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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의 눈]'한반도 유래' 쓰시마의 복점, 당집과 샴쌍둥이

김정기 교수가 쓴 일본이야기5. 시바료타로 소설가 "사슴 어깨 뼈 태워 판단 쓰시마 복점은 신라 유래“

 

지난번 이야기에서 히모로기(神籬)라는 무당의 당집이 쓰시마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탄탄한 종교적 유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 못지않은 종교적 유대가 쓰시마의 복점(卜占)이다. “쓰시마에 웬 복점?”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쓰시마의 복점은 전통이 깊다. 게다가 이 복점이 한반도에 유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점과 히모로기는 둘 다 일본 고신도(古神道)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게다가 한반도가 고향이라는 점에서 마치 샴쌍둥이와도 같다.

 

쓰시마의 복점이 한반도, 특히 신라에 유래한다고 이야기를 전개한 사람은 일본의 ‘국민작가’로 칭송되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다. 그는 비교적 한국을 이해하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단편 소설 <고향을 어이 잊으리오>(故郷忘じがたく候)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남원에서 왜군에 잡혀 간 도공 심수관이 일본 땅에서 겪은 역경을 잘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쓴 또 다른 소설 <화신>(花神)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인공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일본 육군을 창설한 인물로 야스쿠니 신사 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소설에서 오오무라는 앞으로 독도가 한일 간에 문제가 된다고 예견하고 먼저 제압해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유연한 역사해석을 내린다는 평을 듣는 이 ‘국민작가’도 역시 섬나라 지식인의 편협한 ‘애국심’ 에 사로잡힌 인물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는 반일관이 스테리오타입 처럼 굳어져버린 많은 한국인에게는 속시원한 인물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바료타로가 전개한 쓰시마 복점이야기를 보면 이런 인물평과는 너무나 다른 인물상이 나온다.

 

우선 시바는 이른바 ‘자이니치[일본인이 재일조선인을 폄훼하는 상투어-글쓴이]’ 또는 한반도 편견에서는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시바료타로가 쓴, 인기 연재물 <가도를 가다>(街道をうゆく) 13편 「이키-쓰시마의 길(壱岐·対馬の道)」의 많은 글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재일작가인 김달수(金達寿) 씨와 또한 재일고고학자 이진희(李進熙) 씨와 함께 「이키·쓰시마의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엮고 있다.

 

시바는 여행 중 김달수 씨를 ‘대장(大将)’이라 부른다. ‘대장’이라면 일본어로도 ‘싸움대장[けんかだいしょう]’ ‘거짓말대장’ 따위로 하대말로도 쓰이지만 윗사람을 우러르는 존대어로도 애용한다.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장이란 나와 동업[소설가] 선배인 김달수 씨를 가리킨다. 김달수 씨는 1919년에 태어나 나보다 네 살 위 형벌인데, 전후 7, 8년 동안 <후예의 거리>(後裔の街)나 장편 소설 <현해탄>(玄海灘)으로 빛나는 재능과 스케일의 웅장함을 우리들에 보여주었다. 그 즈음 나는 교토에서 간장가게의 심부름하는 소동(小童)[醤油屋の小僧]처럼 대학 연구실이나 절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신문기자인 주제에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작가나 문단 따위는 화성과 같은 먼 세계이었기에 김달수 라는 사람은 무척 위의 연배의 사람일 게라고 생각했다(시바료타로, 街道をうゆく 13편 「이키·쓰시마의 길」, 65~66).

 

시바는 자신을 ‘간장가게의 심부름하는 소동’과 같이 중요인물의 부음을 취재하기 위해 절사무실을 도는 신출기자라고 낮추는 반면 김달수에게는 재능이 뛰어나고 스케일이 웅장한 소설가로 소묘하고 있다. 일본 신문의 신출기자가 중요인물의 부음을 취재하기 위해 절사무실을 도는 풍경은 한국 신문의 경찰출입 기자가 장례장을 도는 이른바 ‘사츠마와리’(察回り)를 연상시킨다. 그 뒤 정조문이라는 지인을 통해 김달수를 처음 만난 과정, 네 살 터울인 김달수와 술친구가 된 사정, 그리고 김달수의 반 자전적 글 <우리 아리랑의 노래>(わがアリランの歌)를 읽고 식민지 시절과 전후 남북한 분단 상황에 처한 김달수의 고통과 고뇌에 찬 정신세계를 알게 된 경위 등을 쓰고 있다.

