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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3] 24년 어둠을 뚫고 피어난 자유의 꽃

아시아 최연소 국가의 탄생...무장투쟁-외교전- 학생운동 등 피와 눈물로 쓴 독립사

 

2025년 10월 26일,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됐다. 가입 신청 후 무려 14년만의 승인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호주 북부 다윈 사이에 위치한, 강원도 크기의의 동티모르(수도 딜리Dili)는 인구 142만명의 동남아 최연소국가다.

 

동티모르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 중 하나다. 과연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08년부터 14년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를 역임한 최창원 교수를 특별 칼럼니스트로 초빙한다. 그는 앞으로 동티모르의 역사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쉽게 술술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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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동티모르 산악도시 아이나로의 절벽 끝에 섰다. 현지인들이 '자카르타 루아(제2의 자카르타)'라 부르는 이곳. 인도네시아군은 덤프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와 모래를 쏟아붓듯 낭떠러지로 떨어뜨렸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다.

 

이야기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투갈이 1974년 7월 27일 탈식민화를 선언한 후 동티모르는 독립을 향한 정당 활동을 전개했으나, 인도네시아의 분열 공작과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로 UDT(티모르 민주연합)와 프레틸린 간 내전이 벌어졌다. 포르투갈 행정부가 철수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인도네시아는 이 틈을 타 국경 지대부터 무력 침공에 나섰다.

 

프레틸린은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해 1975년 11월 28일 독립을 선포했다. 포르투갈이 탈식민화를 선언한 지 489일(1년 4개월 1일) 만이었다. 단 한 번도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이 땅에서 나온 선언이었다. 그때는 불완전해 보였지만, 훗날 이 선언이 동티모르인의 땅임을 증명하는 법적 근거가 됐다.

 

 

12월 7일 인도네시아군의 전면 침공으로 딜리가 함락됐고, 동티모르는 이후 24년간 잔혹한 강점기를 겪는다. 그 기간 중에 티모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Ha'u faan ha'u-nia isin sosa liberdade."(내 몸을 바쳐 자유를 얻었다.) 동티모르 독립가요의 이 한 소절은 니콜라우 로바투(Nicolau Lobato)의 삶을 압축한다.

 

1975년 인도네시아군이 밀려왔을 때, 스물아홉 살의 초대 총리는 산으로 들어갔다. '산 속의 대통령'. 3년간의 처절한 항전 끝에 1978년 12월, 그는 마테비안 산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서른 둘.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오늘날 동티모르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로바투가 쓰러진 자리를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ão)이 이어받았다. 시인이자 게릴라 총사령관. 그는 11년간 정글에서 저항을 이끌었다. 1992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철창 안에서도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

 

■ 두 개의 지도, 두 개의 현실: 인도네시아가 그린 지도와 유엔이 그린 지도

 

이 시기 냉전의 논리와 자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렸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제27번째 주'로 선포했다. 그러나 유엔은 24년 내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티모르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령 비자치 지역'으로 남았다. 세계 지도에는 두 개의 동티모르가 존재했다. 인도네시아가 그린 지도와 유엔이 그린 지도.

 

한편 호주는 인도네시아의 실효 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배경에는 티모르 해의 ‘그레이터 선라이즈(Greater Sunrise)’ 가스전이 있었다. 500억 달러(약 74조 500억 원) 규모의 자원을 둘러싼 협상에서, 호주는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하는 편이 현실적이라 판단했다. 국제법적 원칙과 지정학적 현실 사이에서, 동티모르는 홀로였다.

 

■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세 갈래 저항: 총, 펜, 그리고 기도

 

동티모르 독립운동은 세 축으로 움직였다. 산속의 무장투쟁, 해외에서의 외교전, 그리고 국내의 학생운동.

 

1989년 10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도네시아 점령 중인 동티모르를 방문했다. 딜리 외곽 타시톨루에서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 말하며, 어둠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라고 했다. 미사가 끝나자 청년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펼쳤다. 인도네시아 당국의 탄압이 뒤따랐지만, 교황 방문으로 동티모르의 고통이 세계에 알려졌다.

 

 

1991년 11월 12일, 딜리 산타크루즈 묘지. 수천 명의 청년들이 추모 행진을 했다. 인도네시아군이 군중에게 발포했다. 250명 이상이 묘비 사이로 쓰러졌다. 영국인 기자 맥스 스탈이 묘비 사이에 숨어 카메라를 돌렸다. 테이프를 묘지에 묻었다가 밤에 회수해 밀반출했다. 영상이 전 세계로 퍼졌다.

 

나는 그를 두 차례 만났다. 그가 운영하던 역사아카이브 센터와 호텔 티모르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영상이 동티모르 정규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끔찍한 학살의 기록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무거웠다.

 

1996년, 국제사회가 마침내 응답했다. 동티모르인 두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비숍 카를로스 벨로(Carlos Belo)는 딜리 주교로서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국제사회에 인권 침해를 증언했다. 조제 하무스 오르타(José Ramos-Horta)(현 동티모르 대통령)는 망명지에서 유엔을 무대로 외교전을 펼쳤다. 총을 든 게릴라가 아닌, 펜과 기도로 싸운 이들이었다. 세계가 이 작은 섬을 주목했다.

 

■ 1999년 8월 30일 목숨을 건 한 표: 78.5% 독립 찬성

 

1999년 8월 30일, 유엔 감독 하에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민병대의 협박 속에서도 동티모르인들은 새벽부터 줄을 섰다. 78.5%가 독립에 표를 던졌다. 한국정부는 유엔의 도움 요청에 1999년 6월 민간 경찰 5명을 동티모르유엔파견단(UNAMET, United Nations Mission in East Timor)의 CIVPOL(유엔민간경찰)로 파견했다. 한국 경찰이 국제 분쟁 지역의 민주적 절차를 직접 관리한 첫 사례였다.

 

나는 당시 파견된 5명 중 한 명인 최규환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1999년 6월 1차 파병한 이는 경정 차경택, 경위 김충실, 경위 안정호, 경사 최규환, 경장 은요열 총 5명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파견된 5명의 경찰 이야기보다 상록수부대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에 대해 섭섭하지 않으십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상록수 부대는 규모도 크고 5명이 사망하기까지 했는데요. 경찰로 임무를 다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투표 직후 민병대의 보복이 이어졌다. 2주 만에 국토 70%가 파괴됐고, 30만 명이 난민이 됐다. APEC 회의 참석차 뉴질랜드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은 동티모르 사태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의 개입을 주도했다. 다국적군이 상륙했고, 유엔 과도행정기구가 들어섰다. 평화가 돌아왔다.

 

오늘도 아이나로 고갯길에는 십자가 앞에 멈춰 서는 차들이 있다. 동티모르의 독립사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식민과 분단, 민주화를 겪은 한국에게 낯설지 않다. 낭떠러지 끝에서 피어난 자유의 무게를, 이제 우리가 이웃으로서 기억해야 한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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