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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배양수 교수 “나는 베트남 하노이 먼지까지 사랑한다”

전동연, 한-베 수교 30주년 맞아 베트남 유학생 1호, 제자 백용훈 단국대 교수와 특별 대담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지 30주년이다. 1964년 한국 베트남 전쟁 파병,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통일 등 긴장관계였던 두 나라는 1992년 12월 22일 공식적인 수교를 맺었다.

 

이 같은 뜻깊은 수교 30주년을 맞아 전북대동남아연구소(전동연)가 유학 1세대로 한국 최초 베트남 유학생인 베트남 전문가인 배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에는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의 공동연구원인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백용훈 교수가 동행했다. 백용훈 교수는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졸업생으로 ‘사제지간’의 훈훈한 인터뷰로 이뤄졌다. 김주영 전북대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위원도 동석했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전동연 이슈페이퍼(23호)에서 인터뷰 내용을 발췌 정리했다.

 

 

■ 배양수 교수 “1988년 6월, 미원통상 취직...1992년 본격적으로 공부”

 

백용훈(이하 백): 베트남과 한국의 수교가 벌써 30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유학 1세대로서 지난 30년에 대한 소회를 먼저 들어볼까 합니다.

 

배양수(이하 배): 참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1988년 베트남을 처음 방문하고 지금까지 왔는데, 베트남 도이머이(Đổi mới: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직후에 어려웠던 그 때의 경제 상황과 지금의 베트남을 비교해보면 큰 발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베트남국제 공항의 모습은 한국 시골의 역사(驛舍)와 같았어요. 지금은 현대화된 국제공항을 보면서 지난 30 년간 이루어진 베트남의 발전을 느껴요. 많은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찾고, 또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어요. 두 국가 사이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왔고, 특히 심화된 경제관계의 측면을 보면서 베트남 연구자로서 기쁩니다.

 

백: 선생님께서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신건데, 혹시 문학 연구에 입문한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배: 베트남 기자들로부터 받았던 많은 질문 중 하나도 “왜 베트남어를 공부했습니까?”였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도이머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베트남에 간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죠.

 

1988년 6월에 미원통상에 취직을 했어요.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베트남 유학준비를 했어요. 호찌민시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자본주의권에서 온 유학생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때 알고 지내던 베트남 현지인이 하노이 출장을 가면서 그곳에 있는 대학을 소개해줬는데, 그게 하노이사범대학교 국문과였어요. 선택의 여지없이 나를 석사과정에 받아주는 대학이나 학과면 진학하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경제학에서 문학으로 전환하게 됐어요.

 

배양수 교수는 1991년 1월 15일 교육부에서 베트남 유학허가 통보 공문을 받고도 1년 8개월 후인 1992년 9월에서야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입학 후 2~3개월이 지나도 등록금이 얼마인지도 알지 못하던 그런 때였다.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먼저 1,200달러로 등록금을 제안했을 때, 배양수 교수는 석사학위 취득까지 모든 기간을 포괄하는 등록금으로 2,000달러를 제시하고 500달러씩 네 차례에 거쳐서 지불했다고 한다.

 

■ 88올림픽 중계 덕분에 한국 이미지 급상승 “남조선이 아니라 '한꾸옥(한국)'”

 

김: 선생님께서는 1991년 처음 유학을 준비하시고, 1992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학기간이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와 수교를 시작한 시점을 가로지르고 있는데요. 베트남 현지에 체류하시면서 수교 전후로 한국에 대한 현지의 인식 차이를 체감한 개인적인 경험이 있으신지요.

 

배: 수교 전에도 1987년부터 한국 기업들이 조금씩 베트남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했었죠. 그래도 수교 이후에 베트남에서도 한국을 방문하고 김영삼 대통령도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서로 소식도 알려지고 인적 교류도 많아졌습니다.

