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의 동상이 있다.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큰 봉우리, 횡보 염상섭이다. 그의 등 뒤 세 개의 큰 바위에는 굵은 한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문장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최근, 딜리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가지 상상을 더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와 이 글귀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한복판에 똑같이 세운다면 어떨까. 그곳을 지나는 동티모르 사람은 이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이 되물음 속에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모든 문제가 기반이 들어 있다. 필자는 딜리 내 여러 도서관을 찾아본 적이 있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도서관은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용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묘하게 적막한 공간이었다. 반면 시내 중심의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Xanana Gusmão Reading Room)과 UNTL 캠퍼스 안의 ‘우마 아메리카(Uma Amerika)’는 달랐다. 학생과 청년들이 책상마다 앉아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공간은 살아
독립 이후 동티모르 정치를 이끌어온 핵심 지도자 4인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떠났다. 동티모르의 독립영웅이자 제6대 대통령을 지낸 프란시스쿠 구테흐스(Francisco Guterres) 전 대통령이 6월 21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프린스 코트 메디컬 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그는 한동안 이곳에서 집중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사인은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투쟁 시절의 가명 '루올로(Lú-Olo)'로 더 잘 알려진 고인은 1954년 9월 7일 비케케(Viqueque)주 오수(Ossu)에서 태어났다. 본래 교사로 일하던 교육자였으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으로 그의 삶은 바뀌었다. 1974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래 24년에 걸친 인도네시아 점령기 내내 저항운동의 정치·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1998년 저항군 사령관 코니스 산타나(Konis Santana) 사후 프레틸린(FRETILIN) 무장투쟁의 정치적 지도부를 이끌었다. 그는 24년의 전쟁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프레틸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교육이 국가의 토대라는 그의 신념은 정치 입문 이후에도 변치 않아, 생전 "국민이 배우지 못하면 나라는 죽는다
“풀뿌리 한국어 교육 공동체가 자력으로 해냈다.” 아일레우(Aileu) 출신 아폰소 로사리오 다 크루즈(Afonso Rosário da Cruz)가 제2회 동티모르 한국어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크루주는 동티모르 대표가 되어 10월 8일 한국 여주에서 30여 개국이 겨루는 제30회 세계한국어웅변대회에 참석한다. 이 같은 선발은 한국어·한국학 학과 하나 없는 나라에서 풀뿌리 한국어 교육 공동체가 자력으로 일궈낸 성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동티모르국립대 한국학센터(CKS-UNTL)를 필두로 한국정부장학생 동문회(GKS Alumni TL)와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KSEA-TL)가 공동주최하여 치러졌다. 신청자 11명 가운데 최종 9명이 무대에 올랐다. 연사들은 저마다의 주제로 4분씩 한국어 웅변을 펼쳤고, 내용·구성·언어 전달력을 기준으로 한 심사를 거쳤다. 최창원 (사)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 이사장(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는 “주최기관이 동티모르국립대 한국학센터, 동티모르 한국정부장학생 동문회, (사)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로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한국인이 없는 행사 준비였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인
“한국은 동티모르와 경제적인 면에서 공동번영의 길로 어떻게 접어들 수 있을까?” 이것은 필자가 동티모르국립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 선 한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된 질문이다. 양국 관계에는 정치-외교-안보-문화처럼 경제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필자가 품은 것은, 그 여러 분야 가운데 경제적 공동번영의 관계가 과연 동티모르와도 가능할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필자가 2008년 처음 딜리에 자리잡았을 때, 거리에는 UN 평화유지 경찰의 흰색 차량이 오갔다. 2006년 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이 나라가 제 발로 설 수 있을지를 세계가 의심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7년, 그 거리의 나라는 이제 아세안의 열한 번째 식구가 되어 ‘선발국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의심받던 나라에서 따라잡으려는 나라로. 동티모르가 건너온 거리가 이 글의 출발점이다. 1995년의 베트남과 2025년의 동티모르는, 30년의 시차를 두고 거의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필자가 비교의 잣대로 삼은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다. 두 나라는 아세안에서 가장 잘사는 싱가포르-브루나이도, 가장 가난한 축도 아닌,
