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우로 섬 서쪽 해안, 아다라(Adara) 마을. 인구 100여 명의 이 작은 마을에는 ‘동티모르의 해녀’라 불리는 여성 잠수부들이 산다. 현지 방언으로 와와타 토푸(Wawata Topu), '물에 잠수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손으로 깎은 나무 고글을 쓰고, 직접 만든 작살을 들고, 치마를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드는 이 여성들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필자는 아다라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담그는 순간, 산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랏빛, 주황빛, 형광 초록빛 산호 사이로 수백 종의 열대어가 헤엄쳐 다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러나 그 황홀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해저 바닥의 높낮이가 극단적이었다. 한 발짝 옆이 낭떠러지였다. 숨이 차서 발을 딛고 서야 할 순간, 내 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바닥이 솟아오른 지점까지 간신히 헤엄쳐 가며,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바다는 아름답지만, 만만하지 않다. 이 바다를 매일 맨몸으로 드나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와와타 토푸의 대단함을, 조금만 맛보고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산호 정원과 심연이 공존하는 이 바다가, 그녀들의 일터다. 사실 아다라에 도착하기 전, 이
딜리의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접견실에는 특별한 타이스(Tais)가 놓여 있다. 화려한 전통 문양 사이로 서툴지만 선명하게 수놓인 한글, "감사합니다.“ 동티모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동티모르국립대(UNTL) 학생들이, 자신들의 유학길을 내준 한국 대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학생들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여야만 완성되는 이 직물에 '감사합니다'라는 한글을 새겨 넣은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는 선물인 타이스에, 한국에서 배운 따뜻한 말을 얹었다. 대사관의 타이스가 ‘소리 없는 감사’라면, 딜리 국회 의사당(Parlamento Nacional) 본회의장의 타이스는 ‘국가’ 자체다. 들어서면 의원들의 좌석보다 먼저 눈에 꽂히는 것이 벽면을 따라 걸린 형형색색의 타이스들이다. 동티모르의 지자체를 상징하는 이 직물들은 저마다 문양과 색상이 다르다. 로스팔로스의 타이스에는 악어와 닭이 이깟(Ikat) 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옆에 걸린 오에쿠시의 것은 짙은 주황빛 꽃무늬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친다. 글자를 몰라도 옷만 보면 어느 고향 사람인지 알 수 있다던 옛말처럼, 국회 벽면은 동티모르의 모든
남서쪽 끝자락, 국경 도시 수아이(Suai)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했다. 그 덥고 습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마을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조상신이 머무는 신성한 집, ‘우마 루릭(Uma Lulik)’ 앞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전통 가옥의 문앞에 으레 악귀를 쫓는 무시무시한 수호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예수였다. 놀라웠던 건 그 표정이다. 창을 든 전사도, 심판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풍파를 다 품어줄 듯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그 토속적인 우마 루릭의 문 앞에 양쪽 기둥에 서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모습.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에게 가톨릭은 바티칸에서 건너온 딱딱한 교리만은 분명 아니었다. 척박한 땅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루릭(Lulik, 신성한 힘)’ 그 자체였다. 바티칸 시티라는 특수한 도시국가를 제외하고 동티모르는 종교자유가 있는 국가들 중에 사실상 가장 높은 비율의 가톨릭 신앙을 보이고 있다. 2022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무려 97.6%가 신자다. 딜리(Dili)에도 모스크 돔이 있긴 하다. 하지만 동티
2016년 7월,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새벽 5시, 찢어질 듯한 오토바이 배기음이 창문을 흔들었다. 폭동인가 싶어 내다본 거리에는 초록과 빨강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동티모르 국기가 아니었다. 이 땅을 지배했던 식민 종주국, 포르투갈의 국기였다. 유로 2016 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이 프랑스를 1-0으로 꺾던 그날, 딜리는 리스본보다 더 뜨겁게 울었다. 이 기이한 풍경의 정점을 찍은 건 다름 아닌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ão)이었다. 동티모르 독립 투쟁의 상징이자 초대 대통령인 그 국부(國父)가 거리로 나왔다. 양손에는 동티모르 국기와 포르투갈 국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식민 지배에 맞서 17년간 정글을 누빈 게릴라 사령관이, 옛 통치국의 승리에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모순 덩어리다. 왜 독립 영웅이 옛 식민 종주국의 깃발을 흔드는가? 필자도 이 장면 앞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표면적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옆에 붙은 거인, 인도네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24년의 불법 점령 기간 동안 전체 인구의 최소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몬 인도네시아와 자신들을 구분 짓는 끈이 바로 포르투갈어, 가톨릭, 그
