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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글로발로 앙코르2] 캄보디아 역사의 자부심 ‘크메르 왕국’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다. 30여 년간 매일 2만 5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앙코르 와트는 400여 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되었다 1860년 우연히 발견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벗어나자 앙코르 와트에도 예전처럼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관광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난해는 전년 비해 약 50여만명이 늘어났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조성진 기자와 함께 '왕국의 사원' 앙코르 와트 ‘시간여행’을 떠난다.  풍경에 새로운 숨길을 불어넣는 그의 '역사인문기행'에 동참해보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 나라는 없어져도 역사는 남는다...전성기 자랑하는 앙코르 유적

 

우리나라 역사의 최고 전성기는 언제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조선 세종대왕 때를 뽑지만 정확히 어느 때라고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왕국이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 특히 앙코르 톰을 건설하고 영토를 태국과 라오스 지역까지 넓힌 자야바르만 7세(재위 1181~1219) 때가 최고의 전성기이자 최고 융성기다.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쳐놓은 왕이 자야바르만 7세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캄보디아에는 찬란했던 크메르 왕국의 역사 문명에 대한 문헌이 없다. 단지 13세기 말 원나라 사신 주달관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처럼 다른 나라 사람이 쓴 기록이나 구전, 사원 벽화, 비문 등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로 역사를 짐작할 뿐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비록 임진왜란 때 ‘고려실록’이 소실되었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을 통해 10세기부터14세기까지 고려시대 기록을 볼 수 있다. 나라는 없어져도 역사는 남는다고 하지만 캄보디아는 앙코르 유적이 역사를 대신한다.

 

 

■ 앙코르 유적을 보는 방법 세 가지. 최고는 ‘쉼 있는 여행’

 

앙코르를 보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보통 스몰 투어, 빅 투어, 외곽 투어로 구분하는데 체류일자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스몰 투어는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등 핵심 유적지를 하루에 둘러보는 것이다. 프레아 칸, 따 솜, 네악 뽀안 등 유적지의 위치가 조금 멀면 빅 투어, 그보다 멀면 외곽 투어다. 각각 하루 일정으로 진행된다.

 

외곽 투어를 제외하고 이틀이면 중요한 앙코르 유적을 볼 수 있다. 단, 가이드를 동반해야 한다. 앙코르 유적이 방대하고 사전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이드 없이 이틀만에 둘러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이드를 통해 듣고 보는 투어는 체류일정이 짧은 경우에 효율적이지만 기억과 감동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누가 퀴즈를 내고 바로 답을 알려주면 퀴즈 푸는 재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가이드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다니다 보면, 필요할 때 발걸음을 멈추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쉽지 않다. 운동 중간 잠깐의 휴식처럼, 여정 사이 휴식은 청량제이자 여행의 참맛을 배가시킨다.

 

앙코르 와트 내부를 둘러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단에 걸터앉아 바라본 중앙탑이 그렇다. 반테이 스레이의 돌담 밑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다 문득 올려다본 푸른 하늘, 덩그러니 떨어져 나간 프레아 칸 건축물의 그늘진 한 조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일 때 들려온 새소리는 어떤가.

 

 

프놈 바켕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아 바라본 일몰과 열대 숲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앙코르 와트의 탑들, 톤레삽 호수 수평선이 맞닿는 하늘 끝에서 붉게 물들어 오는 저녁 노을은 황홀했다.

 

여행 중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하다 눈길 가는 대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장면은 아직도 가슴 속 그윽함으로 남아 있다. 보는 대상이 유적이든, 하늘이든, 지나가던 사람이든, 아니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시간과 공간이 따로 없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한가운데에서 세상의 신비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앙코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충분치 않다면 스몰 투어와 빅 투어를 먼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빅 투어는 스몰 투어에 비해 유적 규모가 작고 파손이 심해서 별로 볼 게 없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빅 투어와 스몰 투어는 비유하자면 인생의 높고 낮음, 산의 정상과 골짜기 같은 관계다.

 

빅 투어 유적의 결정체가 스몰 투어 유적이고, 스몰 투어 유적의 과거와 미래가 빅 투어 유적이다. 투어를 마친 후 셋째 날엔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유적을 골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면 된다.

 

앙코르를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려면 최소한 3일의 투자가 필요하다. 여기에 여백의 미라고 할까, 아무런 계획 없이 숙소에서 뒹굴거리거나 뭔가 끄적이기, 배가 고파지면 근처에 나가 현지 음식을 먹고 가볍게 이리저리 걷다가 커피나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는 것도 좋다.

