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딩성 퀴논시는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다. 인구는 약 43만 명이다. 현지인의 발음은 ‘꾸이년’이다.
오늘부터 [Viet 철도여행] 컨셉을 좀 바꾸었다. 당초 하기로 한 열차여행을 퀴논 방문부터는 9인 미니버스 이동 등 변화를 주기로 했다. 베트남 동해안 철도여행 취지는 살리면서 새 도전미션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출발 시각은 오전 6시, 이동거리는 4시간. 서둘러 호텔 체크아웃하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 해수욕을 마치고 노인과 한 부부들과 마주쳤다. 특히 노인은 상의를 벗은 채 유유자적으로 호텔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미니버스는 9인승이었다. 계약은 우리팀이 했다. 그리고 퀴논 가는 이들이 합승과 카풀을 신청한다.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 처음으로 손님을 태우고 카풀 멤버가 서있는 곳을 하나씩 찾아간다.
버스는 이미 해가 떠오른 해안을 끼고 달렸다. 바다에는 벌써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인지, 아니면 이 시각에도 바다는 해수욕이 가능할 수온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 둘 다 맞는 것 같다. 차창 밖으로 체조하는 이와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이들이 스쳐간다. 개와 산책 나온 이들의 실루엣도 스쳐갔다.
리무진 미니버스는 달리면서도 와이파이가 가능하는 등 첨단 설비를 갖추었다. 앞뒤 좌석 사이가 좁기는 해도 승차감은 좋았다. 미니버스는 도중에 한 번씩 승객을 내려주었다. 도착지 1시간 앞두고 세차 및 정비하기 위해 정비소에서 쉬었다. 10분 휴식을 위해 버스 밖으로 나오니 기온이 후덥지근했다. 2명이 먼저 내린 후였다.
■ 한국 맹호부대 주둔지, 그리고 용산구청 자매결연 ‘용산로’도 있다
퀴논에 가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멋진 해변을 보러 간다"고 한다. 영국 가디언지 ‘2018년 세계 10대 휴양지’로 선정될 정도로 해수욕장을 넓고 길고 아름답다.
퀴논은 한국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곳이다. 베트남 전쟁 시 격전지이자 한국 맹호부대가 주둔한 곳이었다. 당시 퀴논에는 맹호부대, 다낭에는 청룡부대, 나트랑에는 백마부대가 주둔했다.
내가 일부러 퀴논을 찾은 이유 중 하나도 맹호부대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시기 맹호부대는 서울 용산구에서 창설되었다. 1996년 11월 8일 용산구는 퀴논시를 방문, 이 인연을 설명하며 자매결연 및 교류의향서 전달했다.
2016년에는 이태원 이면도로(보광로 59길)에 국내 최초 베트남 테마거리인 ‘베트남 퀴논길’이 조성했다. 같은 시기 퀴논시 안푸팅 신도시 개발지구 중심가에는 ‘용산거리’가 조성됐다. 외국 도시명을 딴 거리로는 베트남 최초 사례다.
박상원 한아세안포럼 이사장은 “현재 퀴논에는 한국인이 6명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고 나에게 말한 바 있었다. 퀴논은 포천이나 익산처럼 ‘묘지석’ 등 석재의 유명산지로 중국 수입길이 막혀 퀴논 석재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
미니버스를 내리자마자 ‘용산거리’행 택시를 잡아탔다. 20여분 달리자 ‘용산거리’였다. 용산거리는 시내 외곽에 대대적으로 조성 중인 신도시 지역에 있었다.
“아 여기가 용산구청이 보내왔던 보도자료 속 퀴논 ‘용산거리’ 표지석이구나.”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둘러보았다. 동네는 아직 신도시가 완전히 조성되지 않아서 비어있는 공터가 많았다.
반가운 것은 길거리나 집 문패 주소에 ‘용산로’로 표기되어 있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가끔 ‘이란’을 연상하게 되는 이치와 같이 나도 용산이 떠올라 뭉클했다.
