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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 철도여행 10]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후에역에서 철도여행 아듀!

유네스코 문화유산 궁궐과 12대 카이딘왕릉 비롯 분보후에 등 맛집도 군침

 

후에(HUE)에서 아침을 맞았다. 옛말에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食後景)’이라고 했다. 금강산 구경도 밥부터 먹고 하라는 것,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를 탔다.

 

‘퀴안 분보후에 바 트엣’. 후에 특산음식인 ‘분보후에’(BIN BO HUE)로 유명한 집이다. 이른 시간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장사진이었다. 식당은 문턱이 없다. 도로에서 바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주인인 듯한 한 여성이 선지를 자르고 있었다. 다른 직원은 대접을 두 줄로 정렬시켜 고명을 넣으며 국수를 말았다.

 

 

‘분보후에’는 매콤한 쌀국수다. 한국식으로 하면 ‘짬뽕’이다. 소고기에다 돼지고기와 숙주나물, 선지, 동그랑땡, 도가니 등을 넣었다. 식탁은 좁은 통로를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손님들은 낚시의자와 낮은 식탁에 앉아 쌀국수를 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다.

 

후에에는 이름난 전통 음식들이 많았다. 분보후에, 껌헨(조개 국밥, 재첩), 반코아이(작고 바삭한 반쎄오) 등이 있다. 전날 흐엉강(香江) 강변에서 먹은 ‘한막뜨 조개국밥’은 재첩 비빔밥이었다.

 

 

김석운 베트남경제연구소장은 “의자가 낮을수록 가격이 낮다”며 낮은 식탁과 의자에서 다닥다닥 붙어 국수를 먹고 있는 이들을 보며 웃었다.

 

■ ‘후에 구시가’는 성벽에 둘러싸인 바둑판 모양 사각형 도시...남쪽에 왕궁

 

유서 깊은 베트남의 고도(古都) 후에는 훌륭한 여행지다.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라는 한국식 혹평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고전적인 이미지가 갇혀서 나온 말인 것 같다.

 

 

1993년 베트남 최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는, 1802년에 탄생한 ‘응우옌(Nguyen)’ 왕조 옛도읍지 풍경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전통을 간직한 예전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다시 복습하자면 후에는 베트남 최초 통일 왕국이자 마지막 왕조의 수도다. 공산정부가 1945년 수도를 하노이로 옮기기 전까지 135년 도읍지였다. 후에 구시가는 바둑판 모양의 사각형 도시로 그 남쪽에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응우옌왕궁이 있다.

 

 

응우옌 왕궁에는 1802년에서 1945년까지 13명의 왕이 거주했다. 무려 3만 명이 동원되어 민망황제 시기에 완성된 왕궁은 인상적이다. 프랑스 건축가 바우반(Vauban) 설계로 프랑스-베트남식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세워졌다고 한다.

 

왕궁에는 외국어 안내 서비스가 있어 한국말도 제공된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성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더 놀라웠다. 궁궐은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방했고, 규모를 4분의 3으로 축소했다. 내부는 오문(午門, 입구), 태화문(太和門, 왕의 집무실), 자금성(왕가가 생활했던 곳), 종묘로 이뤄졌다.

 

 

기시감이 들었다. 30여 년 전 중국 베이징 자금성을 갔을 때 생각이 났다. 한 여름이었다. 자금성 궁내에는 나무가 없었다. 바닥도 돌로 깔아 놨다. 너무 더웠다. 나무도 없고, 바닥도 돌로 깔아놓은 이유를 듣고 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황제를 노리는 자객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자금성보다는 작았지만 응우옌 왕궁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성벽은 한 변이 2.2km, 높이 6.6m, 폭 21m 본궁에 이른다. 외부에는 해자가 파져있다. 성벽에는 11개의 문이 있다.

 

 

아쉬운 것은 후에 자금성은 베트남 전쟁 중 미국의 폭격으로 70%가 파괴소실 되었다는 것. 본궁 자리에는 건물 없이 텅 비어 있다. 전란으로 허물어진 담장과 총탄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백년 도읍지는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

 

현재 왕궁은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전시품이 거의 없었다. 회랑에는 역대 황제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 청나라와 프랑스의 군대들이 왕궁을 지켜주는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구한말 조선 같은, 망국의 설움이 배어있는 사진들이었다.