 

시간이 있다면 캄보디아의 젖줄 톤레삽을 보는 외곽 투어도 좋다. 엉덩이는 아프지만, 자동차보다는 툭툭을 타고 흙길을 달려보는 맛이 풍경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1시간 반 가량 덜컹거리면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 반테이 스레이의 붉은색보다 더 선명한 붉은색으로 길게 뻗은 황톳길과 먼지, 냄새… 이 모든 것이 캄보디아다.

 

필자는 앙코르에 6일 동안 머물렀다. 가이드 없이 툭툭을 대절해서 가고 싶은 곳을 다녔다. 일정은 느슨하게 잡았다. 먼지 속에서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보약이 되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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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에 시간이 된다면 미리 공부하는 게 가장 좋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 프라도미술관이나 우피치미술관 작품을 감상하다 진작에 그리스-로마 신화와 르네상스에 대해 알아둘 걸 하는 후회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풍월은 있지만 대면하는 풍경 속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앙코르 유적도 마찬가지다. 크메르 왕국의 역사와 힌두 신화를 알고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된다. 앙코르 유적을 보려면 크게 건축물과 회랑에 새겨진 부조를 봐야 한다. 부조에 새겨진 그림은 대부분 힌두 신화와 역사, 그리고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필자의 경우 앙코르 와트의 회랑 부조를 보는 데만 3시간 정도 걸렸다. 1층 회랑의 둘레만 해도 800미터가 넘는다. 잘 모르면 책을 펼쳐 비교하기도 했다. 덤으로 숨은 그림 찾기의 묘미가 있다.

 

■ 크메르 왕국의 전설 ‘나가’...검붉은 3층 사원 피메아나카스의 비밀

 

앙코르 톰 북서쪽에 있는 바푸온 사원의 남문을 지나면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검붉은 3층 사원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가 나타난다. 11세기 수리야바르만 1세(재위 1006~1050) 때 완공된 건축물이다. 피메아나카스는 ‘하늘궁전’이란 뜻으로 왕을 위한 개인 사원이다. 왕비도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지금은 파손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사원 정상에 금으로 된 탑이 있었다고 한다. 계단으로 오르는 입구 왼쪽에는 사자상이 지키고 있다. 탑 모서리에는 코끼리상이 주위를 쳐다보고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 계단은 발 하나 겨우 걸칠 정도로 좁고 가파르다.

 

앙코르 와트나 바푸온 사원의 계단도 가파르다. 관광객들의 안전사고 때문에 따로 설치한 나무 계단이 없다면 오르기 힘든 경사다. 당시에는 어땠을까? 반쯤 오르다 보면 어느새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네 발로 올라갔을 것이다.

 

마치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불교의 오체투지(五體投地) 자세와 같다. 앙코르의 왕은 하늘궁전에 오르면서 신을 경배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신이 되려고 했을까. 여하튼 계단을 오르내리기 위해선 조심해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 누군가 몰래 오르다 금방 발각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왕은 탑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금탑에 4시간 가량 머물렀다. 주달관은 “탑 가운데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의 정령이 있다. 이 정령은 왕궁 땅의 주인(소마 공주로 추정)이다. 정령은 매일 밤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왕은 먼저 그녀와 동침해야 한다. 정령이 하루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왕이 죽을 때가 된 것이고 만약 왕이 하룻밤이라도 동침을 거르면 화를 면치 못한다”고 들은 이야기로 전했다.

 

 

‘진랍풍토기’에 나오는 이 내용은 크메르 왕국의 건국신화와 연결된다. 크메르 왕국이 세워지기 전 캄보디아에는 푸난(부남)이 처음 생겨났다. 신화에 따르면 푸난은 뱀의 신 나가(Naga)의 딸 소마 공주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카운딘야라고 하는 브라만이 인도에서 건너와 소마 공주와 결혼하여 왕이 된다. 뱀의 정령은 소마 공주다.

 

비록 크메르인과 인종적 연관이 없는 푸난이긴 하지만 그들의 건국신화부터 크메르인이 세운 첸라를 거쳐 11세기에 이르기까지, 나가 신앙을 믿는 토착세력이 힌두교의 인도 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뿌리 내린 과정을 보여준다.

