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서정인의 아세안ABC 33] 2050년 세계 네 가지 시나리오 "아세안은?"
“AI 혁명-미중 경쟁-기후위기-디지털 경제 전환과 아세안 미래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산하 헨더슨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미래를 넘어:2050년 세계를 위한 네 가지 시나리오(Beyond Tomorrow: Four Scenarios for the World of 2050)” 보고서는 단순한 미래예측 보고서가 아니다. 향후 25년간 세계를 흔들 100여 개 메가트렌드를 종합 분석해 인류가 직면할 “AI 풍요, 기후연합, 분열된 진영(두쪽 진영), 디지털 적자생존 네 가지 시나리오” 중심으로 네 가지 미래 질서를 제시한 일종의 전략 지도에 가깝다. 이 보고서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의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반된 네 개의 현실적 시나리오를 동시에 제시하며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국가와 기업, 지역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네 가지 시나리오가 모두 아세안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세안은 AI 혁명, 공급망 재편, 미중 경쟁, 기후위기, 디지털 경제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교차하는 세계의 전략적 접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 AI 풍요: 아세안 성장모델의 구조적 위기?...봉제·조립·전자 하청 충격 보고서는 첫 번째 시나리오로 ‘AI 풍요(AI Abundance)’를 제시한다. 글로벌 차원의 AI 규범과 기술 협력이 이루어지고 AI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미래다. 평균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저탄소 에너지 기반 성장도 가속화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아세안에 엄청난 기회처럼 보인다. 실제로 동남아는 젊은 인구, 빠른 디지털 전환, 상대적으로 낮은 운영비용, 전략적 지리 위치를 바탕으로 AI 시대의 새로운 생산 및 데이터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싱가포르는 AI 금융 및 데이터 허브를 지향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에 적극적이다. 베트남은 제조업 기반 AI 전환을 서두르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배터리와 디지털 플랫폼 경제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필리핀 역시 기존 콜센터 산업을 AI 기반 고부가 서비스 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나리오는 아세안 성장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동안 아세안 산업화는 “저임금 노동력 → 제조업 유치 → 중산층 확대”라는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휴머노이드 로봇과 피지컬 AI가 본격 확산되면 선진국 기업들이 굳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할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 이는 특히 봉제·조립·전자 하청 및 단순 서비스 산업 비중이 큰 국가들에게 상당한 충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아세안은 단순 제조기지에서 AI 활용형 경제로의 전환 여부에 따라 미래가 갈릴 수 있다. 즉 생산비용 경쟁력이 아니라 디지털 인재, AI 활용 역량, 데이터 거버넌스 경쟁력이 핵심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기후연합: 동남아는 이미 기후위기의 최전선...한국의 기회될 수도 두 번째 시나리오인 ‘기후 연합(Climate Coalition)’은 오히려 아세안이 가장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미래일 수 있다. 동남아는 이미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엘니뇨에 따른 가뭄, 해수면 상승, 초대형 홍수, 폭염, 산불과 초미세먼지(haze), 식량위기 등이 일상이 되고 있다. 베트남 메콩델타와 인도네시아 해안 지역, 필리핀은 대표적인 기후 취약지역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것은 기후가 더 이상 환경 이슈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너지, 식량, 물, 사회안정, 공급망이 모두 연결된 ‘기후안보(climate security)’의 시대로 이동하게 된다. 아세안 국가들이 최근 재생에너지, 스마트그리드, 전기차, ESS, 탄소감축 논의에 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이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 친환경 도시 인프라, 수소, 원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에너지 효율화 기술 등은 향후 한-아세안 협력의 핵심 분야가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기술협력과 회복탄력성 구축을 둘러싼 협력 수요는 더 커질 것이다. ■ 분열된 진영: 개방성-중립성-균형외교-다자주의 등 가장 우려 세 번째 시나리오인 ‘분열된 진영(Battling Blocs)’은 사실상 현재 세계가 이미 일부 진입한 모습과 유사하다. 미중 전략경쟁, 공급망 블록화, 기술 디커플링, 반도체 통제, 남중국해 갈등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나리오는 아세안이 가장 우려하는 미래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아세안의 생존 전략은 기본적으로 개방성, 중립성, 균형외교, 다자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가 진영 중심으로 재편되면 아세안은 끊임없이 “누구 편에 설 것인가”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아세안은 완전한 선택보다는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안보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경제협력을 지속하는 이른바 ‘선택적 중립성’ 전략을 강화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 일본, 호주, 인도, EU 같은 중견국들과의 협력 확대를 통해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 역시 커질 수 있다. 한국은 미국 동맹국이면서도 아세안과 경제·문화적으로 깊게 연결된 국가다. 따라서 공급망, 디지털, 방산,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서 한-아세안 협력 공간은 오히려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 디지털 적자생존: 핵심 플랫폼-AI 생태계는 미국과 중국기업 장악 대응 마지막 시나리오인 ‘디지털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은 소수 빅테크 기업들이 국가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갖는 미래를 상정한다. 이는 아세안에 매우 민감한 문제다. 동남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디지털 경제가 성장하는 지역 중 하나지만 핵심 플랫폼과 AI 생태계는 대부분 미국과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데이터는 동남아에서 생산되는데 수익과 플랫폼 권력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러한 흐름이 심화되면 디지털 주권, 데이터 보호, 가짜뉴스, 플랫폼 종속 문제가 아세안 내부 정치와 사회 안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아세안이 DEFA(디지털경제기본협정), AI 윤리, 데이터 거버넌스 논의를 강화하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헨더슨 보고서가 아세안에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아세안은 더 이상 단순한 ‘세계의 공장’이나 ‘미중 사이의 완충지대’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AI, 기후, 지정학,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아세안은 스스로의 전략적 자율성과 회복탄력성을 얼마나 강화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 한국의 대아세안 전략은 단순한 시장 접근 차원을 넘어 AI, 기후안보, 디지털 질서, 공급망 회복탄력성을 함께 설계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진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