2013년, 딜리의 프레지덴치 니콜라우 로바투 국제공항. 한국으로 떠나는 동티모르 청년 한 명을 배웅하기 위해 가족 열 명, 때로는 스무 명이 청사 앞을 메웠다. 같은 구도, 다른 표정으로 셔터가 거듭 눌렸다. 청년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가족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활주로가 보이는 자리에 서서 기체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은 1960~70년대 김포공항을 떠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한국 노동자들의 사진과 50년의 시차를 두고 겹쳐졌다. 가족과 국가를 한 사람의 어깨에 실어 보내며 말없이 환송하는 공동체의 정서가, 다른 언어와 다른 피부색을 입고 거기에 있었다. 2008년 한-동티모르 고용허가제(EPS)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래, 딜리 공항의 같은 장면은 한 세대의 집단적 초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티모르 해외 노동의 흐름은 크게 영국-한국-호주-포르투갈 네 갈래로 나뉜다. 영국에는 포르투갈 국적 취득권을 활용해 옥스퍼드-피터버러-북아일랜드 던개넌 등의 육류가공-물류 현장으로 진출한 1만 6000~1만 9000명이 머무르며, 던개넌은 인구 대비 동티모르인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
에르메라(Ermera)의 새벽은 커피 향으로 시작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등성이에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농부들은 이미 붉게 익은 커피 체리를 손으로 하나씩 따고 있다. 농약도 없고, 비료도 없다. 수십 년 된 커피나무가 야생에 가깝게 자란 숲 속에서, 인간의 손길은 수확의 순간에 닿는다. 이 장면은 소순다 열도 동쪽 끝, 인구 약 142만명의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의 현재다. 동티모르 커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글로벌 커피 기업들과 세계 각지의 스페셜티 로스터들이 오래전부터 이곳 원두를 수입해왔음에도, 이 나라 이름은 커피 산지로서 좀처럼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았다. 잘 보관된 커피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동티모르의 커피 역사는 19세기 포르투갈 식민 통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요 수출품이던 백단향 자원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갈되자, 포르투갈은 대체 작물을 모색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시도했지만, 척박한 고산 토양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은 커피뿐이었다. 특히 수도 딜리 남서쪽에 위치한 에르메라 지구가 커피 재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서늘한 고지대 기후, 화산
아따우로 섬 서쪽 해안, 아다라(Adara) 마을. 인구 100여 명의 이 작은 마을에는 ‘동티모르의 해녀’라 불리는 여성 잠수부들이 산다. 현지 방언으로 와와타 토푸(Wawata Topu), '물에 잠수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손으로 깎은 나무 고글을 쓰고, 직접 만든 작살을 들고, 치마를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드는 이 여성들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필자는 아다라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담그는 순간, 산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랏빛, 주황빛, 형광 초록빛 산호 사이로 수백 종의 열대어가 헤엄쳐 다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러나 그 황홀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해저 바닥의 높낮이가 극단적이었다. 한 발짝 옆이 낭떠러지였다. 숨이 차서 발을 딛고 서야 할 순간, 내 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바닥이 솟아오른 지점까지 간신히 헤엄쳐 가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바다는 아름답지만, 만만하지 않다. 이 바다를 매일 맨몸으로 드나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와와타 토푸의 대단함을, 조금만 맛보고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산호 정원과 심연이 공존하는 이 바다가, 그녀들의 일터다. 사실 아다라에 도착하기 전, 이
딜리의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접견실에는 특별한 타이스(Tais)가 놓여 있다. 화려한 전통 문양 사이로 서툴지만 선명하게 수놓인 한글, "감사합니다.“ 동티모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동티모르국립대(UNTL) 학생들이, 자신들의 유학길을 내준 한국 대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학생들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여야만 완성되는 이 직물에 '감사합니다'라는 한글을 새겨 넣은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는 선물인 타이스에, 한국에서 배운 따뜻한 말을 얹었다. 대사관의 타이스가 ‘소리 없는 감사’라면, 딜리 국회 의사당(Parlamento Nacional) 본회의장의 타이스는 ‘국가’ 자체다. 들어서면 의원들의 좌석보다 먼저 눈에 꽂히는 것이 벽면을 따라 걸린 형형색색의 타이스들이다. 동티모르의 지자체를 상징하는 이 직물들은 저마다 문양과 색상이 다르다. 로스팔로스의 타이스에는 악어와 닭이 이깟(Ikat) 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옆에 걸린 오에쿠시의 것은 짙은 주황빛 꽃무늬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친다. 글자를 몰라도 옷만 보면 어느 고향 사람인지 알 수 있다던 옛말처럼, 국회 벽면은 동티모르의 모든