 

시바료타로에 대한 인물평이 좀 길어졌지만 그가 김달수를 보는 눈이, 이번 이야기가 다루는 이키-쓰시마 복점을 보는 그의 눈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두 섬의 복점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키-쓰시마의 위상을 알져주는 것이 두 섬에 진좌하는 유서 깊은 신사가 많았다는 점이다. 중세 일본의 엔기시키(延喜式)라는 고문서는 905년에 착수해 927년 완성된 율령의 세칙이다.그러나 거기에 붙어있는 신명장(神名帳)에 이른바 ‘시키나이샤(式內社)’가 3132 좌(座)가 기록되어 매년 기년제 때 공물을 바치는, 품격 높은 신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유서 깊은 신사의 일종의 명성으로 치부되어 있어 보통 ‘시키나이샤(式內社)’로 불린다.

 

이 시키나이샤가 이키·쓰시마에는 유난히 많다. 이키에 24, 쓰시마에 29. 이것이 얼마나 많은가는 예컨대 규수 남부에 사쓰마(薩摩, 현 가고시마현)에 2, 아키(安芸, 현 히로시마 현 서반부)에 3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쓰시마-이키는 작은 섬인데도 상대(上代) 일본에서 국군(国郡) 제가 생길 때 까지 지방국(国[쿠니])으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야요이 시대 이래 두 섬은 대륙문물이 들어오는 창구라는 것을 기내 야마토 정권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지 이후 태평양 지역이 ‘앞 일본’[오모테일본(表日本)]이고 조선을 바라보는 북 규슈 연안은 ‘뒤 일본’[우라테일본(裏日本)]으로 바뀌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북 규슈의 일본해야 말로 ‘앞 일본’이었다. 즉, 야요이 농경에 이어 청동기, 철제품, 그리고 문자가 들어온 선진 지대란 말이다. 이런 지위는 메이지 4년(1671) 이른바 폐번치현(廃藩置県)이 실시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제 시바가 전개한 이키-쓰시마의 복점 이야기에 눈을 돌려 보자. 글쓴이는 그 이야기에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평을 내리고 싶다. 이제 그 추론을 따라가 보자.

 

동물의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치는 것은 고대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중국에서 보면 오랑캐[蛮족]--의 일반 습속으로 일본에 한 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줄기가 중국으로 옮겨 갔지만 중국 고고학에서 말하는 용산 유적(竜山遺跡: 황하 중류 유역)에서는 이미 후토마니(太占)에 사용하다 버린 어깨뼈[肩胛骨, 사슴에 한 하지 않고 소, 돼지, 양]가 출토되고 있다. 용산 기라는 것은 신석기시대 만기(晩期)에 해당하는 시기로 아직 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 은나라[殷, 기원전 약 1600~1028]로 이어진다. 은나라에서는 거북 등뼈[亀甲]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은나라는 복점이 주인데, 드디어 주나라[周]나라가 되자 오늘날 긴좌(銀座) 뒷골목의 점쟁이[易者]들이 점대[算木]로 사용하는 막대[筮]로 변하고 만다.

 

중국 대륙에서는 문자가 없었든 즈음부터 주변 여러 민족이 유입되어 중앙·지방 왕조를 세웠다. 이들 왕조들이 드디어 골복의 습속을 받아 들여 은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귀복으로 발전[?]한 것이리라. 골복은 주변에 남았다. 그 골복이 조선을 거치고, 쓰시마-이키를 거쳐 일본 본토에 전해져 앞에서 본대로 야요이후기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용산 기로부터 본다면 2000년이나 시간이 지난 것이다(위 책, 206~207)

 

시바는 계속해 “쓰시마·이키가 녹복(鹿卜)을 받는 밑받침 접시 같이 되었던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며 「우라베(卜部)는 쓰시마 사람이든가 이키 사람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라는 시기가 일본의 상대(上代) 상당한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이어 그는 복점을 상대(上代) 일본의 ‘과학’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上代) 일본어로는 복점을 우라(ウラ)라고 한다. 우라를 활용시켜 우라나후(ウラナフ), 우라토후( ウラトフ), 우라후(ウラフ), 우라하후(ウラハフ)라고 말하는 따위로 되었지만 어쨌든 복점은 고대세계의 과학이었다. 전문 무당[카무나기(神道者)]이 이 술법을 부렸는데, 그들의 기묘함은 이키·쓰시마에 집중적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야마토 왕조는 일부러 현해탄의 섬[현해탄 바다]에서 그들을 불러 궁정의 ‘과학’을 담당케 했다. 이것은 이키-쓰시마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아닐까(위 책, 23).

