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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수의 Xin chào 7] 한국총영사관이 된 남프엉 황후의 집

베트남 마지막 황후, 남프엉 황후 가족이 살던 집 ‘한-베 관계’ 시작

 

호찌민시 1구 응웬주 거리. 오늘도 이곳, 대한민국 총영사관에는 비자와 민원, 기업 상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 건물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공식 외교 공간이라는 사실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과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때 베트남 마지막 황후, 남프엉 황후의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 한–베 관계는 한 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신문 사료를 통한 신시대 국모, 남프엉 황후』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레티빙 여사는 응웬흐우하오(남프엉 황후의 아버지)와 혼인한 이후, 부부는 주로 사이공 응웬주 거리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이 저택은 훗날 대한민국 외교 공관(현 주호찌민시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Lương Hoài Trọng Tính, 2023, p.17)

 

남프엉 황후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잔(Jean) 마리엣 응웬티란이었다. 그녀는 황궁이 아니라, 사이공의 한 저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집이 바로 오늘날 한국 외교관들이 근무하고 있는 응웬주 거리의 건물이다.

 

 

이 집은 황실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당시 사이공 상류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한 공간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레티빙은 남부 가톨릭 명문가 출신이었고, 아버지 응웬흐우하오는 가난한 집안에서 출발해 성실함과 신앙 그리고 식민지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승을 이룬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이 집에서 꾸린 삶은, 식민지 사이공에서 가능했던 ‘새로운 엘리트의 삶’을 상징한다.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2층 저택, 프랑스어와 베트남어가 함께 오가던 거실, 가톨릭 신앙과 유럽식 생활양식이 공존하던 일상. 이 공간에서 남프엉 황후는 훗날 황후로서 감당해야 할 세계―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

 

■ 왕조는 무너졌지만, 집은 남았다

 

1945년,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면서 응웬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났다. 남프엉 황후는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고, 베트남은 독립과 전쟁, 분단과 통일이라는 격변의 시간을 통과했다. 많은 왕궁과 저택이 사라지거나 흔적만을 남겼다.

 

그러나 사이공의 이 집은 살아남았다.

 

주인은 바뀌었고 기능도 달라졌지만, 건물 자체는 도시의 변화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개인의 주거 공간이었던 이곳은 공적 건물이 되었고, 식민지 시대의 저택은 새로운 국가 질서 속에서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 남베트남 시절 한국 매입->베트남 정부 소유 전환->수교 이후 반환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전쟁과 냉전을 거쳐 통일 베트남과 맺은 외교 관계였다. 그러나 이 건물과 한국의 인연은 그보다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건물은 1955년 남베트남 정부에 귀속되었고, 1960년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승인 아래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매입해 외교 공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에는 다시 베트남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으며, 수교 이듬해인 1993년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이곳은 주호찌민 대한민국 총영사관으로 자리잡았다.

 

이 과정은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 공간이 된 것이다. 한때는 한 가정의 사적인 삶이 흐르던 공간이, 이제는 두 나라를 잇는 공적 통로가 되었다.

 

 

■ 한–베 관계는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한–베 관계를 1990년대 이후의 경제 협력과 투자, 그리고 한류의 확산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건물은 말없이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한–베 관계는 어느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된 시간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사이공에서 형성된 국제적 감각, 프랑스어와 베트남어, 가톨릭과 유교 문화가 교차하던 공간. 남프엉 황후의 삶이 시작된 이 집은, 훗날 한국과 베트남이 만나 대화하는 공간으로, 상징적으로 겹쳤다. 과거와 현재는 이곳에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 집은 기억을 품는다

 

오늘날 총영사관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이 건물이 남프엉 황후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공간은 기억을 잊지 않는다. 벽과 정원, 계단과 창문은 한 시대의 삶을 품은 채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남프엉 황후의 가족이 살았던 집에서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나라가 공유하는 역사적 시간의 깊이를 상징한다. 개인의 삶이 국가의 역사로,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외교의 무대로 이어지는 순간―그 모든 것이 이 한 채의 집에 담겨 있다.

 

한–베 관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숫자와 성과를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한 채의 집이, 수많은 통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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