 

특히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88년 10월 19일은 88올림픽 폐막식 날이었어요. 그때 베트남 사람들은 외국인인 절 보면서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아리가또, 아리가또’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가 ‘노, 코리안’이라고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올림픽에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구요. 베트남이 올림픽을 중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러시아 방송이 베트남에 방영이 돼서 그 방송을 통해서 올림픽을 봤다고 해요. 그래서 관료들이나 연배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남베트남 시절 1960년대 서울과 사이공을 비교하기도 하고요. 88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보다 못했던” 한국의 발전상에 많이 놀랐다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보다는 조선공화국으로 알고 있었어요. 한국정부가 요청해서 수교 1년 후쯤에 한국이라고 명칭을 바꿉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었던 거죠. 우리를 '한꾸옥(한국)'으로 불러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건의했고, 당시 보반끼엣 수상이 제안을 수용해서 변경을 했다고 합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한국 경기를 중계 하면서 베트남 국영방송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공식적으로 쓰면서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1993년 수교 1년이 지난 시점, 배양수 교수는 당시 공산당 자문역(사회과학원 부위원장)으로 있던 쩐 박 당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교의 의의를 물은 적이 있다. 쩐 박 당씨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관계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그 관계는 나날이 깊어졌고, 발전돼 왔다.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 1세대 유학생으로 책임감...‘베사모’ 만들어 민간교류 활성화

 

백: 수교 이후에는 1세대 유학생으로서 책임감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부산외대를 다녔을 때 기억하기로는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베사모에도 열심히 참여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민간 활동에 참여하시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강화에 힘쓰셨는지 짚어주세요.

 

배: 부산대 교수 네 명과 저까지 총 다섯 명이 2001년에 베사모를 만들었어요. 부산대 교수들이 1999년~2000년에 프로젝트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을 다녀왔는데, 하노이에서 저의 지도교수를 만났어요. 지도교수가 정성들여 환영을 해주었고, 그게 고마워서 부산대 교수들이 베사모를 만들자고 저한테 제안을 했어요. 처음에는 40만원씩 내서 기금을 만들고, 2002년부터는 회원 확보에 주력했어요. 부산을 방문하는 베트남 학자, 고위 공무원들과 밥을 먹고 선물을 나누면서 교류활동을 시작했죠.

 

 

2003년부터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부산출신 유학생의 모임을 만들어서 서로 격려하는 활동도 했어요. 매년 통일기념일에 베트남을 방문해서 베트남 인사들과 교류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가을에는 베트남 분들을 초청해서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열었어요. 그때는 사람과 예산이 모두 별로 없어서 최대한 예산을 아껴서 그런 행사를 진행했어요.

 

제가 2010년까지 총무이사를 했어요. 10년 정도 활동을 하고 그만두었는데, 여기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었어요.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시간을 많이 빼앗겼어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하나 있어요. 베트남 유학생이 경성대 못골역 계단에서 밤늦게 넘어져서 허리가 부러진 일이 있었어요. 이 유학생이 보험이 없어서 베사모에서 나서서 해결했었죠. 건강보험공단에 가서 6개월치 보험료를 한 번에 지불하면 보험을 살려줘요. 그런 일을 베사모에서 처리해서 학생이 무료로 치료를 받았어요.

 

또 다른 일은, 2009년 즈음 베트남 여성이 부산으로 시집을 왔는데 한 달 만에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베트남 내부에서 한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어요. 베사모가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다 했어요. 나중에 그 여성의 부모가 와서 베사모가 장례식에 필요한 지원도 해줬어요. 그때는 모금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국가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어요.

 

■ “영화-드라마-노래는 심금을 울릴 때 감동...문화는 억지로 균형을 맞출 수 없다”

 

백: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 경제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선생님께서 주로 연구하시는 문학을 포함한 문화 분야의 협력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교 이후에 베트남의 문화교류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고, 보다 포괄적인 문화교류를 위해서 어떠한 접근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배: 문화 이야기가 나오면 한류는 베트남에서 유행하는데, 왜 베트남 문화는 한국에서 유행하지 않는가에 대해 많이 논의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문화는 억지로 균형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영화, 드라마, 노래가 한국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면 당연히 좋아하겠죠. 억지로 들으라고 한다고 해서 절대 되지 않아요. 그런 기계적인 균형은 의미가 없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만, 어떤 기획 부분에서는 양국이 함께 협력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 등과 같은 일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많이 배워서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연 부문에서도 한국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는 한국문학번역원을 통해서 한국작품을 베트남어로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베트남은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 정부에 권유하고 싶은 것은 베트남 문학 번역가들에게 일정 부분의 지원을 제공하고 관련 분야의 정부 간 교류를 촉진하는 일입니다.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이 아니라, 베트남이 우선 그러한 방향을 설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하는 것이죠. 한국 정부도 여기에 호응해서 베트남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확보하면 좋겠습니다.

