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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 철도여행 9] 150년 도읍지 ‘후에'의 달밤에 ‘씨클로’를 타다

2대 황제 민망황제릉-트랑 티엔 다리 팔색조 조명과 궁중음악 격조


 

다낭에서 15인승 고급리무진을 타고 후에(Hue)에 2시간만에 당도했다. 

 

후에는 한국의 ‘경주’처럼 유서 깊은 베트남의 고도(古都)다. 베트남 최초 통일 왕국이자 마지막 왕조(1802년부터 1945년까지)인 응우옌 왕조가 정한 도읍지다. 하노이로 옮겨갈 때까지 143년간 베트남의 수도였다. 

 

베트남 중부 투아티엔 후에라는 성(Thua Thiên-Hue Province)의 성도인 후에는 인구는 약 45만 5240명이다.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한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후에는 베트남인에게 역사 그 자체이자 정신을 가꾸어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 전쟁 역사까지 ‘영광과 상처’가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리무진에서 내려 택시로 옮겨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다낭보다 후덥지근했다.

 

 

■ 2대 황제 민망황제릉...엄청난 크기와 호수와 건축물 아름다워

 

고풍스런 장식과 왕궁 그림이 장식된 호텔에 체크인 했다. 곧바로 응우옌 왕조의 2대 황제인 민망황제의 무덤으로 갔다.

 

후에의 3대 유적지를 꼽을 때 후에왕궁과 카이딘황제릉, 민망황제(1820~1840)릉을 가장 많이 꼽힌다. 택시는 후에시를 관통하는 흐엉강(Perfume River, 香江)을 따라 30분 정도 달렸다. 

 

민망황제릉은 한국의 덕수궁처럼 한동안 개방을 하지 않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베일을 벗었다. 왕릉은 호수와 건축물의 조화가 빼어났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건축물을 지나니, 맨 끝이 황제 무덤이다. 건축물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호수가 왕릉을 둘러싸는 구조였다. 

 

황제무덤은 초승달 모양의 호수와 호수 위 다리를 지나며 위용이 나타난다. 높이 3미터, 285미터가 되는 두터운 외벽에 둘러싸여 있다. 물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벽의 문은 1년에 단 한번 황제의 제례식 때만 열린다.

 

평일 낮 왕릉에는 홀로 관람객이나 단체 외국인이 눈에 띄었다. 모델로 짐작되는 여성이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고 화보 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국 궁궐서 흔히 보는 연인들과 가족 나들이객들도 한가로이 역사 속을 거닐고 있었다.

 

 

안내하는 베트남인 수경은 “1대 짤롱 왕은 외국과의 협력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그것이 매국 이미지로 비쳐지며 베트남 국민에게 인기가 없다. 베트남 사람들은 짤롱 왕 무덤에는 잘 찾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여러 왕조가 바뀌었다. 1802년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세워졌다. 프랑스의 지원이 있었다. 베트남은 1859년부터 60년간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은 1945년 독립 후에는 한국처럼 남북으로 분열되었었다. 이후 1975년까지 30년간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전쟁과 미국과의 베트남전쟁이 이어졌다. 

 

 

후에는 베트남전쟁 중 남과 북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폭격과 전투의 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후에의 찬란했던 문화유적과 유물들이 상당수 흔적 없이 사라졌다. 

 

민망황제릉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향’을 만드는 마을을 들렀다. 왕조의 흥망성쇠도 향의 연기처럼 덧없었다. 1945년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Bao Dai)’는 퇴위 당했다. 그렇게 왕조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공산정권은 왕조를 없앴다. 수도를 하노이로 옮겨가기 전까지 후에는 143년간 베트남의 수도였다. 

 

■ 후에에서 다시 만난 한막뜨...‘재첩맛집’에서 뚝딱 ‘씨클로’ 역사를 달리다

 

‘한막뜨’는 베트남 국민시인이다. 퀴논에서 한막뜨 무덤을 보고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북쪽의 후에에서 그의 흔적을 다시 만났다. 