 

야마토 왕조가 그들을 불러 궁정의 ‘과학’을 담당케 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8세기 초 일본왕조가 당나라 식 율령제를 도입했지만 정무[大政]를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 위에 천신지기(天神地祇)의 제사를 통할하는, 일본에 독특한 신기관(神祇官)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신기관은 칸베(神部)와 우라베(卜部)로 나뉘어, 칸베는 30인의 신관을 두고, 우라베는 20인의 복관을 두었다(永留久惠, 2009, 283). 위에서 말한 “궁정의 ‘과학’을 담당케 했다”는 것은 복술에 우수한 자로서 쓰시마에서 10인, 이키에서 5인, 이즈(伊豆)에서 5인을 우라베에 충원했다는 말이다.

 

이는 복점에서 쓰시마가 월등한 지위에 있음을 알려준다. 쓰시마가 어떻게 복점에 월등한 자위를 누리게 되었는가? 여기서 다시 쓰시마가 야요이시대 이래 조선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복점도 한반도에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 추론을 합리적으로 한 이는 앞서 본대로 시바료타로이다. 그는 “본래 일본이라는 이 땅은 까마득한 옛날의 어렴풋한 신성감각[원시신도]에는 복점 ‘과학’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 언제 쯤 부착해 드디어 후세, 불교--특히 밀교--융성에 밀려 쇠약해 졌음에 틀림없고, 어디까지나 어떤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든가 생각된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복점이 불교에 밀려 쇠퇴했지만 어느 시기에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추정한 것이다.

 

복점술은 후토마니(太占)라고 표기한 것에 알 수 있듯이[후토(太)]는 극 존칭어] 야마토 왕정의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것은 사슴의 어깨 뼈를 태워 그 갈라진 형태로 길흉을 점친 술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쟁에 이길 것인가, 또는 올해 가뭄이나 홍수가 없는 풍년이 될 것인가, 등 나라의 안위나 백성의 삶에 해답을 주는 술법이었던 것이다. 시바는 계속한다.

 

일본의 이키·쓰시마에 표착해 뿌리내린 복점은 고신도(古神道)의 하나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일본열도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온 것은 자명하다. 동물의 뼈나 등갑을 태워 복점하는 풍습은 중국 한민족(漢民族) 고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북아시아 목축민족, 즉 비한민족의 것이기도 해 오히려 조선반도 저쪽 계통의 것이 남하해 정착한 것에 틀림없다...그렇다면 이 복점은 저 멀리 북아시아에 전개되었던 것의 조선 판이 이키-쓰시마에 온 것이리라(위 책, 25~26).

 

시바는 쓰시마-이키의 복점은 조선 판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복점이 중국에서 직접 전해졌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억지스러워 보인다.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에만 몰두한 섬나라 세계관에 집착한 동안 시바는 동아시아 전체의 안목에서 복점을 본 것이다. 이는 시바가 청년 시절 오사카외국어대학에서 몽골어를 전공한 것도 이런 안목을 기른 배경이 아닐까.

 

시바가 신라의 우두머리 표기인 ‘칸’에 주목한 것도 이런 안목의 산물일 것이다. 그는 몽골 족의 우두머리 칸과 신라 우두머리 칸을 같은 류 라고 추정한 것이다. “한자문자 이전의 옛 조선[古朝鮮]에서는 부족의 장이나 왕은 북아시아 풍으로 칸(汗)으로 부른 형적이 있다”[칸은 카간[カがン, ハがン, カン, ハン 따위로 발음한다] 면서 그는 “송나라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잃어버린[亡逸]한 <진서>(秦書)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어 고신라의 왕이 진에 입조한 취지[旨]가 씌어있다”고 일깨우고 다음과 말한다. “고신라 왕은 중국음 표기에서는 로-칸(楼寒)이라 하는데 고신라 어로는 마립간(麻立汗)이라 한다” 고. 이는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라는 학자가 지은 <고대조선>에 의한 풀이를 인용한 것으로 시바는 이렇게 계속한다.

