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그래서 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금모으기’는 흔히 19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의 국민적 연대-가정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아 국가 부채를 갚겠다는 집단적 결단-로 기억된다.
위기는 개인의 삶을 옥죄었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한국만의 독점적 경험은 아니다.
베트남은 독립의 문턱에서 이미 ‘금모으기’를 국가 건설의 실천으로 제도화했다. 1945년 가을, 독립 직후의 베트남이 선택한 길은 화폐 정책이나 외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자발적 기여를 동력으로 삼는 ‘황금주간(Tuần lễ vàng)’이었다.
■ 보응웬잡 장군 칙령 '황금주간' 공포...독립 직후의 절박함과 선택
1945년 9월,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식량난이 심각했고, 북부에는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장과 재정은 취약했다. 이때 임시 정부는 구호와 재정의 동시 해법을 모색했다.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기아 구제 운동을 발족하고, 남부에서 쌀을 북부로 수송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국가 독립을 위한 기금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1945년 9월 4일, 내무부 장관 보응웬잡 장군은 독립기금 설립을 위한 제4호 칙령을 공포했다. 이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돈과 물품을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틀을 제공했다. 이 제도적 토대 위에서 9월 17일부터 23일까지, ‘황금주간’이 시행된다.
■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의 아침...하노이에서만 2,201냥과 현금-물품
황금 주간은 9월 17일 아침,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의 계단에서 개막되었다. 고문 빙투이(바오다이 황제)가 개막 연설을 맡았고, 호찌민 주석은 ‘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행사의 의미를 천명했다. 그는 80여 년의 희생과 투쟁으로 쌓은 자유와 독립의 기초를 강화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며, 전 국민의 참여—특히 부유층의 책임 있는 기여—를 호소했다.
연설이 끝나자, 시민들은 줄을 섰다. 오페라 하우스 로비에 놓인 큰 나무 상자 앞에서 자본가들이 먼저, 뒤이어 지식인과 시민들이 금과 보석, 현금을 헌납했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재산의 사유성이 국가의 공공성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이의 상공인들은 구체적인 숫자로 역사를 남겼다. 항응앙 48번지 푹러이 비단 상점의 주인 찡반보와 그의 아내 호앙티밍호는 117냥의 금을 헌납했고, 이 가문은 이후 혁명 전반에 걸쳐 5,000냥 이상을 기부했다. 페인트 제조업자 응웬썬하의 가족은 금·은·보석을 합해 10.5kg을 내놓았다.
항다오 48번지 땀끼 직물 가게의 응웬흐우념 부부는 300냥, 항응앙 27번지 러이꾸엔 가게의 브엉티라이는 109냥, 깟러이 비단 가게의 주인이자 공장과 농장을 운영하던 도딩티엔 부부는 독립 기금 10만 동(약 4kg 금 상당)과 황금 주간 중 100냥을 헌납했다.
그 결과, 하노이에서만 2,201냥의 금과 현금·물품이 모였고, 총가치는 700만 인도차이나 동에 달했다. 이는 개인의 미담을 넘어, 사회 전체의 신뢰가 집계된 숫자였다.
■ 후에의 붉은 천, 왕조의 전환...후에에서 925냥의 금
황금주간은 하노이를 넘어 후에로 이어졌다. 흐엉강 남쪽 강변에서 개막된 행사에서, 남프엉 전 황후는 몸에 걸친 금목걸이와 귀걸이, 팔찌를 하나씩 풀어 붉은 천이 깔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왕조의 상징이 시민의 박수 속에서 공화의 실천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두 번째로 많은 기부자는 전 바오다이 황제의 비서 응웬주이꽝으로 42냥을 기부했다.
황금 주간 폐막(9월 23일)까지 후에에서 925냥의 금이 모였다. 폐막식은 ‘국민 구호 음식점’ 부스, 기념품 판매와 경매, 놀이와 만찬으로 이어졌고, 저녁에는 정부 요인과 시민 대표가 참석한 명예 만찬에서 호찌민 초상화 경매가 열려, 도딩티엔 부부가 백만 동에 낙찰받았다. 기부는 축제였고, 축제는 정치였다.
■ 총 2000만 동과 370kg의 금 어떻게 쓰였나?
황금주간 동안 정부는 총 2000만 동과 370kg의 금을 모았다. 이 자금은 일본군 무장 해제로 압수된 무기 구매와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장군들과의 정치적 거래에 사용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일부 기부금이 외교적·군사적 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단 상점 푹러이의 주인이었던 찡반보와 그의 부인 호앙티밍호는 훗날 자신들이 혁명에 기부한 5,000량 이상의 금 가운데 1,000량의 금이 정부 특사였던 응웬르엉방을 통해 세 명의 중국 장군에게 전달되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이 금은 하응캄에게 500량, 류한에게 300량, 샤오원에게 200량이 각각 제공되었으며(Báo Thanh Niên, 2017.11.07.), 이는 당시 북베트남에 주둔하던 장제스 국민당 군대와 베트남 혁명군 사이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완충 장치로 사용되었다. 이상과 도덕의 언어로 시작된 ‘황금 주간’은 이 지점에서, 신생 국가가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냉혹한 현실 정치의 영역과 맞닿는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은 금융 위기라는 구조적 충격에 대한 시민의 응답이었다. 반면 베트남의 황금 주간은 국가가 막 태어난 순간, 제도와 신뢰를 동시에 구축하려는 건국의 실천이었다. 전자는 위기의 회복을, 후자는 독립의 지속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공통점도 분명하다. 국가는 시민의 신뢰 위에 서며, 신뢰는 위기 속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금모으기’는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책임의 이동이다. 베트남의 황금 주간은 금을 통해 정당성을, 축제를 통해 연대를, 그리고 냉혹한 집행을 통해 주권의 생존을 확보하려 한 시도였다. 한국이 기억하는 금 모으기와 나란히 놓고 볼 때,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운다.
국가의 위기와 탄생의 순간마다, 가장 값진 자원은 국민의 신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때로 금의 무게로, 때로는 붉은 천 위의 침묵으로, 역사의 장면에 새겨진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사진 01_ 황금주간 개막식_하노이 머이 신문
사진 02_ 황금 _ 배양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