 

 

흐엉강 강변 흰밥 맛집 간판은 ‘한막뜨 조개국밥’이었다. 한막뜨 시인이 이렇게 베트남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조개국밥 껌헨(재첩)은 후에의 특산 음식이다. 우리로 보면 ‘재첩비빔밥’이다. 껌은 밥, 헨은 조개라는 뜻이다. 섬진강에서 보았던 재첩이었다. 한막뜨 조개국밥집에서는 재첩을 쌀과자 위에 얹어 먹었다. 

 

또한 동그랑땡 같은 꼬치, 댓잎으로 싸여있는 새우가 들어있는 찹쌀떡도 먹었다. 다낭에서 미리 맛본 ‘미꽝(Mi quang)’에 이어 두 번째 이 고장 음식이었다. ‘한막뜨’ 때문에 더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트랑 티엔 다리(Trang Tien Bridge)까지 생애 처음으로 ‘씨클로’(Cyclo)를 타보았다. 씨클로는 자전거라는 뜻이다. 2개의 좌석 바퀴와 운전석 바퀴 1개로 구동된다. 손님과 운행자의 무게가 골고루 분배되어 좌우로 방향전환이 쉽게 되어 있다. 

 

운전하는 남자는 험하게 씨클로를 몰았다. 차도 안에서 앞에 있는 오토바이에 굴하지 않고, 진격했다. 심지어 자동차에도 덤빌 기세였다. 중앙차선으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질주였다. 그래도 씨클로에 앞에 앉아 밤바람을 맞으니 시원했다. 

 

여기는 베트남의 고도 후에구나...반대편 차선에서 눈앞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들, 날다람쥐처럼 옆으로 치고 들어갔다가 쏜살같이 앞으로 치고나가는 퇴근하는 오토바이족들...

 

 

밤이 깊어가는 흐엉강물와 울창한 고목 속 씨클로를 타고가면서, 어느덧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맞다. 여행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 ‘후에’라는 베트남 역사 속의 일부가 되었다.

 

■ 시시각각 화려한 팔색조 변화...흐엉강 명물 트랑 티엔 다리

 

흐엉강 트랑 티엔 다리는 구도시와 신도시를 잇는 명물 다리다. 에펠탑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밤마다 시시각각 형형색색 ‘색(色)’을 쓴다. 고즈넉한 도시를 현대식으로 만나는 기묘한 접점이 되어주었다. 

 

 

이 다리는 응우옌 왕조의 궁궐로 가는 강 위에 놓여있다. 강변에는 이 야간 조명을 보려고 몰려든 관광객들이 많았다. 조명은 쉽게 잊혀 지지 않을 만큼 팔색조처럼 계속 바뀌었다. 

 

호이안에서 전통배를 탄 것처럼 흐엉강 명물 트랑 티엔 다리를 배경으로 운행하는, 배 앞에 용머리를 단 ‘용배’를 탔다. 이 배는 흐엉강 트랑 티엔 다리까지 갔다가 선회하고 나서 오랫동안 멈추었다. 

 

멈춘 배 안에서는 30여 분간 전통악기 연주와 노래 공연을 했다. 바로 ‘냐냑’, 궁중음악(雅樂, Nha nhac)이었다. 

 

 

냐냑은 마지막 황제 바오 다오가 퇴임할 때까지도 연주되었다. 많은 연주자들이 고인이 되었다. 다행히 옛 연주자들을 만나 녹음 촬영해 이를 통해 2003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세 명의 연주자들은 궁중악사처럼 파란색 전통의상을 입고 냐냑을 연주했다. 최연장자로 보이는 연주자는 피리 같은 악기를 불었다. 기타처럼 울림통이 둥근 같은 악기, 한 줄을 타는 현악기 ‘다보우’가 연주자들에 의해 울려 퍼졌다. 

 

그들이 연주하는 동안 앉아있던 다섯 명의 여성들은 손에 든 작은 타악기로 박자를 맞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나 노래를 시작했다. 

 

 

첫 합창은 마치 경기민요처럼 느껴지는 느린 노래였다. 이어 셋이 부르는 노래는 빠르고 신났다. 솔로송은 호소력이 있었고, 연주자였던 남자가 일어나 같이 하는 남녀송은 아름다웠다.

 

아, 아주 특별난 용배에서의 ‘신라의 달밤’이여. 아니다, ‘후에의 달밤’의 밤배놀이 정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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