 

나가 신앙은 앙코르 유적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앙코르 와트의 해자를 건너기 전 입구에도 나가가 있다. 7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가 사원에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다. 잡귀를 막고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해주는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 같은 모습이다. 나가를 지나쳐야 신에게 다가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나가 옆에는 사자가 있다. 나가와 사자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사자는 태양의 기운을 상징하고 뱀의 신 나가는 달의 기운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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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푸난은 크메르족의 첸라(진랍)에 정복당한다. 첸라는 톤레삽 호수 부근에 국가를 건설했다. 앙코르 와트에서 톤레삽까지는 차로 40분 거리다. 첸라는 스스로를 ‘캄푸챠’로 불렀고 ‘캄보디아’란 국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8세기 초 첸라는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나누어졌다. 790년 자바가 수진랍을 침공했고 수진랍의 왕자가 볼모로 잡혀가 자바에서 자랐다. 그는 자바 공주와 결혼하고 신임을 얻어 첸라로 돌아왔다. 이어 자바로부터 독립하고 수진랍과 육진랍을 통합해, 802년 크메르 왕국을 창건했다. 자야바르만 2세(재위 802~834)다. 태조인 자야바르만 2세는 두 차례 수도를 옮기고 마침내 프놈 쿨렌에 크메르 왕국을 세웠다.

 

■ 100만 도시의 원천, 인공 저수지 ‘바라이’...가운데엔 수상 사원 '네악 뽀안'

 

캄보디아는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다. 앙코르에 머문 1월 한 주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옛날에는 건기가 되면 우기가 돌아올 때까지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물을 다스리는 일은 오로지 신만이 할 수 있었다. 만약 저수지를 만들어 건기 때 물을 공급하면 왕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툭툭을 타고 앙코르 톰 북문을 지나 오른쪽 길을 가다 보면 프레야 칸을 만난다. 프레야 칸에서 조금 더 가면 저수지가 나온다. 바로 인공 저수지 ‘바라이(Baray)’다.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 왕조 마지막 저수지인 자야타타카, 즉 북 바라이를 만들고 한가운데 수상 사원 네악 뽀안(Neak Pean)을 세웠다.

 

툭툭에서 내리자 네악 뽀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 오른쪽 안내판에는 저수지 전경 사진이 크게 붙어 있다. 저수지 크기는 가로 3.7킬로미터, 세로 900미터다.

 

지금은 부교가 놓여 있다. 우기 때만 물이 찼었는데 2010년 이후로 계속 고여 있다고 한다. 부교는 거의 같은 높이의 수면과 닿아 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교 틈 사이로 물이 올라온다. 부교에서 바라본 저수지에는 고사한 나무들이 앙상한 줄기를 내밀고 있다. 15년 전에는 저 나무도 푸르름을 간직했을 것이다. 내 청춘은 언제쯤이었을까.

 

 

인공 저수지를 처음 만든 왕은 인드라바르만 1세(재위 877~889)다. 저수지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인드라타타카라고 했다. 앙코르 왕도 시대를 연 야소바르만 1세(재위 889~908) 때는 야소다라타타카를 만들었다. 동 바라이다. 이후 수리야바르만 1세(재위 1002~1049) 때 서 바라이가 만들어진다. 서 바라이는 앙코르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마지막으로 만든 저수지가 북 바라이다.

 

 

지도상으로는 앙코르 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동 바라이, 서쪽으로 서 바라이, 북동쪽에 북 바라이가 위치한다. 저수지 한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수상 사원을 세웠다. 저수지가 만들어진 순서대로 인드라타타카의 롤레이 사원, 동 바라이의 동 메본, 서 바라이의 서 메본, 북 바라이의 네악 뽀안이다. 지금 남아 있는 저수지는 서 바라이와 북 바라이다. 동 바라이는 흔적만 남아 있다. 툭툭을 타고 가면 길처럼 보인다. 롤레이도 마찬가지다.

 

 

바라이는 평지인 땅을 파고 둑을 쌓아 만들었다. 그리고 저수지와 저수지를 연결하기 위해 수로를 팠다. 장비가 없던 시대에 오로지 사람들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성과다. 호수나 강으로 보일 만큼 거대한 저수지를 파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수많은 전쟁포로가 동원됐을 것이다. 많을 때는 건설, 관리, 유지보수 인원을 합쳐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저수지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수로 덕분에 한 해 삼모작 농사가 가능해졌다. 식량 생산이 늘어나니 인구도 늘어났다. 광활한 땅에 비해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시대에 인구가 늘어난 만큼 왕권도 강해졌다. 도로가 깔리고 병원이 생기자 사람이 더욱 몰려들었다. 유럽의 대학 도시처럼 ‘사원도시’가 만들어졌다. 100만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글쓴이=조성진 아세안익스프레스 객원기자 csji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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