 

 

황색으로 칠해진 벽, 붉은색 기와가 얹힌 궁궐은 거의 모두 벽돌 양식이었다. 태화전, 연수궁, 장생궁 등 황제가 부모를 위해 지은 궁들은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많은 나무가 있었다. 연못에는 베트남의 국화인 연꽃들이 피어있었다.

 

왕궁은 넓은데다가 날씨가 더워 둘러보는데 힘이 들었다. 150년 도읍지 왕궁을 돌아보면서 ‘응우옌’ 왕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 뭘까, 생각해봤다. 순전히 개인적으로 생각한 것은 이름에 들어가는 ‘응우옌’이라는 ‘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왕조는 나라를 침략당하고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인들의 성이 너도나도 응우옌이다. 실제 베트남 전 국민의 30% 성씨가 응우옌이다. 인구 5분의 1인 21%를 차지한 한국의 김(金)씨처럼.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응우옌 왕조에는 국민들이 평가하는 큰 공적이 하나가 있다. 호이안에 들어온 멸망한 명나라 세력을 사이공으로 강제 이주시켜 지금의 베트남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격하게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 프랑스 침략 빌미를 준 잿빛 12대 카이딘 황제릉에 경탄

 

응우옌 왕궁 안은 더웠다. 섭씨 34도를 오르내렸다. 체감온도는 39도 정도로 느껴졌다. 습기는 없지만 직사광선이 강렬했다. 궁내는 미로 같아서 가이드 없이는 헤맬 수밖에 없다. 궁궐을 돌아보고 인근 ‘후에왕실유물박물관’을 보고 나니 파김치가 됐다.

 

 

피곤한데다 배도 고팠다. 점심은 ‘옛날 공간’이라는 후에 궁중음식점에서 먹었다. 전날 뱃놀이에서 들었던 음악도 궁중음악이었다. 천장이 높은 식당은 수많은 손님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후에는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처녀의 잘록한 허리 같은 위치에 있다. 남과 북이 만나는 중부의 중심, 지리적으로도 후에 자체가 관광 상품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응우옌왕조 12대 카이딘 황제릉을 찾았다. 10~11대 황제가 프랑스에 반기를 들자 프랑스는 두 사람을 폐위시키며 1916년 카이딘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는 9년간 재위 중 민생을 도외시하고 외세인 프랑스에 얹혀 국고를 탕진했다.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군주였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1925~45년 20년간 재위)의 부친이다.

 

 

왕릉은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지어졌다. 프랑스의 신민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옹호한 입장이 왕릉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입장권을 끊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넓은 광장이 나왔다. 큰 탑과 조형물들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고 전망도 좋았다.

 

잿빛의 건축물들은 후에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 양식과 달랐다. 유럽에서 수입된 콘크리트와 돌을 이용했다. 바로크 양식을 바탕으로 중국과 베트남 건축 양식이 접목되었다. 화려한 첨탑과 계단, 대신과 장군 인물상 비석도 예사롭지 않았다.

 

 

다시 한 층을 올라가 계단 끝 평지가 나오고 다시 한 층, 올라갈수록 시야도 넓어지고 정교한 석조 건축물의 절묘한 모습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왕릉 맨 위에 있는 게 천장궁이었다.

 

여기에 황금색 카이딘 동상 아래, 18미터 깊이에 황제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용좌에 앉아있는 동상 위 커튼이다. 커튼이 돌이다. 누가 암살하려 들면 돌 커튼이 내려와 함께 무너지는 장치라고 한다.

 

 

 

카이딘 황제는 자기만의 궁전을 위해 엄청난 세금을 거두었다. 지극한 사치 끝에 불어난 빚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였다. 끝내 프랑스에 의탁하고 식민지가 되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오랫동안 원성의 대상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 분노와 원성이 관광객 발길을 끌어오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참고로 마지막 황제인 그의 아들 ‘바오다이 황제’는 임기 중 폐위되어 무덤이 없다. 한국들이 좋아하는 관광지 달랏에는 바오다이 황제 여름 별장이 있다.

