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의 동상이 있다.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큰 봉우리, 횡보 염상섭이다. 그의 등 뒤 세 개의 큰 바위에는 굵은 한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문장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최근, 딜리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가지 상상을 더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와 이 글귀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한복판에 똑같이 세운다면 어떨까. 그곳을 지나는 동티모르 사람은 이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이 되물음 속에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모든 문제가 기반이 들어 있다. 필자는 딜리 내 여러 도서관을 찾아본 적이 있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도서관은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용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묘하게 적막한 공간이었다. 반면 시내 중심의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Xanana Gusmão Reading Room)과 UNTL 캠퍼스 안의 ‘우마 아메리카(Uma Amerika)’는 달랐다. 학생과 청년들이 책상마다 앉아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공간은 살아
독립의 영웅이 권력을 맡게 될 때, 그 앞에는 늘 두 갈래 길이 놓였다.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는 길과, 자신이 세운 제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길이다. 6월 21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별세한 프란시스쿠 구테흐스(Francisco Guterres) '루올로(Lú-Olo 투쟁시절 가명)' 전 대통령은 후자를 택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식민과 전쟁을 딛고 헌정을 세워본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을 먼 나라의 소식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게 한다. 루올로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24년의 독립 투쟁 저항이 아니라, 그 저항을 끝낸 뒤의 선택이다. 본래 그는 1973년 고향 오수(Ossu)의 학교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던 교사였다. 그러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 뒤, 그는 동료 지도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외교 전선을 폈고 사나나 구스망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이 점령기 도중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루올로는 끝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야전에 남았다. 그는 24년의 전쟁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프레틸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명령과 결단, 생존과 전투가 그의 언어였다. 그런
독립 이후 동티모르 정치를 이끌어온 핵심 지도자 4인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떠났다. 동티모르의 독립영웅이자 제6대 대통령을 지낸 프란시스쿠 구테흐스(Francisco Guterres) 전 대통령이 6월 21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프린스 코트 메디컬 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그는 한동안 이곳에서 집중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사인은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투쟁 시절의 가명 '루올로(Lú-Olo)'로 더 잘 알려진 고인은 1954년 9월 7일 비케케(Viqueque)주 오수(Ossu)에서 태어났다. 본래 교사로 일하던 교육자였으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으로 그의 삶은 바뀌었다. 1974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래 24년에 걸친 인도네시아 점령기 내내 저항운동의 정치·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1998년 저항군 사령관 코니스 산타나(Konis Santana) 사후 프레틸린(FRETILIN) 무장투쟁의 정치적 지도부를 이끌었다. 그는 24년의 전쟁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프레틸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교육이 국가의 토대라는 그의 신념은 정치 입문 이후에도 변치 않아, 생전 "국민이 배우지 못하면 나라는 죽는다
“한국은 동티모르와 경제적인 면에서 공동번영의 길로 어떻게 접어들 수 있을까?” 이것은 필자가 동티모르국립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 선 한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된 질문이다. 양국 관계에는 정치-외교-안보-문화처럼 경제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필자가 품은 것은, 그 여러 분야 가운데 경제적 공동번영의 관계가 과연 동티모르와도 가능할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필자가 2008년 처음 딜리에 자리잡았을 때, 거리에는 UN 평화유지 경찰의 흰색 차량이 오갔다. 2006년 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이 나라가 제 발로 설 수 있을지를 세계가 의심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7년, 그 거리의 나라는 이제 아세안의 열한 번째 식구가 되어 ‘선발국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의심받던 나라에서 따라잡으려는 나라로. 동티모르가 건너온 거리가 이 글의 출발점이다. 