
2025년 10월, 한국과 동티모르 사이에 두 개의 다리가 놓였다. 10월 9일 한글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원이 한국어-테툼어 사전을 출간했다. 고려대 사전학센터와 동티모르국립대 집필진이 함께 완성한 두 번째 사전이다. 17일 뒤, 동티모르는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승인됐다. 제도의 다리와 언어의 다리가 같은 달에 완성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은 동티모르에서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할까? 동티모르 딜리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곧 하나의 벽과 마주친다. 현지인과의 소통이다. 회의실에서 영어로 합의한 내용이 현장에 가면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중국인들은 이미 테툼어로 농담까지 주고받고, 미국대사는 부임 전 테툼어 연수를 마치고 동티모르인들과 직접 소통한다. 한국인은 의례 영어 통역사에 기댄다. 그러는 사이 업무 실행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우리는 동티모르가 조금씩 더 깊은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한다. 2024년 동티모르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노동자들의 송금액은 2억 4,480만 달러(약 3,612억 240만 원)로 비석유 GDP의 12~13%를 차지한다. 한국발 송금은 전체의 22%인 5,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