 

백: 신남방정책을 논의할 때 쌍방향 문화교류와 함께 아세안 10개국에 대한 형평성이 강조된 바 있습니다. 베트남은 의도적으로 교류를 추진하지 않더라도 민간 수준에서 경제, 문화 교류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균형과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과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배: 문화교류는 향유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맡겨야 합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베트남 전통예술을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대중문화는 철저하게 선호도에 따라 이루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 노래가 정말 좋다면 우리 국민들도 좋아하겠죠. 결과적으로 문화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정부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면 안돼요.

 

베트남에서 제안해서 만든 합작영화가 있었는데 흥행하지 못했어요. 예전에는 베트남 드라마나 영화 모두 정부가 채택한 시나리오에 따라서 만들어졌어요. 제작자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기만 하면 될뿐, 상영 여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죠. 그러니까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어요. 요즘에는 베트남 상업영화들 중에서 나름 흥행하는 경우가 있어요. 베트남에서 흥행하는 작품들을 많이 만들고, 노하우도 쌓이면서 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가 나오길 기다려야 해요. 정부가 돈을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베트남의 어떤 문화적 요소들을 한국에서 알릴 수 있는지 상상해보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에요. 문학 분야도 쉽지 않아요. 한국에서 베트남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이 관심이 많이 없다고 해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기록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연구자료 말입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얻지 못한다고 해도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은 발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번역한 『시인 강을 건너다』 같은 책은 분량이 650쪽 정도여서 읽기 참 힘들어요. 그렇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면 베트남 현대사를 한국과 비교하면서 꿰뚫어보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이런 느낌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전달되면 좋을텐데,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그런 자료를 읽은 연구자들을 통해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충분히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사실 교묘하게 비틀어서 거짓을 만드는 유튜브 영상 바로잡아야

 

백: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에 관한 편견이 여전한 듯합니다. 앞으로 상호 인식의 전환, 무엇보다 한국의 베트남에 관한 인식 전환을 위해서 노력해야할 것 같습니다.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배: 학생들에게도 늘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베트남에서 발생한 좋지 않은 사건이 보도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터넷 검색해보면 한국에서 더 심한 사건도 많이 일어났다고요.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 사람들에 대한 편견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교육을 통해서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수밖에 없어요.

 

요즘엔 유튜버들이 조회수 올리려고 자극적인 내용들을 올리잖아요. 수업시간에 학생들하고 베트남을 비방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해본 적이 있어요. 보니까 반 정도는 모두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사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거짓을 만드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보면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죠.

 

100% 거짓말이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참여하고 있는 한-베 현인그룹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건전한 양국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유튜버가 많이 활동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백: 저도 학생들한테 전공생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의 잘못된 영상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일은 정말 필요합니다.

 

배: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인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은데, 이런 일이 있어요. 초기에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의 아이들이 벌써 많이 성장했어요. 아이들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니까 아이가 성장하면 할아버지가 돼서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어요. 아내가 차라리 베트남을 가지고 해서 가도 육체노동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작은 규모로 장사하거나 식당을 운영하면서 사는 거죠.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때 이런 자영업자들이 모두 어려워져서 아이들 학비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어요. 자녀들이 한국에 살았으면 고등학교까지 무료로 다닐 수도 있는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학교는 사립 국제학교 형식이어서 학비를 꽤 지불해야 합니다. 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한국 정부에서 그런 부분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한-베 현인그룹에서 제안을 했어요. 고등교육 분야의 교류 활성화를 위해서 베트남 대학이 한국 대학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고요.

 

 

 

■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개설된지 30년 졸업생 250명....베트남 대학과 상호학점 인정제도

 

백: 현재 베트남 대학에 한국학 전공이 워낙 많이 생기고, 한 학년의 학생이 200명 가까이 되는 대학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소수의 대학에서 소수의 정원으로만 학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양국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양성해야할 분야가 있을지요? 한국에서의 교육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고민입니다.

 

배: 한국과 베트남 대학간 교류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 즉, 규정 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고 베트남측에 제안하고 싶어요. 우리는 지금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어요. 제가 베트남의 한 대학과 협의를 해서 한국어과를 현지에서 개설하고 우리가 만든 커리큘럼으로 가르쳐서 부산외대의 졸업장을 줄 수 있어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베트남에서도 할 수 있는 거죠. 베트남에서 다른 나라 대학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 있는 분야가 어문학과 역사학이에요.