용산구청은 한국기업 베트남 진출지원, 베트남 우수학생 유학 지원, 백내장 치료 지원, 사랑의 집짓기, 꾸이년 세종학당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지원해왔다.
■ 캄보디아 연결 회랑과 남프엉 황후가 즐겨 찾았던 해변
김석운 베트남경제연구소장은 “베트남 동해 항구 중 수심이 깊은 곳으로는 붕따우와 퀴논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퀴논은 중부지역이고, 캄보디아 회랑으로 연결되어 지리적으로 이점이 많았다.
내가 묵었던 호텔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퀴논의 도시 표정은 두 가지였다. 왼쪽에 퀴논의 아름다운 해수욕장, 오른쪽에는 어선 정박항과 수많은 콘테이너가 쌓여있는 무역항이 있었다.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참파왕국의 마지막 수도이자 베트남전의 격전지이자 맹호부대의 주둔지였던 퀴논시는 교통으로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다. 빈딩성은 남북을 연결하는 1번 국도와 라오스-캄보디아로 연결되는 19번 국도 등 교통의 요지다.
지방 곳곳으로 연결되는 기찻길, 국내-국제항공편을 보유한 푸캇(Phu Cat)공항, 유럽과 아시아를 뱃길로 연결하는 2개 국제무역항구를 갖추었다. 이제 민간 밤부공항의 본거지인 푸캇공항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미국 공군 활주로를 짓기 위해 건설되었다. 베트남 공군과 미군 공군의 주요 기지였다.
첫 상업 비행이 시작한 것이 1984년이었다. 2003년에 이르러서야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쳤다. 2018년 재확장 공사를 통해 최대 240만명의 승객을 수용할 규모로 커졌다. 이제 국내 항공노선뿐만이 아니라 한국 국제노선을 확보해 국제공항으로 도약 중이다. 퀴논에서 유럽으로도 직접 갈 수 있다고 한다. 2017년에만 150만명의 승객이 이용했다.
이처럼 퀴논은 수심이 깊은 항구를 갖고 있고, ‘용산거리’처럼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되고 있었다. 캄보디아 연결 회랑에다 국제공항 등 미래에 더 큰 가능성이 열린 도시인 듯했다.
퀴논은 역사적으로 프랑스가 개항을 했다. 2차대전에는 일본군이 진주했다. 이보다 거슬러가면 지금 베트남 주류가 된 응우옌 왕조 출발지이기도 하다.
퀴논에서 대표적인 관광지가 ‘황하우(황후) 비치’였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 의 부인 남프엉 황후가 즐겨 찾았다는 해안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긴 퀴논 해수욕장 이면 도로를 달려 닿은 곳이 백사장 남쪽에 있는 ‘겐랑 언덕’이었다. 과연 해변과 시가지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 언덕 바로 아래쪽에는 계란처럼 생긴 대형 몽돌로 가득찬 작은 해변이 있었다. 바로 '황하우비치'였다.
관광버스 행렬에서 내린 남녀노소들이 몰려들어 해변으로 내려갔다가 그 위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등 데이트명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변과 함께 더 유명한 것이 거기서 10분 거리에 있는 베트남 국민시인 한막뜨(Han Mac Tu)의 무덤이었다.
■ 베트남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한막뜨 무덤이 셋인 이유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인생은 아름답다.”
