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다. 30여 년간 매일 2만 5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앙코르 와트는 400여 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되었다 1860년 우연히 발견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벗어나자 앙코르 와트에도 예전처럼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관광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난해는 전년 비해 약 50여만명이 늘어났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조성진 기자와 함께 '왕국의 사원' 앙코르 와트 ‘시간여행’을 떠난다. 풍경에 새로운 숨길을 불어넣는 그의 '역사인문기행'에 동참해보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아무런 계획이나 일정도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준비한 후에 여행지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인생이란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기 때문에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 참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후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원칙 하에 한번 가면 다시 오기 힘들지 않겠냐 하며 가능하면 제대로 알고 떠나자는 쪽이다.
어느 것이 맞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보통은 각자의 취향과 여행습관에 따라 결정지어진다. 필자의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 일정을 꼼꼼하게 짜지는 않지만 책과 동영상, 블로그를 통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습득하는 편이다. 공간여행뿐만 아니라, 내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 되어 그때 상황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시간여행이 될 수 있어서 좋다.
여행이란 대개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나 거리를 지나칠 때조차 “아 이런 게 있었네” 할 때가 있는데, 한정된 시간에 계획대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행은 휴양이 아닌 이상, 타인의 경험과 자료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좀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 칸트가 단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자연지리학을 집필하고 강의를 열 수 있었던 것,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가 선실에만 머물렀던 것,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열 편 이상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내가 보고 온 것을 언어와 사진과 영상으로 정리하는 일은 다시 한 번 추억과 상상으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타인에게는 여행의 경험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렇다. 여행은 준비와 기록으로 완성된다.
■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두 욕망 ‘앙코르 와트’와 ‘킬링필드’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하나는 '신이 만든 건축물'이라고 하는 ‘앙코르 와트(Angkor Wat)’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의 홀로코스트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다. 사원을 건축하기 위해 쓰여진 돌은 60만 개이며 7톤짜리 기둥도 1800개나 된다. 이 돌은 45킬로미터 떨어진 프놈쿨렌(Phnom Kulen)의 채석장에서 캐고 자르고 다듬은 뒤에, 수로로 운반된 것이다. 사원을 둘러싼 해자의 길이는 5킬로미터가 넘고 폭은 200미터다.
프랑스 극동연구원에 따르면 30여 년의 건축기간 동안 매일 2만 5000명의 인원이 동원됐을 거라 추정된다. 앙코르 와트는 데바라자, 즉 왕이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크메르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와 사원을 뜻하는 '와트'를 붙여 '앙코르 와트'라고 이름이 붙였다.
약 600년간 존재했던 크메르 왕국은 15세기 갑자기 사라졌다. 이후 400년간 밀림 속에 방치되었던 '유령도시'는 1860년 한 프랑스 식물학자에 의해 경이롭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재발견되었다.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린다.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국민의 4분에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죽임을 당한 대량 학살극이다. 폴 포트가 주도하는 크메르루주는 1975년부터 4년 동안 지식인과 부유층, 그리고 당원, 군인, 인민을 숙청하면서 이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킬링필드는 농민과 노동자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욕망에서 비롯했다.
헛된 욕망의 결과는 몰락이고 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크메르왕국은 찬란한 문명을 남겼지만 자신들의 사원을 짓고자 하는 왕들의 지나친 욕망으로 쇠락하고 태국의 침략을 받아 무너진다. 후에 베트남과 태국에 계속 시달리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고 투자와 개발을 등한시했다. 1930년까지 전 국민의 95%가 빈농이나 가난한 어부로 살았다.
크메르루주는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도왔지만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의 침략을 받는다. 미군의 융단폭격과 킬링필드, 그리고 베트남과의 전쟁 당시 매설된 지뢰로 수많은 국민이 죽고 다쳤다. 캄보디아 지뢰대책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23년까지 제거한 폭발물은 대인지뢰 58만 개를 포함해 약 300만 개라고 한다. 전쟁 상흔의 고통에 시달리고 경제성장 동력이 없는 캄보디아는 아직도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 시엠립과 앙코르: 국제공항도 앙코르 와트의 5개 탑을 본 떠
2024년 1월 21일 인천공항에서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을 거쳐 시엠립(Siem Reap)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겨울에는 캄보디아 항공사인 스카이앙코르에서 운영하는 직항도 있지만 운임을 아끼기 위해 경유편을 이용했다.