 

■ 흐엉강 기슭 21미터의 8각 7층 석탑으로 유명한 티엔무 절

 

카이딘 왕릉을 나와 흐엉강 기슭 하케언덕 위에 세워진 티엔무(Thien Mu) 절을 잠깐 들렀다. 1601년 세워진 티엔무 사원은 ‘하늘에서 여인이 내려와서 새로운 국가 번영을 예언했다’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 덕분인지 베트남 전쟁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이 사원에는 1844년 만들어진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21미터의 8각 7층 석탑이 유명하다. 대웅전은 부처 본존 앞에 큰 달마상이 유리관에 놓여있었다.

 

사원 한편에는 60년 전 민중을 탄압한 대통령에게 온몸으로 저항을 표시했던 스님이 몰고 간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대통령궁 앞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고 세상을 떠났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프랑스 식민지 역사의 흔적인 하노이 호치민 퀴논 등 큰 도시 중심지에 성당이 있다. 또한 불교국가라고 불릴 만큼 높은 산이나 경관이 좋은 곳에는 유서 깊은 절들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많은 택시를 탔다. 그 많은 택시 앞 유리창 아래는 불상이나 달마상이 놓여있었다.

 

■ 후에역서 하노이역, 14시간...그 즐거운 철도여행을 남기고 아듀!

 

 

당초 이번 여행 프로젝트는 호치민-하노이 열차여행으로 기획되었다. 예정대로라면 호치민에서 후에까지 칙칙폭폭 철도여행이었어야 했다.

 

‘베트남 기차여행’은 나트랑 이후 ‘버스여행’으로 급변경되었다. 여행 콘셉트가 바뀌니 여정이 혼란스러워질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전화위복이라고 미니버스와 슬리핑버스 체험은 뜻하지 않는 기쁨이었다.

 

특히 후에의 고전적인 ‘철도역사(鐵道驛舍)’가 혼란스러운 심리적인 공복(空腹)을 채워주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절묘하게도 나는 후에 기차역 앞에서 이번 여행을 정식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를 얻었다.

 

 

여행 코스는 다시 회상해봤다. 첫날 호치민 사이공역에서 판티엣까지 철도로 여행했다. 그리고 빈투언역에서 나트랑역까지 갔다. 나트랑에서 계획을 급변경, 기차여행이 아니라 버스여행이 되었다.

 

나트랑에서 9인승 미니버스로 퀴논, 퀴논에서 다낭으로는 침대버스로 이동했다. 다낭에서 호이안을 갔다가 다시 후에행 미니 15인승 리무진을 탔다.

 

당초 구상했던 것에서 벗어난 행로였다. 정도(正道)가 아닌 변칙인 셈이었다. 하지만 여행의 매력은 우발적 상황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난생 처음 타본 ‘침대버스’의 기묘한 안락함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카이딘 12대 황제의 궁궐을 보고 호치민 공항으로 갈 항공편을 타기 위해 후에국제항공으로 갔다. 신기한 것은 그 길 중간에서 ‘후에철도역’을 발견한 것이다.

 

후에역은 깔끔하고 기품이 있었다. 나트랑역에 비해 번잡함도 없고 부산함도 없었다. 유서 깊은 도시의 자부심이 건물 디자인에도 반영한 듯 우아했다.

 

나의 베트남 철도여행 시즌2 계획은 후에에서 출발해 하노이까지다. 그리고 세계자연유산 클래스라는 하롱베이와 고산지대 소수민족의 마을 ‘사파’를 가볼 생각이다. ‘철도여행’ 시즌2를상상만 해도 설레고 기다려진다.

 

후에 공항에서 탑승 수속하고 기다리는데 1시간 연착이었다. 이번 여행은 당초 세운 목표를 다 못(안) 채운 미완성이었다. 대신 경험은 완성했다. 나름대로 ‘떠나기 위한 떠남’의 미션 클리어!!

 

 

50년간 세계를 여행한 작가 폴 서루는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이 여행이다. 그 밖의 탈 것들, 특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과정은 그저 이동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다가 샛길로 빠진 나의 베트남 철도여행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벅차오르는 시즌2가 남았다. 다음에는 후에역에서 하노이역까지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노이역에서 사파를 향해 버스를 타겠지!!! 후에 아디오스(Adios!) 아이 윌 비 백(I will be ba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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