 

부산외대는 베트남어과가 개설된지 30년 정도 됐어요. 지금 약 250명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졸업생들이 베트남 각지에서 살고 있어요. 대부분 한국 투자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해요. 부산외대 베트남어과를 입학하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베트남 현지 취업을 염두에 두고 들어와요. 우리도 현지 취업을 목표로 가르치고, 이 방법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외대에서는 베트남 대학과 상호학점 인정제도를 하고 있어요. 2년을 부산외대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을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와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면 양쪽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2년 3월에 시작해서 벌써 20년에 접어들었습니다.

 

2001년 겨울에 학교에서 학생 유치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 베트남에서 이런 방법이 있다고 제가 제안을 했어요.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 국제교류처장한테 제안을 하고 시범적으로 빨리 시작해보자고 해서 베트남에 협정서 서명을 하러 갔는데 못했어요.

 

호찌민시 국가대학이라는 조직이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 위에 있어서 국가대학교에서 승인을 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직접 호찌민시국가대학 부총장을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서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 전달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 체계를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으로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270명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서 248명, 총 518명의 부산외대 학생들이 베트남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초기에 졸업한 학생들 중에 한국어과 교수가 된 경우도 있어요.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입학생은 대부분 이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입학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년부터는 보내는 인원을 15명으로 제한하려고 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30명을 지원해서 보냈는데 부산외대 수업 개설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 소설 『시인 강을 건너다』 번역...재미있게 번역 기억

 

백: 그동안 많은 문학작품을 번역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면 좋겠습니다. 20-30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현재의 베트남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도 몇 가지 말씀해주세요.

 

배: 소설 『시인 강을 건너다』는 베트남어 제목으로 『신의 시대』인데, 제가 베트남에 대해서 궁금했던 부분들, 특히 북베트남의 현대사를 이 책을 통해서 공부하게 되어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분량이 많았지만 재미있게 번역했어요. 1년 정도 학교에서 보직도 맡지 않고 수업만 하면서 번역에 매진했어요. 2014년 3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번역을 마무리했는데, 출판사를 찾고 기다리면서 그 다음해로 넘어가서 201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최근의 베트남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도이머이 이후에 베트남에서 배고픔을 잊은 세대들과 그 전의 세대는 많이 달라요. 옛날에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지만 그런 순박함보다는 국제무대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았나 싶어요. 학습의 측면에서도 우리와 비슷해요.

 

요즘 베트남 젊은 사람들도 베트남 문학을 잘 몰라요. 제가 베트남 문학을 이야기하면 거의 모르고 있어요. 학교에 오는 베트남 유학생들도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잘 몰라요.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요즘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예전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시간을 지켜요. 개혁개방 하면서 외국인들도 많이 유입되고 약속도 중요해지면서 시간을 지키기 시작한 거죠.

 

 

■ “늘 포근한 베트남은 제게 고향”...‘한-베트남 현인그룹’ 활동도

 

교 30주년을 맞이한 2022년, 배양수 교수가 재직 중인 부산외대와 베트남의 두 대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고 졸업장을 취득한 양국의 학생 수가 500명을 넘었다.

 

2022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교육기본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문화 학생 비율은 베트남이 32.4%로 중국(24.3%)을 앞섰고, 학위‧비학위 과정을 포함하는 전체 유학생 중 베트남이 22.7%로 중국(40.4%) 다음으로 많은 학생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배양수 교수가 교육부에 유학허가 공문을 받으러 갔던 그 시절, 교육부 직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라면서 베트남 유학을 만류했다. 지금은 한국과 베트남 대학에서 양국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배 교수는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베트남 현대 시를 번역하여 ‘시인(Thi Sĩ)’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시집에는 호찌민부터 시작하여 총 58명의 시를 담았다.

 

그는 한-베트남 관계의 미래 발전 비전에 대한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기 위해,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양국 관계에 정통한 양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한-베트남 현인그룹’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올해 3월 출범한 ‘한-베트남 현인그룹’은 이혁 전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이한우 서강대 교수-채수홍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박번순 고려대 교수 등이었다.

 

백: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베트남은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세요.

 

배: 쉽게 생각나는 단어는 베트남은 제게 고향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만큼 포근합니다. 예전에 베트남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하노이의 먼지까지 사랑한다”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하노이에 먼지가 많잖아요.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갈 때 먼지가 바로 보여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도 베트남에 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참 좋아요. 특별한 설명도 필요 없고요. 이런 것이 바로 고향의 느낌이 아닐까 그런 정도에요. 초창기에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나서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어요. 그런 어려움까지도 모두 괜찮아질 정도의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 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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