시엠립 국제공항은 2023년 10월에 새로 개장했다. 공항 관계자에 따르면 이전 공항은 시내에서 가까워 이동이 편리하긴 했지만 소음소리가 크게 나고 활주로가 짧아 큰 비행기가 뜰 수 없어 넓혀서 옮겼다고 한다. 비자 발급부터 입국 수속까지는 빠르게 진행됐다. 급행료 명목으로 1달러(약 1335원)를 요구하던 관행도 사라졌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감쌌다. 공항터미널 외관은 단아하고 지붕은 앙코르 와트의 5개 탑을 본 떠 올렸다. 그렇다. 앙코르에 온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50킬로미터,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아직 공항으로 오고 가는 차량들이 많지 않아 한적하다. 좌우로 펼쳐진 벌판엔 잡초와 이국적인 열대나무들이 드문드문하다. 산이나 구릉이 없는 지역이다.
시엠립은 캄보디아 시엠립 주의 주도다. 주 전체 인구는 90만 명이고 시엠립의 인구는 19만 명이다. 시엠립 시내는 걸어다니거나 툭툭(Tuk Tuk)을 이용하면 된다. 툭툭은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삼륜차다. 한낮에는 무덥기 때문에 툭툭을 이용하는 편이 낫지만 1월의 아침이나 저녁에는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구글 맵에서 도보로 20분 걸린다고 나와 있는 거리는 실제 걸으면 15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아마 현지인들의 걸음걸이나 체형을 감안한 게 아닐까. 유럽에서는 구글 맵이 알려준 도보시간에 맞추려면 빠르게 걸어야 가능했다.
크메르왕국의 수도였던 앙코르는 시엠립의 옛날 명칭이다. 중심부의 위치는 시내와 겹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유적지인 앙코르 와트나 앙코르 톰은 툭툭으로 20분 정도 가야 한다.
크메르왕국은 802년부터 1431년까지 600년 간 이어져 내려왔다. 정식 명칭은 캄부차데사이다. 수도인 앙코르는 산스크리트어로 왕도, 도성을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는 고대 인도의 언어로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범어로 불린다. 요가도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다. 크메르 문자는 산스크리트어를 간소화한 것이다.
크메르왕국은 인도문명에 영향을 받았다. 크메르왕국을 연 프놈쿨렌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수미산)에 해당하는 성스러운 산이다. 그곳에서 발원하여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시엠립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에 해당하는 성스러운 강이다. 앙코르는 고대 인도의 아요디야에 해당하는 성지다. 캄보디아의 크메르인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 문명을 바탕으로 캄보디아 고유의 앙코르 문명을 만들었다.
왕국의 전성기인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는 앙코르의 인구는 7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파리 인구는 10만 명, 런던 인구는 7만 명에 불과했다. 앙코르에는 예술과 문학이 꽃피었다. 앙코르 와트를 비롯해 200여 개가 넘는 사원이 400제곱킬로미터에 걸쳐 세워졌다.
앙코르에 방대한 사원들이 세워진 이유 중 하나는 왕위계승 싸움 때문이다. 앙코르 왕조를 다스린 스물여덟 명의 왕 중 여덟 왕만이 세습으로 왕이 되고, 나머지는 혈연과 상관없이 무력이나 실력으로 왕이 됐다. 왕위계승 싸움으로 사원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새롭게 도성과 사원을 지었다. 강력한 왕권과 정통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431년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침략으로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 년 동안 앙코르는 밀림 속에 방치된다. 17세기에 앙코르를 다시 탈환하면서 시엠립이란 지명을 사용한다. 시엠립은 태국을 뜻하는 시암과 부드럽게 하다를 뜻하는 립의 합성어로 “태국을 평정하다”라는 뜻이다.
