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시 4군 응웬떳타잉 거리 1번지, 벤응에 운하 건너편에는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3층 건물이 서 있다. 오늘날 이곳은 ‘호찌민 박물관 호찌민시 지부’(Ho Chi Minh Museum – Ho Chi Minh City Branch)로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건물을 ‘냐종’(Nhà Rồng)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어로 ‘용의 집’(드래곤 하우스)이라는 뜻이다. 이름만 들으면 오래된 사당이나 궁궐을 떠올릴 수 있지만, 냐종은 원래 프랑스 식민지 시기 국제 해운회사의 본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이처럼 냐종은 식민지 근대, 항구도시 사이공의 성장, 베트남 전통 상징, 그리고 호찌민 주석의 역사적 출발이 겹쳐 있는 복합적인 장소다. ■ 식민지 해운망 속에서 태어난 건물 냐종은 1862년 무렵 착공되어 1863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식민 세력은 사이공을 점령한 뒤 이곳에 프랑스 해운회사 메사주리 앵페리알(Messageries Impériales)의 본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1870년 메사주리 마리팀(Messageries Maritimes)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이공은
호찌민시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시장은 대개 벤타잉(벤탄 시장, Ben Thanh) 시장이다. 1군 중심부에 자리한 벤타잉 시장은 시계탑, 기념품 가게, 먹거리 좌판, 관광객의 흥정 소리로 가득하다. 하노이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북부 최대 도매시장으로 알려진 동쑤언 시장(Chợ Đồng Xuân)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베트남의 시장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호찌민시 서쪽 쩔런( ) 지역에 있는 빙떠이(Bình Thạnh)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벤타잉 시장이 사이공 관광의 얼굴이고, 동쑤언 시장이 하노이 구시가지 상업의 중심이라면, 빙떠이 시장은 남부 베트남 화교 상업 문화의 심장에 가깝다. 이곳은 관광객에게 보기 좋게 정돈된 시장이라기보다, 실제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며 도시의 생활 경제를 움직이는 시장이다. 그래서 빙떠이 시장을 걷는 일은 단순한 시장 구경이 아니라, 호찌민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장사를 통해 성장해 왔는지를 읽는 일에 가깝다. ■ 쩔런(큰 시장) 그리고 그 심장부... '남부 베트남 거대한 도매 유통거점' 빙떠이 시장은 호찌민시 6군,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쩔런 지역에 있다. 쩔런(Chợ Lớn)은 베트남어로
호찌민시 중심부를 걷다 보면, 오토바이와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현대적 풍경 사이에서 문득 시간이 멈춘 듯한 회색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 호찌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남부 지역의 권력과 행정을 상징하던 공간이었다. 189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처음에는 남부 지역의 산물과 상업적 성과를 전시하기 위한 상업박물관으로 계획되었으나, 완공 이후 인도차이나 총독부 부총독 관저로 사용되었고, 1911년부터는 남부 총독(Dinh Thống đốc Nam Kì) 관저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바오다이 정권 시기에는 자롱궁(Dinh Gia Long)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특히 응오딩지엠 정권 때 일어난 쿠데타(1963년 11월) 때 이 건물과 외부로 연결된 지하 터널로 지엠 대통령과 동생 응오딩뉴가 피신했던 일로 유명하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에는 다시 박물관 기능을 회복해 현재의 호찌민시 박물관이 되었다. 이처럼 이 건물은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 지배와 전쟁, 정권 교체와 통일 그리고 현대 도시의 일상까지 겹겹이 품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건물의 첫 인상은 매우 아름답다. 회색 외벽(초기에는 흰색), 균형
메콩강은 동남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다. 그러나 베트남 남부에 이르면 이 강은 단순히 ‘메콩강’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강을 오래전부터 구룡강, 베트남어로 쏭끄우롱(Sông Cửu Long) 또는 끄우롱쟝(Cửu Long Giang, 九龍江)이라 부른다. ‘아홉 마리 용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는 메콩강이 베트남 남부 삼각주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나뉘고, 전통적으로 아홉 개 하구를 통해 바다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룡강이라는 이름에는 베트남 남부의 지리, 산업, 역사, 문화가 함께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메콩델타’라는 용어는 베트남어로는 구룡강 델타(Đồng bằng sông Cửu Long)이다. 베트남에서 메콩강(sông Mê Công)은 앞의 구룡강이라는 이름과 같이 사용하지만, 메콩델타(Đồng bằng sông Mê Công)라는 용어 대신에 구룡강 델타(Đồng bằng sông Cửu Long)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우리말로 ‘메콩델타’라고 번역한다. 구룡강의 첫 번째 얼굴은 생산의 강이다. 흔히 베트남의 ‘쌀 바구니’라고 불린다. 세계은행은 메콩델타가 베트남 쌀 생산의
