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서정인의 아세안 ABC 46] 트럼프 이후, ‘세 가지 미래’가 기다린다
국제질서가 갈림길에 서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간 세계를 지탱해온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흔들리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올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2026년 3월 23일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실린 미 존스 홉킨스대 할 브랜즈(Hal Brands) 교수의 "트럼프 세계 이후, 세가지 미래(Three Scenarios for a Post-Trump World)"는 앞으로 10년의 세계를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전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중 신냉전을 더 이상 최악의 미래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세 가지 가운데 가장 나은 시나리오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그가 바라보는 국제질서의 미래는 어둡다. ■ 2차대전 이후 국제질서 이끌어온 '미국이 만든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관계-외교안보 학자이자 존스 홉킨스 대학교 고등국제학대학원(SAIS)의 석좌교수인 브랜즈는 미국 외교 정책, 미·중 갈등, 대전략(Grand Strategy) 분야의 권위자다. 주장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국제질서는 상당 부분 미국이 만든 세계라는 것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 동맹망을 구축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들의 재건을 도왔다. 세계무역을 확대하고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국제적 공공재를 제공했다. 물론 고대 로마 제국의 강성했던 평화기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유래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항상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필요할 경우 군사개입과 비밀공작을 했고 자신이 만든 규칙도 바꾸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힘은 대체로 국제질서 유지에 사용되었고, 그 속에서 세계는 강대국 간 전쟁이 드문 시대와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경험했다. 한국 역시 그 질서의 가장 큰 수혜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 질서를 외부에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흔들고 있고, 내부에서는 미국 자신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동맹국의 무임승차, 세계화의 부작용, 중동 전쟁의 피로감, 그리고 기존 국제질서를 이용해 성장한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는 불만이 누적되었다. ■ 브랜즈가 제시는 세가지 미래-미국과 중국의 ‘두 개의 세계’ 브랜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세 가지 미래를 제시한다. 첫째, 미국과 중국의 ‘두 개의 세계’ 첫 번째는 신냉전이다. 세계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뉜다. 중국 주변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들이 모이고, 미국 주변에는 유럽·일본·한국·호주 등 민주주의 동맹국들이 결집한다. 그 사이에는 인도·사우디아라비아·브라질·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들이 어느 한쪽에 완전히 서지 않고 사안에 따라 양쪽과 협력한다. 경제도 안보와 분리되기 어렵다. 공급망과 핵심광물, 반도체와 AI(인공지능) 같은 첨단기술이 전략무기가 되고 경제적 상호의존은 자산이 아니라 취약성이 된다. 대만과 남중국해, 우크라이나는 두 진영이 만나는 위험한 단층선이 된다. 놀랍게도 브랜즈는 이를 세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낫다고 본다. 적어도 미국과 민주주의 동맹국들이 힘을 합쳐 중국과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신냉전이 두려운 미래였다.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덜 나쁜 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 브랜즈가 제시는 세가지 미래 둘째, 새로운 ‘세력권의 시대’ 두 번째는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는 대신 여러 강대국의 세력권으로 분할되는 경우다. 미국은 서반구에 집중하고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확보한다. 러시아는 구소련 지역과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인도는 남아시아와 인도양, 튀르키예는 유럽·중동·아프리카의 접경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운다. 세계 곳곳에 각자의 ‘먼로 독트린’이 생기는 셈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것은 중소국이다. 강대국은 주변 국가에 “우리 편에 서라”고 요구하고 다른 강대국과의 관계를 제한하려 할 것이다. 국제법보다 힘이 중요해지고 약소국의 전략적 자율성은 줄어든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중국의 세력권이 확대된다면 한국과 ASEAN(동남아국가연합, 11개국) 국가들이 받는 압박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것이다. 세력권은 평화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우크라이나가 보여주듯 중소국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군비를 늘리고 경우에 따라 핵무장까지 고려할 수 있다. 세력권의 경계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전쟁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 브랜즈가 제시는 세가지 미래 셋째, ‘각자도생’의 세계 브랜즈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세 번째 시나리오다. 미국마저 기존 질서를 지키는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현상변경 국가가 되는 경우다. 그렇게 되면 미국·중국·러시아라는 주요 강대국 모두가 힘을 앞세우는 세계가 된다. 약소국의 주권을 지켜줄 강대국도, 국제규범을 최종적으로 뒷받침할 힘도 사라진다. 결국 각국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브랜즈가 말하는 ‘self-help world’, 즉 각자도생의 세계다. 국가들은 군비를 증강하고 동맹을 새로 만들며 최악의 경우 핵무장을 고민하게 된다. 항행의 자유가 약화되고 호르무즈·바브엘만데브 같은 전략적 해협과 무역로를 둘러싼 경쟁도 치열해질 수 있다. 그는 영국 패권이 쇠퇴한 뒤 미국 중심 질서가 등장하기까지 세계가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패권의 종말과 새로운 질서의 탄생 사이에는 생각보다 길고 위험한 공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과 ASEAN은 어떻게 해야 하나 브랜즈의 분석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ASEAN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중견국들이 힘을 합쳐 강대국 없이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회의적이다. ‘지배자 없는 규칙(rules without rulers)’은 환상이며, 가장 강한 국가들의 참여와 힘의 뒷받침 없이는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ASEAN의 지난 60년 경험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ASEAN은 강대국이 아니다. 군사동맹도 아니고 EU처럼 강력한 초국가적 제도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동남아 국가들은 반복적인 대화와 협의, 규범을 통해 과거 분쟁의 지역을 하나의 정치적 지역으로 만들어왔다. 강대국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미국·중국·일본·인도·한국·호주 등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다층적 지역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어느 한 강대국이 지역 전체를 지배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한국에도 여기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동맹, 자강, 연대라는 세 개의 안전망이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되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ASEAN·일본·호주·인도·EU 등과 다양한 소다자 협력망을 넓혀야 한다. 특히 한국과 ASEAN은 어느 강대국도 일방적으로 지역질서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규칙과 제도, 연결망을 함께 지켜야 한다. ■ 다가오는 10년은 최악을 피하는 외교 실험대 브랜즈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미·중 신냉전, 강대국의 세력권 분할, 각자도생의 무질서 가운데 그가 가장 희망적인 미래로 선택한 것이 신냉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오늘의 국제정세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미래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질서는 강대국의 힘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중소국의 의지만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강대국의 힘과 중견국의 연대, 지역기구의 제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한국과 ASEAN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해진다. 강대국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는 지역질서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트럼프 이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동맹은 필요하고, 자강은 더 중요하며,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는 더욱 절실해진다. 다가오는 10년은 어쩌면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시대라기보다, 우리가 얼마나 나쁜 질서를 피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