1860년 앙코르를 탐험한 앙리 무오가 쓴 여행기가 유럽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930년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앙코르의 경험을 바탕으로 ‘왕도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1931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세워진 앙코르 와트 건축물은 그동안 크메르인을 미개인으로 취급했던 수백만 관람객에게 문화적 충격과 경외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1992년 앙코르 와트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세계에 알려지고 시엠립도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인 영화 '화양영화'가 끝나갈 무렵, 양조위는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밀과 자신의 이야기를 사원의 돌기둥 구멍에 봉인했다. 이 도시는 영화처럼 전체가 불가사의다. 비밀이 많은 도시이자 점점 헤어질 수 없는 미스터리한 도시다.
■ 여행자 거리인 ‘펍스트리트’...서양인 노부부가 록락과 아목 식사
시엠립 인구의 80%는 관광 관련 업종에 종사한다. 도시 규모는 작은 편이며 호텔이나 리조트, 식당 같이 관광산업과 연관돼 있는 건물이 많다. 앙코르 와트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건축 규정 때문에 고층빌딩은 찾아볼 수 없다.
시엠립의 대표적인 여행자 거리인 펍스트리트는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울려 퍼지고 술과 식사를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다. 올드마켓은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재래시장이지만 관광객도 많은 편이다. 유적지를 돌아다니는데 편안한 코끼리바지를 사거나 과일이나 음식을 맛보려면 올드마켓을 가보는 것도 좋다. 가격도 저렴하다. 치안은 안전한 편이다.
시엠립 시내는 여느 동남아와 큰 차이 없다.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 속에 여기에도 스타벅스와 대형 마트가 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균형감 없이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과 활짝 문을 열어젖힌 식당이다. 조명은 켜졌지만 어두운 내부는 나무로 만든 식탁의 무겁고 바랜 색감으로 더 침침하다.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서양인 노부부가 캄보디아의 대표 음식 록락(Lok Lak)과 아목(Amok)을 먹고 있다. 록락은 소고기에 후추의 맛이 소스와 함께 먹는 것이 좋다. 아목은 바나나 잎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생선살이나 육류, 각종 야채, 코코넛밀크, 카레 등을 넣고 찐요리다.
다른 식탁엔 젊은 여자 관광객이 앙코르 맥주를 마시며 재잘거린다. 음식과 맥주는 현재를 즐기라고 느리게 흐르는 시계에 맞춰 조금씩 줄어든다. 천장에 매달린 실링팬(천장 선풍기)이 더위를 쫓는 둥 마는 둥 윙윙거린다. 보도엔 휴지와 쓰레기가 듬성듬성 널려 있고 골목은 비좁다. 거리엔 툭툭이와 오토바이, 승용차들이 섞여 지나간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옛 시골 풍경이다. 도로 옆에 흙길이 있고, 그 뒤로 좀 물러나 낡고 엉성한 목조주택이 보이고, 간간이 시멘트 건물이 있다. 도로와 주택 사이 흙길엔 테이블을 놓고 야자수 열매나 현지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간혹 아기를 안은 채 무료하게 앉아 있다.
외곽으로 갈수록 나무와 풀이 무성하고 집들은 띄엄띄엄하다. 주민은 주로 외곽에 거주한다. 2023년에는 앙코르 와트 인근 거주자를 외곽으로 강제 퇴거시켰다. 캄보디아 정부와 유네스코, 엠네스티 간에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세계문화유산 환경손상 문제와 보상 없이 쫓겨난 주민들의 주거생활과 인권문제를 두고 대립이 일어난 것이다.
양코르 유적지 입장권을 판매하는 앙코르 엔터프라이즈 발표에 따르면 2023년 앙코르 유적을 찾은 외국 관광객은 80만 명이다. 2022년 29만 명보다 훨씬 늘어났다. 2019년에는 가장 많은 166만 명이 방문했다. 자국민은 무료입장이다.
캄보디아의 한인은 2019년 기준으로 약 1만 2000명이다. 이 중 프놈펜에 8300명, 시엠립에 21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식당에서 만난 한국 교민 김 모씨는 “코로나로 한국 관광객이 없었다가 지난 해부터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다 회복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줄어든 관광객은 한인 식당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문을 닫은 한인 식당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글쓴이=조성진 아세안익스프레스 객원기자 csji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