1995년의 베트남과 2025년의 동티모르는, 30년의 시차를 두고 거의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필자가 비교의 잣대로 삼은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다. 두 나라는 아세안에서 가장 잘사는 싱가포르-브루나이도, 가장 가난한 축도 아닌,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한국학센터를 출범시키고 그 발전을 도모해온 내내, 줄곧 따라다닌 질문이 있다. ‘한국과 동티모르의 관계는 무엇이 특별한가.’ 질문은 여러 갈래에서 날아왔다. 한국학을 배우러 온 동티모르 학생들이 물었고, 동티모르를 찾은 공직자-기업인-NGO 활동가들이 사석에서 넌지시, 그러나 진지하게 유사한 질문을 했다. 협력 사업을 논의하던 동티모르 정부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이 다른 세 갈래가 끝내 같은 한 점으로 수렴했다. 개별적인 답은 찾기 쉬웠다. 상록수부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개발 협력, 고용허가제(EPS)를 통한 노동력 송출, 한류... 그러나 어느 하나도 양국 관계의 특수성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을 보낸 나라는 한국 말고도 여럿이었다. ODA(공적개발원조)의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것도 양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EPS는 다른 동남아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도였고, 한류는 오히려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에 더 깊게 스며 있었다. 오래 사색한 끝에 이제 그 답에 닿았고, 필자 나름의 답을 이 칼럼으로 적는다. ■ 1999년 한국인 손봉숙 유엔 ‘선거관리위원’ 참여 독립 주민투표 답이 닿은 자리는 199
2011년 어느 오후, 딜리의 한 식당. 옆자리 끝에 무심코 놓여 있던 작은 브로셔 하나가 필자의 시선을 잡았다. 표지에 박힌 글자는 단 한 줄이었다. “왜 쿠바의 의료서비스가 강한가?” 발행은 라오 하무툭(La'o Hamutuk). 테툼어로 ‘함께 걷는다’는 뜻을 가진 이 작은 싱크탱크는, 정부와 국제기구의 개발 사업을 가장 매섭게 감시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NGO(비정부 기구, nongovernmental organization)가 ‘사회주의 섬나라의 의료를 왜 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식당 천장 선풍기가 한 박자 늦게 도는 소리를 들으며, 표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 기억이 있다. 이 질문의 답을 만나려면, 딜리에서 차로 다섯 시간 떨어진 산 너머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야기는 2003년 2월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된다. 비동맹정상회의(NAM)의 한 조용한 회담장에서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과 피델 카스트로의 사절이 마주 앉아 의료 협력의 큰 틀을 합의했다. 그 합의의 결과가 동티모르 산골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2004년 4월, 에르메라의 한 마을. 가까운 보건소까지 걸어서 한나절이 걸리던 그곳에 흰 가운을 입은 낯선
2013년, 딜리의 프레지덴치 니콜라우 로바투 국제공항. 한국으로 떠나는 동티모르 청년 한 명을 배웅하기 위해 가족 열 명, 때로는 스무 명이 청사 앞을 메웠다. 같은 구도, 다른 표정으로 셔터가 거듭 눌렸다. 청년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가족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활주로가 보이는 자리에 서서 기체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은 1960~70년대 김포공항을 떠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한국 노동자들의 사진과 50년의 시차를 두고 겹쳐졌다. 가족과 국가를 한 사람의 어깨에 실어 보내며 말없이 환송하는 공동체의 정서가, 다른 언어와 다른 피부색을 입고 거기에 있었다. 2008년 한-동티모르 고용허가제(EPS)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래, 딜리 공항의 같은 장면은 한 세대의 집단적 초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티모르 해외 노동의 흐름은 크게 영국-한국-호주-포르투갈 네 갈래로 나뉜다. 영국에는 포르투갈 국적 취득권을 활용해 옥스퍼드-피터버러-북아일랜드 던개넌 등의 육류가공-물류 현장으로 진출한 1만 6000~1만 9000명이 머무르며, 던개넌은 인구 대비 동티모르인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
에르메라(Ermera)의 새벽은 커피 향으로 시작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등성이에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농부들은 이미 붉게 익은 커피 체리를 손으로 하나씩 따고 있다. 농약도 없고, 비료도 없다. 수십 년 된 커피나무가 야생에 가깝게 자란 숲 속에서, 인간의 손길은 수확의 순간에 닿는다. 이 장면은 소순다 열도 동쪽 끝, 인구 약 142만명의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의 현재다. 동티모르 커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글로벌 커피 기업들과 세계 각지의 스페셜티 로스터들이 오래전부터 이곳 원두를 수입해왔음에도, 이 나라 이름은 커피 산지로서 좀처럼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았다. 잘 보관된 커피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동티모르의 커피 역사는 19세기 포르투갈 식민 통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요 수출품이던 백단향 자원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갈되자, 포르투갈은 대체 작물을 모색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시도했지만, 척박한 고산 토양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은 커피뿐이었다. 특히 수도 딜리 남서쪽에 위치한 에르메라 지구가 커피 재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서늘한 고지대 기후, 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