호치민시 중심지 시립대극장(오페라하우스) 옆에 카라벨 호텔이 있다. 콘티넨털 호텔과 마주하고 있다. 대표적인 5성급 역사적 랜드마크 호텔이다. 역사적-사회문화적 의미가 커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이 지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호텔은 1957년 공사를 시작하여 1959년 12월 24일 준공 및 개장되었다. 카티나 퐁시에(Catinat Foncier)사, 에어프랑스, 베트남 천주교 등 삼자가 공동 투자하여 건립되었다. 설계는 베트남 건축가 응웬반화(Nguyễn Văn Hòa)가 맡았다. 당시 최신식 이탈리아산 대리석, 방탄유리, 최첨단 에어컨 및 독립 발전기 시스템 등을 도입한 현대적 건축물이었다. 호텔 이름을 카라벨로 지은 것은 당시 호텔 소유주의 한 축인 에어프랑스가 1959년 운항을 시작한 제트 여객기 ‘쉬드 아비아시옹 카라벨(Sud Aviation Caravelle)’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호텔 1층 동커이 거리 방향에는 지금도 에어프랑스 사무실이 있다. 거의 항상 문이 닫혀있지만, 에어프랑스 간판이 여전히 걸려 있다. 주 중 한두 번 잠깐씩 문을 연다. 내가 처음 방문한 1988년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재건축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다. 한국도 연인원 32만 명이 파견되었고, 그중 8만 5000명 정도가 고엽제 관련 치료를 받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이 480만 명, 환자가 300만 명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숫자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고엽제의 영향을 받아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가 1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피해가 대물림되고 있다. 베트남 작가 밍쭈엔은 <숨겨진 상처>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Báo Văn Nghệ số 30, 26-7-1997. p.10 and 15)를 썼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고통, 특히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다이옥신)의 후유증을 고발하는 르포 형식의 글이다. 전쟁은 끝났고 자연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인간의 몸속에 스며든 화학물질은 세대를 넘어 지속적인 파괴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타이빙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참전 군인 가정을 방문하며, 고엽제로 인해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녀들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부모들의 삶을 기록한다. 겉으로는 총성이 멈춘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각 가정 안에서는 여전히 “폭탄”과 같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당반
"백성은 무진장한 창고이고, 관리는 오직 백성에 기대어 산다." 17회에 이어서 베트남 학자 또안아잉(Toàn Ánh)이 1970년에 펴낸 『부패와 뇌물의 예술』 속 다른 에피소드 두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오래된 남의 나라 얘기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날 밤 두 사람(군수와 친구)은 돈을 갈취하는 방법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상급자가 조사에 나서지 못하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날, 군수는 친구에게 백성들이야말로 무진장한 창고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군수는 공문서를 재가하면서 서기와 관리들을 꾸짖은 뒤, 친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네, 내가 오늘 무죄한 사람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네. 자네가 관리로서 나를 따라하지 못하고 돈을 갈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지.” 마침, 그때 갈색 옷을 입은 촌사람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군수는 그를 가리키며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 저 복 없는 촌놈을 보게나. 재수 없게 나를 만났군. 내가 저놈에게서 돈을 갈취할 테니 두고 보게.” 그는 곧바로 군청으로 들어가 병사에게 명령했다. “저 촌놈을 불
권력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위임된 것이지만, 그것이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때 사회는 빠르게 병들어 간다. 특히 행정 권력이 법과 제도를 빌미로 국민을 통제하는 위치에 설 때, 그 힘은 정의의 수단이 아니라 착취의 장치로 변질되기 쉽다. 역사는 이러한 사례를 반복적으로 보여 왔다. 베트남 학자 또안아잉(Toàn Ánh)이 1970년에 펴낸 『부패와 뇌물의 예술』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실려 있다. “부패는 후진 민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가장 음험하고도 치명적인 재앙이다. 중국은 부패로 인해 결국 공산 세력의 손에 나라를 빼앗겼다. 공금을 착복하고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가 중국 국민당을 패배하게 했으며, 한국에서도 이승만 정부가 바로 이러한 부패 문제로 인해 흔들리다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그는 부패를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구조적 병폐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읽다 보면 낯설기보다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