 

 

다른 곳에 방증이 없는 상상이 되지만 마립간[왕이라는 의미]은 칸(汗)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칸이 그렇다면 보통 하늘[天]에 제사지내고 골복으로서 천명(天命)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 문화 이전에 옛 조선이 천(天)을 북 아시아 식으로 텐그리(テングリ)라고 했는지 아닌지(위 책, 210). [他に傍証のない想像になるが、麻立干(王という意味)は、汗という言葉に対応するのではないか。汗であるかぎり、ふつう天を祭り、骨卜して天命を聴くのである。しかし漢字文化以前の古朝鮮が天のことを北アジア風にテングリといっていたかどうか。]

 

위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골복으로 천명을 듣는다”는 말은 골복의 의미영역을 한 없이 넓혀 주지만 이는 다음이야기로 돌린다. 여기서는 칸으로 돌아가, 시바는 몽골 제국의 정복 왕 징기스칸(ジンギス汗)의 칸에 옛 신라 왕 마립간의 간(干)에 대응시킨 것이다. 한국의 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최치운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 말한 글귀가 나온다. 즉, <제왕연대력>이 나오면서 모두 왕이라 부르게 되었다며 그 이전에는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으로 이른 것이 하나씩이고, 이사금(尼師今)은 16, 마립간은 14인데” 라고. 부족장을 간(干)이라 이른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 나라의 이름이 없었으며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며 “이에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있어 이들 추장이 백성을 통솔하였으니...”라 적고 있다. 그렇다면 부족장을 ‘간’으로 부른 것은 옛 신라·가야 땅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복점을 신라에 귀의한 문헌 기록도 있다. <쓰시마귀복전기>(津島亀卜伝記)에 의하면 쓰시마 우라베 족의 조상인 이카즈오미(雷大臣)가 신공황후를 따라 한토(韓土)로 건너가 귀복술을 습득하여 왔다고 한다[永留久惠, 2009, 170]. 물론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신화는 ‘신화’일 뿐이지만 귀복술을 신라에 귀의한 서술은 아무런 근거 없이 적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점이 ‘제천(祭天)의 고속(古俗)’을 사상적으로 동반한다는 점이다. 시바는 “몽골어에서는 천(天)을 ‘텐그리(テングリ)’라고 하는데, 옛날 징기스칸 시대 칸(汗)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 하늘[天]에 제사를 지냈다. 17세기가 되어 중국에 정복왕조를 세운 만주 퉁구스 족의 청나라도 황제 스스로 텐그리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베이징에 천단(天壇)을 조영했다”고.

 

이 북방 아시아 사상이 고대 조선반도까지 남하해 부족장들이 골복(骨卜)으로 천의 의사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즉 골복과 제천 신앙은 한 배[ひとつのセット]가 되었다. 굳이 반복하지만 천이라는 의식 없이는 골복은 성립할 수 없다(위 책, 209).

 

[この北方アジア思想は古代、朝鮮半島まで南下しており、部族の長たちが骨卜して天の意思を聴いていたにちがない。つまり骨卜と天への信仰は、 一つのセットになっていた。天という意識なしに、骨卜は成立いえない。]

 

이렇게 복점과 제천 사상이 필수적으로 동반한다면 쓰시마-이키를 징검다리로 한 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가 이루는 공동문화권은 제천, 하늘에의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임이 드러난다. 게다가 그 이상 쓰시마의 골복은 천의 의사를 듣는 천명사상으로 지평을 넓혀간다.

 

참고문헌

永留久惠, <対馬国誌: ヤマトとカラの挟間で活きた対馬> 제1권 원시 고대 편, 2009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街道をうゆく> 13편, 「이키·쓰시마의 길(壱岐·対馬の道)」, 朝日新聞出版, 2008

일연, <삼국유사>, 번역: 권상노, 주해: 한정섭, 삼원사, 1995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일본천황, 그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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