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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글로발로 앙코르 7] 천년의 신비 '앙코르 와트'②

비슈누신께 신전을 바친 왕, 죽어서 “수리야바르만 2세” 호칭을 얻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다. 30여 년간 매일 2만 5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앙코르 와트는 400여 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되었다 1860년 우연히 발견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벗어나자 앙코르 와트에도 예전처럼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관광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난해는 전년 비해 약 50여만명이 늘어났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조성진 기자와 함께 '왕국의 사원' 앙코르 와트 ‘시간여행’을 떠난다.  풍경에 새로운 숨길을 불어넣는 그의 '역사인문기행'에 동참해보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 봉헌식, 신을 만나러 가는 길 ②

 

왕은 2층 정원을 한바퀴 돌고 나서 3층으로 향했다. 3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폭이 좁고 가파르다. 계단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세 개씩 각각 12개가 있는데 이 계단 수는 열두 달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왕이 오르는 정면의 계단도 가파르지만 나머지 11개 계단은 더 가파르다.  65미터나 되는 높은 사원을 측면에서 지지하면서 구조미까지 감안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높이 솟은 메루산은 우주의 중심이라 천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돌도 프놈 쿨렌에서 가장 좋은 사암만 골라와서 지었다. 하나하나가 세심하고 걸작이다. 건축신 비슈바카르만(Vishvakarman)이 처음부터 끝까지 왕과 함께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왕은 자신의 계단이자 신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다리가 다소 떨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올라갈 만 했다. 올라가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츠리고 두손으로 계단을 짚었다. 왕으로서 품위는 다소 떨어져 보였지만 신을 만나러 가는데 이정도 예의는 갖춰도 되리라.

 

3층 회랑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문과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콧등에 맺힌 땀을 날린다. 선선한 바람에 정신마저 맑아졌다. 저 멀리 참배로와 서쪽 고푸라가 보였다.

 

3층 중앙신전은 모퉁이에 네 개의 탑이 있고 가운데에 중앙탑이 솟아 있다. 탑들은 모두 연꽃 봉오리 모양이다. 외벽과 박공에는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각을 새겨 놓았다. 가운데 중앙탑은 40개의 가파른 계단으로 오직 왕과 대사제만이 올라갈 수 있다.

 

 

 왕은 대사제의 안내로 중앙탑에 올랐다. 안에는 네 개의 방이 있다. 높이가 3.3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슈누상이 모셔져 있었다. 돌 하나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제단 앞에 선 왕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원을 짓기 위해 25년 동안 겪은 온갖 고생과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부지 선정부터 설계, 프놈쿨렌에서 채석한 사암 운반, 해자 공사, 그리고 인력 동원, 자금 조달, 전쟁과 국가 운영,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어렵다고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어진 사원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짓기를 반복했다.

 

걱정보다는 ‘할 수 있다’, ‘나는 신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앞만 보고 걸어왔기에 오늘, 이자리에 설 수 있었다. 왕은 그 동안의 고생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슈누신에게 사원을 바쳤다. 사원의 이름은 비슈누의 성스러운 거처란 뜻의 비슈누코크로 정했다. 드디어 평생 일대의 역작을 마무리하고 봉헌식을 마치니, 왕은 신과 하나가 되는 길 끝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1150년 왕은 죽어서 중앙탑 중심에 있는 깊이 22미터의 동굴에 안치됐고, 자신의 소원대로 태양신의 보호를 받는 자를 뜻하는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Ⅱ, 재위 1113년~1150년)의 호칭을 갖게 됐다. 비슈누코크는 후세에 앙코르 와트(Angkor Wat)란 이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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