남서쪽 끝자락, 국경 도시 수아이(Suai)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했다. 그 덥고 습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마을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조상신이 머무는 신성한 집, ‘우마 루릭(Uma Lulik)’ 앞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전통 가옥의 문앞에 으레 악귀를 쫓는 무시무시한 수호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예수였다. 놀라웠던 건 그 표정이다. 창을 든 전사도, 심판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풍파를 다 품어줄 듯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그 토속적인 우마 루릭의 문 앞에 양쪽 기둥에 서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모습.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에게 가톨릭은 바티칸에서 건너온 딱딱한 교리만은 분명 아니었다. 척박한 땅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루릭(Lulik, 신성한 힘)’ 그 자체였다. 바티칸 시티라는 특수한 도시국가를 제외하고 동티모르는 종교자유가 있는 국가들 중에 사실상 가장 높은 비율의 가톨릭 신앙을 보이고 있다. 2022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무려 97.6%가 신자다. 딜리(Dili)에도 모스크 돔이 있긴 하다. 하지만 동티
동티모르에서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호텔까지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적도의 오후 햇살이 비출 때면 그 10분은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 셔츠가 등에 달라붙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호텔 로비 카페에서 만나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는 더욱 강렬했다. 작지만 매혹적인 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혀를 감쌌다. 나는 짧은 꿀맛 같은 간식 시간을 아직 기억한다. 유럽의 남쪽 끝 포르투갈과 아시아의 거인 인도네시아가 이 작은 섬나라의 식탁 위에서 만난다. 포르투갈식 베이커리에서는 달콤한 바닐라와 버터 향이 진동하고, 인도네시아식 식당과 노점상에서는 짭조름한 쇠고기 국물 냄새가 뒤섞인다. 이 기묘한 두 향기의 공존은 두 식민통치국가가 남긴 동티모르인의 삶 속에 역사 그 자체다. ■ 포르투갈 식민지가 남긴 달콤한 유산, '파스텔 드 나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첫 번째 맛은 단연 '파스텔 드 나타',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다. 오랜 식민 지배가 남긴 유산이다. 리스본의 제로니모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남은 노른자로 빚어낸 이 과자는, 19세기 초
동티모르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를 때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이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왜 여기서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곳(Lulik)입니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를 갖추는 겁니다.“ 그제야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 그 위에 묶인 야자잎과 붉은 천. 관광객 눈에는 이색적인 장식품이었을 것이 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영이 지켜보는 영역. 신성하다는 뜻 그래서 금지의 뜻을 함께 갖는 루릭의 대표 상징이 ‘타라 반두(Tara Bandu)’다. 테툼어로 ‘타라(Tara)’는 ‘매달다’, ‘반두(Bandu)’는 ‘금지’를 뜻한다. 금지의 약속을 나무에 걸어 놓고 특정 활동을 하지 않기로 금기하는 관습법이다. 성스럽다는 것 ‘루릭’이란 무엇인가. 동티모르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누군가 루릭이라 이야기를 내게 묻곤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신성한 것이라서 금기시 되는 것 같다’는 밋밋한 답을 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의 대표 인류학자 조시 트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의 교정은 흡사 바벨탑과 같았다. 나이 든 교수들은 포르투갈어로, 젊은 교수들은 테툼어로 강의했다. 학생들끼리는 저마다 출신 고향의 언어로 수다를 떨었다. 쉬는 시간에 그들 옆에 서서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멍했다. 테툼어에서 단어는 ‘리아푸안(liafuan)’이다. 목소리(lia)에서 맺힌 열매(fuan)라는 뜻이다. 동티모르인들은 말이란 목소리가 익어 맺힌 열매,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자양분으로 이해했다. 그 열매들을 모아 체계화한 것이 사전이다. 1889년부터 오늘까지, 135년에 걸친 테툼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곧 동티모르 정체성의 역사다. 최초의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은 포르투갈 선교사 실바 신부가 마카오에서 출간한 『포르투갈어-테툼어 사전』(1889)이다. 1877년 티모르에 첫발을 디딘 후 12년 만의 쾌거였다. 이후 라파엘 다스 도레스가 『테툼어-포르투갈어 사전』(1907)을 리스본에서 출간했다. 식민 통치와 선교를 위한 도구였지만, 역설적으로 테툼어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제병합 1년 만에 『인도네시아어-테툼어 사전』(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