-한막뜨 시 ‘여기는 비야마을이다’(Đây thôn vĩ dạ) 안의 한 문장
겐랑 언덕 인근에는 한막뜨의 시 중에서 한 구절을 따 그의 필체로 새겨놓은 돌 기념물이 있다. 한막뜨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승 판 보이쩌우를 만난 후, 베트남 현대문학사에 새로운 낭만파를 탄생시킨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의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사랑에 관한 시어는 국민들이 애송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시는 대부분 편지를 통해 나눈 사랑 이야기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원했지만 식민당국이 허락하지 않아 사이공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젊은날, 그에게 찾아든 가혹한 운명과 슬픈 러브스토리 때문인 듯하다. 나의 철도여행 행로 중 하나인, 이틀 전 떠나온 어촌 마을 무이네(Mui Ne Beach)에서 시인 한막뜨는 운명의 여인 ‘몽껌’을 만났다. 하지만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는 무이네를 떠나와 퀴논으로 와서 한센병으로 1940년 11월 11일 28세 짧은 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셋이다.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그의 사랑에 관한 시와 함께 그의 무덤에 대한 안타까운 스토리가 회자되었다.
한막뜨의 첫 무덤은 한센마을이 격리 운영되었던 마을 인근에 있었다. 그곳에 묻힌 이유는 ‘죽음 소식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덩그라니 기념탑만 방문객을 맞았다.
두 번째 무덤은 바로 황하우비치 인근에 조성되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달려온 친구가 새 무덤을 만들었다. 그에게 평소 자주 말했던 “가장 존경하는 성모마리아상 아래에 묻어달라” 유언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겐랑 언덕의 성모마리아상 아래로 옮겨졌다. 여기서 다시 반전, 지금은 여기에도 그의 시신이 없다고 한다. 가족들이 고향 꽝빈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황하우 비치에서 몽돌해안을 둘러보고 겐랑 언덕에서 성모마리아 아래 묻힌 두 번째 무덤 앞으로 갔다. 그 ‘가짜 무덤(?)’ 앞에는 수많은 참배객이 찾아왔다. 특히 여성들이 줄을 서서 향을 올리고 묵념하고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택시로 15분 거리 달려 첫 무덤으로 갔다. 과거 한센병 마을 인근이었을 것이다. 기념탑으로 남아있는 첫 무덤 80미터 아래에는 기념관이 있었다. ‘한막뜨 메모리얼하우스’에는 그가 눈 감기 전의 모습 그대로 배치된 침구와 물품, 직업하던 시와 시를 전시중이었다.
■ ‘국부’ 호치민과 ‘불패’ 보그지압 장군의 초상화가 있는 식당
퀴논에서의 점심과 저녁은 베트남 식단이었다. 베트남 음식은 입맛에 딱 맞았다. 특히 저녁은 특별한 식당에서 먹었다. 베트남 ‘국부’ 호치민과 ‘불패’ 보그지압 장군의 초상화가 벽화로 그려져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가는 비가 뿌렸다. 대기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식후 커피타임...다시 퀴논 긴 해안 백사장 카페를 찾았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아름다운 퀴논 해수욕장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먹었다. 이국적이었고, 황홀했다.
전날 나트랑 해수욕장 ‘세일링클럽’ 백사장 식탁에서 시간을 보낸 것처럼, 역시 베트남 동해안에서는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멍때리거나 담소를 나누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퀴논에서는 한국인을 보기 어려웠다. 퀴는은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다낭과 나트랑과 사이, 베트남 중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라고 알려진 점도 있었다.
아마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해안에는 절경이 많았다. 깨끗한 바다환경으로 '신이 숨겨놓은 도시'라는 평도 과장이 아니었다. 손꼽을 고층 빌딩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고즈넉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어쩌면 이 때문에 가능성이 더 큰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퀴논찬가’에는 쉽게 잊을 수 없는 목록들이 들어있다. 첫날 찾은 베트남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한막뜨와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바오다이 황제의 부인 남프엉 황후의 스토리가 맨 먼저 올랐다.
내일은 퀴논 성당과 유서깊은 수도원, 참파왕국의 마지막 수도이자 퀴논 시내에 남아있는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다낭행 '침대버스(sleeping bus)를 탈 생각이다. 철도와 택시와 전세버스, 미니버스, 참대버스 등 변화무쌍한 행로가 설레게 한다. 퀴논 해수욕장의 파도소리가 깊고 우렁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