동티모르에서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호텔까지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적도의 오후 햇살이 비출 때면 그 10분은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 셔츠가 등에 달라붙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호텔 로비 카페에서 만나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는 더욱 강렬했다. 작지만 매혹적인 그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혀를 감쌌다. 나는 짧은 꿀맛 같은 간식 시간을 아직 기억한다. 유럽의 남쪽 끝 포르투갈과 아시아의 거인 인도네시아가 이 작은 섬나라의 식탁 위에서 만난다. 포르투갈식 베이커리에서는 달콤한 바닐라와 버터 향이 진동하고, 인도네시아식 식당과 노점상에서는 짭조름한 쇠고기 국물 냄새가 뒤섞인다. 이 기묘한 두 향기의 공존은 두 식민통치국가가 남긴 동티모르인의 삶 속에 역사 그 자체다. ■ 포르투갈 식민지가 남긴 달콤한 유산, '파스텔 드 나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첫 번째 맛은 단연 '파스텔 드 나타',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다. 오랜 식민 지배가 남긴 유산이다. 리스본의 제로니모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남은 노른자로 빚어낸 이 과자는, 19세기 초
동티모르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를 때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이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왜 여기서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곳(Lulik)입니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를 갖추는 겁니다.“ 그제야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 그 위에 묶인 야자잎과 붉은 천. 관광객 눈에는 이색적인 장식품이었을 것이 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영이 지켜보는 영역. 신성하다는 뜻 그래서 금지의 뜻을 함께 갖는 루릭의 대표 상징이 ‘타라 반두(Tara Bandu)’다. 테툼어로 ‘타라(Tara)’는 ‘매달다’, ‘반두(Bandu)’는 ‘금지’를 뜻한다. 금지의 약속을 나무에 걸어 놓고 특정 활동을 하지 않기로 금기하는 관습법이다. 성스럽다는 것 ‘루릭’이란 무엇인가. 동티모르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누군가 루릭이라 이야기를 내게 묻곤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신성한 것이라서 금기시 되는 것 같다’는 밋밋한 답을 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의 대표 인류학자 조시 트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의 교정은 흡사 바벨탑과 같았다. 나이 든 교수들은 포르투갈어로, 젊은 교수들은 테툼어로 강의했다. 학생들끼리는 저마다 출신 고향의 언어로 수다를 떨었다. 쉬는 시간에 그들 옆에 서서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멍했다. 테툼어에서 단어는 ‘리아푸안(liafuan)’이다. 목소리(lia)에서 맺힌 열매(fuan)라는 뜻이다. 동티모르인들은 말이란 목소리가 익어 맺힌 열매,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자양분으로 이해했다. 그 열매들을 모아 체계화한 것이 사전이다. 1889년부터 오늘까지, 135년에 걸친 테툼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곧 동티모르 정체성의 역사다. 최초의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은 포르투갈 선교사 실바 신부가 마카오에서 출간한 『포르투갈어-테툼어 사전』(1889)이다. 1877년 티모르에 첫발을 디딘 후 12년 만의 쾌거였다. 이후 라파엘 다스 도레스가 『테툼어-포르투갈어 사전』(1907)을 리스본에서 출간했다. 식민 통치와 선교를 위한 도구였지만, 역설적으로 테툼어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제병합 1년 만에 『인도네시아어-테툼어 사전』(1976
2025년 10월, 한국과 동티모르 사이에 두 개의 다리가 놓였다. 10월 9일 한글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원이 한국어-테툼어 사전을 출간했다. 고려대 사전학센터와 동티모르국립대 집필진이 함께 완성한 두 번째 사전이다. 17일 뒤, 동티모르는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승인됐다. 제도의 다리와 언어의 다리가 같은 달에 완성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은 동티모르에서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할까? 동티모르 딜리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곧 하나의 벽과 마주친다. 현지인과의 소통이다. 회의실에서 영어로 합의한 내용이 현장에 가면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중국인들은 이미 테툼어로 농담까지 주고받고, 미국대사는 부임 전 테툼어 연수를 마치고 동티모르인들과 직접 소통한다. 한국인은 의례 영어 통역사에 기댄다. 그러는 사이 업무 실행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우리는 동티모르가 조금씩 더 깊은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한다. 2024년 동티모르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노동자들의 송금액은 2억 4,480만 달러(약 3,612억 240만 원)로 비석유 GDP의 12~13%를 차지한다. 한국발 송금은 전체의 22%인 5,380